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4)화 (14/282)

<14화>

“……꺼뎌.”

루시엘은 흠칫 놀랐지만 굴러가는 신발을 붙잡았다.

환한 금발에 핏빛 적안, 벨슈타인의 상징. 아이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몰랐지만.

‘이 애가 레오니 공자?’

다섯 살배기 아이임에도 또렷한 이목구비, 잔뜩 일그러진 미간, 부루퉁하게 나온 입술과 부푼 뺨.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었다.

아이는 노골적으로 루시엘을 쏘아보았다. 저 눈빛은 마치 자신의 것을 누군가에게 뺏겨서 원망하는 듯한 눈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아이의 분노를 전부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루시엘은 아이에게 신발을 내밀었다. 그러나 아이는 받을 생각이 없는지 그것을 탁 쳐 냈다.

“……필요 업써.”

루시엘은 맨발이 된 아이의 한쪽 발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필요 없어?”

“그래, 네가 만진 거니까 시러. 그냥 꺼뎌.”

정말이지 고집불통에 안하무인 꼬마였다.

레오니는 뭐가 그리 분한지 씩씩대며 말했다. 루시엘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아이는 제법 포동포동했다.

루시엘은 아이에게 걸어가서는 다른 한쪽 신발에 손을 툭 댔다.

“자, 내 손 닿았으니까 이것도 싫어? 필요 없으면 이쪽도 줄래?”

예상하지 못한 말에 당황한 듯 아이가 움찔거렸다.

“머?”

“기왕 버릴 거면 한 켤레로 버려 줘. 누군가 신을 수 있게 말이야.”

레오니는 당황했다. 물끄러미 자신을 향하는 진홍빛 눈동자는 무척 차분했다. 겉보기에는 자신보다 고작 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데. 이 여자애한테는 알 수 없는 여유가 있었다.

“……미텼어?”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상관없는데, 신발은 죄가 없잖아. 그러지 마.”

루시엘이 옅은 미소를 지은 후, 다른 신발을 놓아두곤 뒤를 돌았다.

“……야, 하얀 머리. 이 길로 다니지 마.”

루시엘이 다시 뒤를 돌았다. 마법이 걸린 지름길을 말하는 건가?

“길에도 주인이 있니?”

“그래. 우리 형아가 날 위해서 만들어 준 거란 말이야!”

아이가 화난 이유가 이거였나.

루시엘은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다 여기면서 말했다.

“형을 좋아하는구나.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거라면 사용하지 않을게.”

“……그래, 글구 너. 우리 형아는 절대 결혼 안 할 거야. 니네 집으로 가!”

툴툴대던 진짜 이유는 이것이었나 보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공작님과 약속했으니까.”

루시엘이 거절하자, 레오니의 포동포동한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화르륵.

레오니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 빛나며 시동어를 외자, 자그만 손끝에 불씨가 소환되었다.

“나눈 인정 못 해.”

금방이라도 루시엘을 향해 불씨를 날려 버릴 기세였다.

과연 마법의 명가 벨슈타인이었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마법을 구현하다니……. 그러나 아직 제대로 조절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불씨를 소환한 자그만 손바닥이 떨렸고, 석류알처럼 붉은 눈동자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해하고 있어. 꼭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네.’

아마도 공작은 아들의 마법을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저렇게 불안정한 컨트롤로 마법이라니, 아이 스스로에게조차 위험한 일이다.

루시엘은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마법으로 날 다치게 하면 후회하게 될 거야.”

“……후회, 그딴 거 안 해!”

레오니가 불씨를 날렸지만 루시엘은 간단히 피했다. 처음부터 공격할 생각이었으면 불씨를 소환하는 게 아니라, 공격 마법을 바로 구현했을 것이다. 아니면 할 줄 아는 게 파이어 마법뿐이었거나.

“레오니.”

“모야, 너…… 내 이름은 어떠케 알아?”

바닥에 떨어진 불씨를 루시엘이 얼른 꾹꾹 밟았다. 근처에 있는 태피스트리에라도 옮겨지면 정말 불이 날 수도 있었다.

“공작성에서 널 모르는 사람은 없거든.”

그때였다. 멀리서 레오니를 부르는 유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오니 도련님……! 도련님, 어디 계세요?!”

“칫, 너 운 조은 줄 알아. 다음에 딘짜 혼내 줄 고야.”

하나도 두렵지 않은 협박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

루시엘은 등에 있던 가방을 풀더니, 주섬주섬 무언가를 한 움큼 꺼냈다. 있는 힘껏 쥔 것이지만 네 개밖에 잡히지 않았다.

루시엘은 그중에서 초콜릿 하나를 골라서 껍질을 벗기더니 입안에 홀랑 넣었다.

“으음, 사르르 녹고 달콤해.”

아이치고는 진한 레오니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당연히 자신에게 주는 줄 알았던 레오니가 인상을 썼다.

“모하는 고야, 줄려던 거 아냐?”

“맞지만 아직은 아니야.”

‘순순히 줄 순 없지.’

다음은 딸기 맛 사탕 차례였다. 껍질을 벗길 때부터 딸기 향이 솔솔 풍겼다. 그걸 입안에 넣어 살살 굴리던 루시엘이 작게 ‘와’ 하고 탄성을 냈다.

“새콤달콤해. 딸기 맛이 역시 최고야.”

“아, 댔어. 그딴 건 내 방에도 잔뜩 쌓여 있어.”

“그래? 그럼 안 줘도 되겠다. 특히 이 딸기 맛 사탕은 주방장님이 나를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 주셨다고 했는데…….”

“거짓말. 나보다 니가 특별 대우를 받을 리 업자나. 글고 별로 안 먹구 싶어.”

그 말이야말로 거짓말인 것 같았다. 레오니의 눈이 슬금슬금 루시엘의 손바닥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루시엘은 가방에서 딸기 맛 사탕을 더 꺼내 보였다.

“이거 줄까?”

“…….”

홱 하고 낚아채는 아이의 통통한 손을 루시엘이 꼭 붙잡았다.

“이씨. 놔.”

“한 가지 약속하면 줄게.”

“……몬데.”

“신발 제대로 신어.”

‘고작 그거뿐이라고?’

레오니는 툴툴대면서도 깽깽이걸음으로 다가가 신발을 제대로 신었다.

그러자 루시엘이 다가와 자그만 주먹을 펼쳤다. 레오니의 손바닥 위로 딸기 맛 사탕과 초콜릿, 우유 맛 캐러멜을 떨어뜨렸다. 울긋불긋하던 아이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가 다시 아닌 척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게 전부야?”

“응. 남은 건 다 내 거.”

“…….”

레오니는 미간을 좁히면서도 딸기 맛 사탕을 입안에 쏙 넣었다. 혀에서 굴릴수록 새콤달콤하게 코팅된 설탕이 녹았고, 이빨로 톡 깨 먹자 안에 들어 있던 딸기 퓌레가 터져 나왔다.

이런 건 도련님인 그조차도 처음 먹어 보는 맛이었다.

아니, 애초에 디저트는 언제나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관심 두지 않았다.

“딸기 맛 더 줘.”

“안 돼.”

“…….”

한 번도 원하는 걸 못 가져 본 적이 없는 레오니에게 안 돼, 라는 말은 조금 충격이었다. 더욱이 먹을 것에 있어서는 더더욱.

루시엘이 말했다.

“아까 일, 나한테 마법으로 협박한 거 사과하면 하나 더 줄게.”

그러나 그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오니는 볼을 더욱 부풀렸다.

“……댔어. 그딴 사탕, 말만 하면 이따만큼 생겨.”

“그래. 그럼 필요 없겠네. 안녕.”

루시엘은 미련 없다는 듯 가방을 맨 후, 그곳을 총총 빠져나갔다. 레오니는 왠지 모르게 진 것 같아 분했지만, 곧 시녀 사샤가 달려왔다.

“레오니 도련님! 큰일이에요. 가주님께서 찾고 계세요.”

레오니는 히익 하고 놀라 딸꾹질이 시작되었다. 글쓰기 수업을 몰래 빠져나온 터였다.

사샤는 레오니를 방까지 안아 들고 와 아이를 내려놓았다. 안에는 팔짱을 낀 채, 아들을 기다리던 공작이 앉아 있었다. 옆에는 글쓰기 선생인 리안델이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레오니는 아버지의 눈을 차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대체 수업 도중에 어딜 다녀온 거지?”

“…….”

레오니가 입술을 꾹 다물자, 보다 못한 사샤가 대신 말했다.

“도련님께서 답답해하셔서 잠시 바람을 쐬게 해 드리고 왔답니다.”

“리안델 선생, 그게 사실인가?”

힐끔 사샤와 레오니의 눈치를 보던 리안델이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바람 쐬는 일이 한두 번은 아닌 게 문제였지만, 그렇습니다.”

사실 레오니가 수업을 제대로 듣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고작 십 분 앉아 있는 일조차 힘든 지경이었다.

“답답한 걸 참고 인내하는 것도 공부가 된다.”

“가주님, 도련님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어려운…….”

“사샤, 감싸지 마라.”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키제프는 다섯 살에 이미 예법과 언어, 역사학까지 통달했다. 자신 역시 그러했고.

그런데 레오니는 가만히 앉아 집중을 하는 것조차 어려워했고, 아직도 글자를 익히지 못했다. 글쓰기는커녕 이름도 쓸 줄 몰랐다.

“죄송합니다.”

“잠시 레오니와 둘이서만 이야기하겠다.”

공작의 말에 사샤와 리안델 선생이 물러갔다. 공작은 자신을 빼다 닮은 외양이지만 성격은 딴판인 아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레오니.”

“…….”

레오니가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레오니, 대답해.”

“…녜.”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마법 수업도 배우게 해 주었다. 동물을 기르고 싶다고 해서 동물원도 꾸며 주었다. ……대체 뭐가 불만이지?”

“…….”

레오니의 눈이 일렁이며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뭐가 그렇게 늘 불만이냐 물었다.”

점점 서늘하게 낮아지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겁을 먹은 레오니가 울먹일 듯 말했다.

“형아한테 갈래요.”

“형은 아카데미에 갔다. 너도 정해진 나이가 되면 가게 될 일.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러믄 엄마한테 갈래요.”

입술을 쭉 내민 채 부리는 레오니의 어리광에 공작이 잠시 한숨을 쉬었다. 한층 싸늘해진 말투로 그가 딱딱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일이 정리되는 대로 돌아오실 거라고 이야기했을 텐데.”

“거짓말. 벌써 열 밤도, 스무 밤도 넘게 기다렸눈데요…….”

“어리광 부리지 마. 그 일과 네 수업 태도가 무슨 상관이 있지?”

“…….”

“……대답해 봐.”

“흐끅.”

어느새 아이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상관 업써요.”

“수업을 몰래 빠져나간 건 잘못한 일이다.”

아버지의 말에 레오니가 잔뜩 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오니 잘모테써요.”

공작이 손수건을 꺼내 레오니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엄격한 아버지지만 손길은 따뜻해서 레오니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좋다. 잘못을 인정했으니 선생님께 사과하도록.”

“……녜. 쿨쩍.”

“함부로 마법도 안 쓰고, 말과 행동도 바르게 하고, 수업도 빠지지 않으면 엄마는 금방 돌아오실 거다.”

“…녜.”

레오니는 오늘 그 세 가지를 전부 어겨 버린 터라 몹시 찔렸다.

“온종일 네가 사고 친 목록을 듣는 것도 지치는구나.”

“…….”

레오니의 어깨가 더욱 풀이 죽었다.

“앞으로 지켜볼 거다. 잘할 수 있지?”

“……녜.”

“참, 오늘 저녁 만찬에 레오니 너도 참석해라.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 새로운 가족이니 따뜻하게 맞이해 주어야 한다.”

그러자 레오니의 눈동자에 다시 불꽃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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