<17화>
말버릇이 꽤 나빴지만 아직은 귀여운 수준이니 지금부터 잘 구슬려야겠다.
무엇보다도 저대로 편식을 계속한다면 레오니의 영양 상태는 안 좋아질 것이다.
타의에 의해서였지만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루시엘이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루시엘은 성인이 되어서도 소녀처럼 작았고, 뼈처럼 앙상했다. 영양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해, 말라죽은 나뭇가지 같았다.
루시엘이 훗날 제대로 된 보석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은 어쩌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레오니는 벨슈타인의 핏줄이니 타고난 마력도 상당할 터. 마력을 감당해야 할 기초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충분한 영양을 골고루 섭취해야 했다.
거기다 어린 나이에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체력적으로도 상당한 부담을 주는 일이었으니까.
레오니의 일로 루시엘이 생각에 젖어 있는 동안, 디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디저트가 나왔다.
상큼한 복숭아 셔벗과 바삭한 호두 파이가 한 조각씩 놓였다. 입가심으로 좋은 메뉴였다. 루시엘은 감사한 마음으로 호두 파이부터 먹고 복숭아 셔벗을 호로록 떠먹었다.
정성을 다해서 부스러기 하나 놓치지 않고 야무지게 음식을 먹는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반면에 이번에도 레오니는 포크로 호두를 긁어냈다.
그 모습을 보던 길리아트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이런, 레오니. 호두도 먹기 싫으냐?”
“……녜, 생긴 거 이상해요.”
그때 루시엘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내 레오니에게 보여 주었다. 투명하게 포장된 동그랗고 빨간 사탕.
“호두 먹으면 이거 줄게.”
“……!”
루시엘이 지난번 주었던 그 딸기 맛 사탕이었다. 사실 똑같은 걸 가져오라고 사샤에게 명령했는데, 루시엘이 준 것만큼 맛이 없었다. 그마저도 많이 먹으면 충치가 생긴다면서 도로 압수당했다.
그 악마의 맛을 아는 레오니로서는 다른 선택이 불가했다. 그걸 아는 루시엘이 말을 바꾸었다.
“아니다. 그냥 할아버님 드려야지.”
다급해진 레오니는 자신이 골라 놓은 호두 조각 하나를 조심스레 집어 먹었다.
“전부 먹어야 돼.”
루시엘이 접시에 남은 호두를 가리켰다. 레오니가 볼을 잔뜩 부풀리면서 남은 호두도 스푼에 올려 전부 먹기 시작했다.
오도독 씹히는 식감이 나쁘지 않았다. 먹다 보니 고소한 맛이 올라왔다.
“어때, 먹어 보니 맛있지?”
“……나뿌지 않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길리아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헛, 레오니가 선생들 말은 안 들어도 루시엘의 말은 잘 듣는구나.”
“……식습관 선생은 잘라야겠군.”
공작도 허무하면서도 루시엘의 하는 양이 신통해 그리 말했다.
접시를 깨끗이 비운 루시엘은 가방을 다시 뒤적여 하얀 종이를 꺼냈다.
꼬물꼬물 뭐라고 적은 다음, 단풍잎처럼 자그만 손을 이리저리 꼼지락대면서 종이를 접기 시작했다.
마침내 완성된 건, 튤립 모양 꽃이었다.
언니가 자신에게 접어 주는 것을 보고 어깨너머로 배웠다.
그것을 눈여겨본 공작이 물었다.
“뭘 하는 것이지?”
잠시 쑥스러워진 루시엘이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말했다.
“음식이 전부 근사해서 만든 분에게 드리려고요. 감사의 의미로요.”
이어서 턱을 괴고 있던 공작이 잔을 빙빙 돌려 남아 있던 적빛 포도주를 마신 후 말했다.
“……그럼 내 건?”
* * *
다음 날부터 루시엘은 본격적으로 레오니의 식사 메이트가 되었다. 레오니가 먼저 밥 먹자고 올 리가 만무했으니, 루시엘이 먼저 방문을 두드렸다.
“밥 먹자.”
그러나 순순히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레오니는 루시엘을 무시하듯 고개를 홱 돌리면서 마차 장난감에 집중했다.
“안 먹어. 놀 거야.”
“밥 먹고 같이하자.”
“시러.”
루시엘은 당근 가방 속에서 딸기 사탕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레오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제부터 누나랑 밥 잘 먹으면 하루 하나씩 줄 거야.”
“으으, 어쩔 수 엄찌.”
처음에는 반항하는 일이 잦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레오니도 거부하던 음식을 잘 먹게 되었다.
사탕 작전도 먹혔지만 그것보다 더 먹혀든 건 바로 칭찬이었다.
“……이제 콩도 잘 먹는걸? 너무 멋지다.”
루시엘의 칭찬 한마디에 레오니는 안 그런 척하면서도 보조개 우물이 폭 패였다.
“봐 바. 나 인제 파프리카도 잘 먹어.”
“그래, 너무 대단해.”
거기에는 주방장의 협력도 있었다. 코끼리 모양, 사자 모양 등 동물 모양으로 음식을 장식해 주는 덕에 레오니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었다.
루시엘은 자신이 알게 된 음식을 먹는 기쁨을 레오니도 점차 알게 되어 가는 것 같아서 뿌듯해졌다.
이제는 레오니가 먼저 루시엘의 방을 찾아올 정도였다.
“루씨에 뉴나, 밥 먹자.”
석류알처럼 반짝이는 두 눈의 레오니가 얌전히 도시락 통을 가져오면서 그렇게 말할 때는 왠지 모르게 약간의 감동도 느껴졌다.
루시엘이 웃으면서 아이의 새는 발음을 고쳐 주었다.
“루씨에가 아니라 루시엘.”
“루―씨에.”
“…….”
레오니는 앞니가 두 개나 빠진 탓에 루시엘의 이름은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정도가 어딘가.
‘꺼뎌.’
‘너 시러.’
루시엘에게 함부로 대하던 언사도 줄었으니 예전에 비하면 굉장한 발전이었다.
공작과 길리아트는 물론, 레오니를 담당한 선생들과 시녀들도 모두 놀라 뒤집어질 정도의 큰 변화였다.
“흐음. 아이의 마음은 아이가 잘 아는 건가. 루시엘에게 제대로 교육을 시켜 레오니를 가르치게 하는 방법이 더 빠르겠군.”
루시엘에 대한 공작의 평가가 더욱 올라간 것은 물론이었다.
* * *
여느 날과 다름없이 레오니와 시간을 보내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뒷짐을 지고 제 방문 앞 복도에 서 있는 길리아트를 발견한 루시엘이 먼저 반가운 마음에 외쳤다.
“앗, 할아버님!”
뾱뾱뾱.
조로로 달려오는 루시엘을 보자마자, 길리아트는 애써 숨기고 있던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오, 루시엘이로구나.”
마치 웬일이냐는 듯 물었지만 루시엘 본인의 방이었으니 약간 어색한 반응이라는 걸 길리아트는 뒤늦게 깨달았다.
“혹시 절 기다리셨어요?”
길리아트는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네게 보여 줄 것이 있단다, 루시엘.”
“……?”
길리아트는 눈이 동그래진 루시엘을 안은 채, 아이의 옆방 문을 달칵 열었다.
그러곤 루시엘을 푹신한 카펫 위에 내려놓았다. 루시엘의 진홍빛 눈망울이 잔뜩 커졌다.
방 안에는 온통 양말투성이였다.
양말로 엮어 만든 나무에 주렁주렁 걸린 것도 양말이었고, 바닥에는 양말로 만든 알록달록한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루시엘이 타고 놀 수 있는 귀여운 목마도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양말로 만든 쿠션과 소파도 있었고, 선물 상자에는 양말이 가득가득 들어 있었다.
“이건…… 양말이잖아요.”
“그래, 양말을 좋아한다고 들어서 네 놀이방을 꾸며 보았단다. 어서 들어가 보렴.”
루시엘은 순간 꿈일까 싶었다.
성인의 영혼을 가졌지만 여전히 루시엘의 내면에는 아이 때의 순수함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포근하고 보드라운 양말들을 보자, 웃음이 소록소록 지어졌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선물이었다. 길리아트의 따뜻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루시엘은 가슴이 뭉클해져선 길리아트를 돌아보았다.
“할아버님!”
루시엘은 말없이 길리아트의 품에 폭 안겼다.
“좋으냐?”
고개를 깊이 끄덕인 루시엘이 대답했다.
“저 여기 있는 양말들 평생 신을래요.”
“하하, 그러려무나. 그나저나 루시엘, 할아버님 말고 할아버지라고 불러 주렴.”
“아…….”
자그만 머리통을 부드럽게 쓸어 주던 길리아트의 말에 루시엘이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하, 할아버지.”
길리아트는 루시엘이 친근하게 불러 주자, 감동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이고, 귀여운 녀석.”
루시엘의 말랑하고 보드라운 양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어두운 오오라를 풍기던 그림자 하나가 스윽 사라졌다. 왠지 모를 서늘함을 느낀 길리아트와 루시엘이 뒤를 돌았을 땐 아무도 없었다.
공작은 조금 전 루시엘의 표정을 떠올렸다. 세상에서 이렇게 소중하고 좋은 것은 처음 받는다는 듯, 감동한 얼굴이었다.
커다란 눈은 그렁그렁해져선 금방이라도 눈물까지 흘릴 듯 기뻐하고 있었다. 의류점을 주었을 때와는 판이한 반응에 왠지 모를 허전함이 느껴졌다.
그는 내심 기가 막혔다.
“설마 내가 섭섭함을 느끼는 것인가?”
남에게 무언가를 기대한 적도, 그 기대를 충족한 적도 없기에 공작에게는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감정이었다.
“……모를 일이군.”
섭섭함을 인정하니 다른 감정도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제게는 공작님, 이라고 거리감이 상당한 호칭으로 부르는데 아버지 길리아트에겐 할아버지라는 친근하고도 깜찍한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래서는 진정한 딸 같은 며느리를 둔 건 자신이 아니지 않은가.
루이비드는 턱을 문질렀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양말에 버금가는 것을 찾아야겠다.
“……장갑을 좋아하는지 떠봐야겠어. 아니지. 꽃이 나으려나.”
사내 녀석들과는 다르게 여자아이란 아주 섬세하고 특별했다. 아니, 단순히 여자아이가 아니라 루시엘 그 아이가 특별해서인지도.
집무실로 들어서는 공작의 입매가 자그맣게 말렸다.
집무실 안에는 부관 엘링턴이 서류를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두고 갔을 텐데 엘링턴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다.
“여기 결제하실 서류입니다.”
“용건이 있는 눈친데.”
자리로 돌아간 공작이 자리에 앉으며 서류를 펼쳐 보았다. 가신들에게서 넘어온 새로운 사업 편성안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엘링턴이 심호흡하며 말했다.
“이브나크에 시찰을 다녀오고 싶습니다.”
뜻밖의 요청에 공작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제 부관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일로?”
“이브나크의 경제가 말라 가고 있으니,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엘링턴의 선한 초록빛 눈동자가 잘게 떨렸고, 마른 입술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녀석은 표정 연기가 늘 부족하단 말이지.’
공작은 의자에 더욱 몸을 기대면서 부관을 주시했다.
“발루크 상단이 얼마나 더 개 같아졌는지 알아보려고? 말해 봐, 엘링턴. 다른 진짜 용건.”
“각하, 그런 건 없습니…….”
“기회 줄 때 말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