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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3)화 (13/282)

<13화>

그러자 에바는 조금 전 루시엘이 다녀갔던 일을 떠올렸다. 공작의 시선이 히아신스 꽃망울에 닿아 있었다. 그녀는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히아신스의 꽃말입니다.”

“그렇군.”

공작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시엘이 제게 ‘마음의 기쁨’을 주고 간 것이다.

그 자그만 아이가 제 마음에 서서히 울림을 주고 있었다.

고작 시시한 꽃과 메모로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더는 시시하지 않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런 게 딸 가진 행복과 비슷한 게 아닐까.’

별것 아닌 데도 자신을 기쁘게 하니 말이다. 가신들이 지겹게 늘어놓던 딸 자랑이 더는 부럽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공작이 검지로 히아신스의 꽃망울을 톡톡 건드렸다. 달콤한 내음이 솔솔 풍겨 왔다.

긴 회의가 재개되기 전 휴식 시간이지만 공작은 회의실에 일찌감치 나타났다.

그의 예상대로 오늘도 길렌 백작과 루퍼스 자작의 딸 자랑이 한창 이어지는 중이었다.

“녀석, 얼마나 귀여운지. 아침마다 꼭 졸린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인사한다니까.”

최근 늦둥이를 본 길렌 백작의 너스레에 루퍼스 자작도 지지 않고 말했다.

“우리 로렌은 출근할 때마다 배웅을 나온다니까요, 하하하.”

기회를 엿보던 공작은 이때다 싶었다. 오늘이야말로 며느리를 자랑할 순간인 듯했다. 루이비드가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던졌다.

“경들이 왜들 그리 딸이 좋다고 하는지 알겠더군.”

“……예?”

이어서 공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그의 재킷 속주머니에서 척 하고 튀어나왔다. 작은 히아신스 꽃묶음과 메모였다.

“…….”

“그게 무엇인지요?”

주변은 처음 보는 공작의 행동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나 공작은 멈추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히아신스 꽃이야. ‘마음의 기쁨’이라는 꽃말을 가졌지.”

꽃말이라니, 공작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뭇 감상적인 말이었다.

“우리 새아가가 내 집무실에 히아신스와 함께 메모를 놓고 갔더군. 정말이지 귀엽지 않나?”

그리 자랑하는 루이비드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들 어떠냐, 너희들은 이런 거 없지? 하는 듯한 공작의 눈빛에 가신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하하…… 아가 마님께서는 저, 정말 사랑스러우신 분입니다.”

눈치 있는 이들은 빠르게 공작의 기분을 맞춰 주었고, 눈치 없는 이들은 더한 딸 자랑을 하다가 공작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

그날 공작은 가신들을 만날 적마다 은근슬쩍 루시엘의 메모와 꽃을 자랑했다. 이제는 루시엘이 적어 준 메모가 낡아서 너덜거릴 정도였다.

한 번 팔불출 짓에 재미를 들린 공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잠시 외출을 다녀온 아버지의 집무실에 들러선 능청스레 안부를 물었다.

“원하는 물건은 구하셨습니까?”

“아니. 공방이 거의 문을 닫아서 구할 수 없더구나.”

“에바에게 경매소에 알아보라고 하면 될 겁니다.”

공작의 말에 길리아트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다. 내가 구해야만 의미가 있는 물건이라…….”

사실 길리아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루이비드가 루시엘에게 의류점을 통째로 사 주었다는 말을 듣고, 당장 자신도 시내의 장난감 상점을 샀지만 아직 주지 못했다.

루시엘이 부담스러워했단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간 지켜본 루시엘은 그런 아이였다. 값진 것보다 진심이 담긴 소박한 선물을 더 좋아하는 아이. 밀크티 한 잔조차 감사히 여기는 아이.

그래서 길리아트는 영지 밖에 있는 과수원에 다녀왔다. 그는 작은 푸푸나무 몇 그루를 키우고 있었다. 푸푸나무는 단단하고 가벼워 마나를 잘 머금고 변형이 일어나지 않아 마법 지팡이나, 마법이 깃든 물건을 제작할 수 있었다.

무엇이 되었든 루시엘에게 하나뿐인 소중한 물건을 만들어 주리라.

그런 속내를 모르고 루이비드가 무심한 얼굴로 재킷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작은 액자에 넣어 보관한 메모와 히아신스였다.

“……음?”

“루시엘이 제게 준 것인데. 그 아이, 제법 저를 따르고 싶은 모양입니다.”

“아, 이것 말이냐? 나도 받았는데?”

길리아트가 서랍장을 드르륵 열자, 루이비드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과 똑같은 메모와 히아신스가 들어 있었다.

심지어 메모의 내용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루이비드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루시엘이 내게 준 것과 같은 것이 왜 저기에도 있지?’

“…….”

“정말 심성이 곱기도 해라. 아까 돌아와서 이걸 보고 얼마나 마음이 포근해지던지…….”

길리아트의 말에 공작은 지금껏 그것도 모르고 가신들에게 자랑한 일들이 떠올랐다.

약간의 서운함과 함께 새삼 민망해진 탓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길리아트의 꽃송이는 일곱, 제 것은 두 송이나 더 많은 아홉이었다.

“제 꽃이 두 송이 더 많군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다시 살짝 좋아진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뒤늦게 꽃을 세어 보던 길리아트도 지지 않고 말했다.

“예로부터 행운의 숫자는 늘 일곱이었지.”

“뭐든 숫자가 많은 게 최고가 아닙니까.”

유치한 말장난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두 부자는 헛기침을 동시에 터트렸다.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그럼 쉬시죠, 아버지.”

“루이비드.”

“예?”

잠시 제 이마를 톡톡 두드리던 길리아트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영 이상하다 했지. 설마 루시엘에게 이걸 받았다고 자랑하러 온 것이냐…….”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공작이 외면하면서 딴청을 부렸지만 길리아트는 의심스럽다는 듯 가늘어진 눈초리였다.

“어쩐지 네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내 방에 들렀나 했다.”

공작이 무심한 눈길로 제 꽃을 다시금 가리키고,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

길리아트는 잠시 고함을 질러 주고 싶은 욕구를 참아 냈다. 그러고 보면 묘한 일이었다.

루이비드는 본디 아이들과 친하지 않았다. 제 친아들 녀석들과도 그렇게 개처럼 싸우더니만…….

“뭐, 좋은 일 같다만.”

‘마음의 기쁨’이라.

루이비드가 돌아간 뒤, 길리아트는 루시엘의 방을 찾았다. 아이는 없고 옷가지를 정리하던 베시만 있었다.

“큰 주인님.”

“루시엘은 어디 갔느냐?”

“잠시 성을 구경하러 가셨어요. 돌아오시는 대로 전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괜찮다. 만찬에서 보게 될 터이지. 그보다는 루시엘에게 필요한 물건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리 말하면서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방을 슥 둘러보았다.

“아닙니다. 아가씨가 사용하실 의복이나 물건은 이미 갖춰져 있어요.”

루시엘이 이제 필요한 물건이 없다고 당부를 해 두고 갔었기에 베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장난감 가게는 어떨까?”

“음…… 그것도 좋지만 아가씨께서 좋아하는 한 가지를 알게 되었어요.”

베시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하자, 길리아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시엘이 좋아하는 한 가지? 그게 무엇이지?”

“아주 평범한 물건이었어요.”

베시는 웃으면서 작은 양말 한 켤레를 들어 보였다.

“양말을 좋아하신다고 하네요.”

“양말을……?”

너무도 소박하고 평범한 물건이었지만 그게 또 그 아이다워서 길리아트는 허허 웃었다.

“그렇군. 좋은 정보 고맙구나, 베시. 공작에겐 비밀이다.”

“알겠습니다. 큰 주인님.”

베시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 루시엘 아가씨가 성에 온 후로, 무섭고 어렵기만 하던 두 분 주인님께서 한결 부드러워졌다.

아가씨가 주는 이 밝은 기운이 도련님들께도 닿으면 좋을 텐데. 아카데미에 계시는 키제프 도련님께도 이미 주인님의 편지가 도착했을 터였다.

부디 그분의 마음에도 아가씨의 사랑스러움이 닿을 수 있기를. 베시는 약혼을 계기로 루시엘이 준 변화가 계속 이어지길 바랐다.

차갑고 삭막했던 벨슈타인이 따뜻해질 작은 변화.

분명 좋은 예감이 들었다.

* * *

그 시각, 수도 아르테.

창가로 쏟아지는 노을에 붉게 물든 푸슬푸슬한 짧은 금발이 흔들렸다. 뽀얀 피부, 곧고 단정한 이목구비가 마치 살아 숨 쉬는 명화를 보는 듯했다.

소년은 권태롭게 핏빛 눈동자를 굴렸다.

본가에서 사용하는 검은 드래곤의 인장이 붙은 서신. 열기 전부터 괜히 불안감이 번졌다.

비상시의 연락이었다면 통신구를 사용했을 테니 아닌 듯하고, 그렇다고 제 아버지가 친근하게 안부를 물을 정도로 잔정이 많은 성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페이퍼 나이프를 이용해 서신 봉투를 깔끔히 잘라 낸 소년은 곧장 편지를 꺼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읽는 동안 그의 짙은 금빛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계약 결혼의 상대가 정해졌다. 오르비아 백작가의 솜뭉치같이 자그만 여자애지. 조만간 얼굴 보여 주러 갈 테니 그리 알도록.」

“이게 무슨 행패십니까……아버지.”

제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갑자기 결혼 상대를 정하셨다고?

게다가 계약 결혼은 또 뭐란 말인가.

열세 살 키제프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솜뭉치라는 하찮은 호칭의 여자아이라니.

어떤 아이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제게 결혼은 사치였다. 키제프는 곧장 입술을 꼭 깨물고는 거절의 편지를 작성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오늘 저녁이 바로 만찬일이에요, 루시엘 아가씨.”

“응. 알아요, 베시. 다녀올게요.”

루시엘은 그렇게 대답하곤 등에 자그만 당근 모양 가방을 둘러맸다. 눈토끼를 닮은 루시엘에게 꼭 어울린다면서 베시가 뜨개질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도서관에 있는 동안 입이 심심하지 않게 해 줄 초콜릿 세 개, 우유 맛 캐러멜 한 개, 딸기 맛 사탕이 다섯 개나 들어 있는 보물 가방이었다.

성긴 뜨개실로 이루어진 가방은 구멍 사이로 안의 내용물이 다 보였다.

‘귀엽지만 비밀 용도로는 못 써.’

나중에 튼튼한 가방을 하나 더 장만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루시엘이 푹신한 하얀 슬리퍼를 신었다.

뾱, 뾱뾱.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나는 슬리퍼라 신기가 꺼려졌지만, 이 기분 좋은 포근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서관은 본성과 떨어진 별관에 있었다. 본래 정원을 통해 돌아서 가면, 바깥용 신발을 신어야 하지만 루시엘이 알아낸 지름길로 가면 실내를 통해서 도서관까지 갈 수 있었다.

동관에서 오 층까지 올라가서 복도의 기둥을 한 바퀴 돈 다음, 삼 층 복도의 기둥을 또 한 바퀴 돌고 일 층으로 돌아와 밖으로 나가면 바로 도서관이었다.

누군가 성에 장난으로 마법을 걸어 둔 게 분명했다.

뾱뾱뾱뾱.

그렇게 루시엘은 한걸음에 도서관까지 내달렸다.

그때였다. 복도 구석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작은 아이가 다짜고짜 무언가를 던졌다.

‘신발?’

그것은 루시엘의 몸을 비껴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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