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2)화 (12/282)

<12화>

한편 루시엘은 로즈와 함께 성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근사한 식당도, 웅장한 음악 홀도 전부 볼만했지만 루시엘이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따로 있었다.

늘 유리관에 갇혀 지냈던 루시엘은 백작이 읽다 버린 신문을 닳아 헤질 때까지 몇 번이고 보았다. 그만큼 활자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그건 조그만 유리관 안에서 루시엘에게 유일하게 평온함을 안겨 주는 일이었다.

루시엘은 로즈를 올려다보면서 그녀의 스커트 자락을 살짝 흔들었다.

“로즈, 나 도서관에 가도 돼요?”

“어제 읽어 드린 동화책이 재밌으셨어요? 좋아요, 왕창 빌려 와요!”

자신보다 더 신이 난 로즈를 향해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서관 입구에는 이름 모를 미인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벨슈타인 가문의 가족 초상화는 성 어디에도 없었다.

‘어떤 분들인지 궁금한데…….’

시간이 흐르면 차차 알게 될 일이겠지.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려 방으로 돌아온 루시엘은 동화책 더미 속에 끼워 온 책들부터 꺼냈다.

『마나 호흡법』, 『마법학 초급』, 『마법의 이해』와 같은 마법 관련 책들이었다.

루시엘은 정식으로 마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녀의 마력은 강한 편이었지만 그것들은 오로지 보석을 만들어 내는 데에만 이용되었다.

그리고 과거엔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인 줄 알았다.

‘……보석을 만들어 낸 건 시작일 뿐이었어.’

루시엘의 보석은 마력뿐 아니라, 원소 마법의 힘까지 담겨 있었다.

그걸 알게 된 건 황태자의 지시로 진행되었던 마도사 에리카의 연구 때문이었다.

루시엘이 만든 보석 안에 마법의 힘이 들어 있다는 걸 처음 발견한 것도 그녀였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황태자는 에리카에게 보석을 무기에 세공해 합성시키는 연구를 시켰다. 그러곤 결국 보석을 이용해 마법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결과까지 도출해 낸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연구는 황태자의 마검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수많은 연구와 실험을 위해 루시엘은 마력을 회복하는 족족 보석을 만들어야 했다.

그 지옥 같은 나날은 괴로웠지만, 루시엘은 그로 인해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보석에 잠재된 마법의 힘, 그 비밀을 풀면 나도 마법을 배울 수 있을지 몰라.’

보석만 추출당했기에 연구의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루시엘이라면 분명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루시엘은 차분하게 호흡하며, 제 마력을 천천히 느껴 보았다. 분명히 강하고 많은 양이지만 어떻게 사용해야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한 건 보석을 만드는 일 외에도 이 커다란 마력이 도움이 되리란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각성해 보석을 만들 수 있게 된다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강해지고 싶었다. 보석에 담긴 무궁무진한 힘을 남이 아닌,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제 뺏기지 않을 거야. 누구에게도.’

루시엘의 자그만 심장이 연신 두근거렸다. 아직 각성 전이지만 그날을 기다리면서 루시엘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우선은 마나 호흡법부터 익혀 볼까.’

첫 장에는 기초적인 호흡법부터 나와 있었다.

루시엘은 책에 나온 대로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몸 안에 흐르는 마나를 느껴 보았다.

가슴이 서서히 부풀며 간질간질 바람을 닮은 마나의 기운이 손끝,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가장 활발하게 마나가 모이는 곳은 심장이었다.

“……앗.”

서두르고 긴장한 탓일까. 모여든 마나를 잡아 두지 못해 금세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분명 마나의 양은 많았지만 이 작은 몸이 아직 다 담아 내지 못하는 듯했다.

루시엘은 숨을 몰아쉬고는 되뇌었다.

‘다시 처음부터 하자.’

다시 책을 살피니 편안한 마음가짐과 자세로 호흡에 임하라고 적혀 있었다.

책에는 친절하게도 집중이 어려우면 기분 좋은 것을 떠올려 보라는 조언까지 적혀 있었다.

기분 좋은 것이라.

루시엘은 최근 경험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밀크티, 딸기 파르페, 침대, 양말, 히아신스, 그리고 공작가 사람들.’

생각을 마친 루시엘의 입가에는 연한 미소가 그려졌다. 심장에 차곡차곡 차오른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휴.”

잠시 의자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많은 집중력을 쏟아부은 탓일까. 벌써 두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체력은 소모했지만 몸이 가뿐해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루시엘의 몸 안을 도는 마력이 맑아졌다는 걸 의미하는 변화였다.

그에 대해 찾아보니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력이 강할수록 순수하고 투명한 마나를 지니게 된다. 마나가 투명하면 움직임 또한 가벼워져서 원활해진다. 이 호흡을 단련시킬수록 마나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첫 연습에서 무언가를 얻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발견이었다.

“좋아. 이거 틈틈이 연습해야지.”

루시엘은 밤송이만 한 주먹을 말아 쥐며 다짐했다.

그 후 루시엘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마나 호흡법을 하는 버릇을 들였다. 덕분에 조금씩 마나를 다루는 것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마나 호흡법을 하고 난 후면 어쩐지 나른해져서 실컷 낮잠을 자게 되었지만.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켠 루시엘은 로즈와 함께 햇볕도 쬘 겸 성을 구경하러 나갔다.

봄날 정오의 햇볕은 따뜻했다.

세찬 비를 뿌려 대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청명하게 빛났다. 피부에 달라붙는 공기는 맑고 상쾌했다.

동관에서 본관으로 가는 길에 있는 중정을 지날 적이었다. 정원 가득히 꽃대에 방망이처럼 꽃이 송이송이 매달린 하얀 히아신스가 피어 있었다. 달콤한 향기에 기분까지 좋아지는 꽃이었다.

루시엘은 히아신스 앞에 가서 쪼그려 앉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살랑이는 봄바람에 히아신스는 마치 춤을 추듯 흔들렸다.

“어쩜 이렇게 예쁘지.”

뒤따라온 로즈가 몸을 숙이며 싱긋 웃었다.

“히아신스 꽃이에요. 마음의 기쁨, 승리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대요.”

루시엘은 히아신스와 꽃말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 마음에 새겼다.

“너무 예뻐요, 꽃도 꽃말도요.”

맑은 진홍빛 눈망울이 하얀 히아신스를 오래도록 소중하게 담았다. 아이의 모습을 지켜본 로즈가 마침 지나가던 정원사에게 히아신스 한 다발을 부탁했다.

“루시엘 아가씨, 선물이에요.”

“누군가에게 꽃을 받아 보는 건 처음이에요. 고마워요, 로즈.”

루시엘은 히아신스에 깊숙이 코를 박았다. 달콤하고 포근한 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말고도 이렇게 행복감을 느낄 수 있구나. 과거엔 갇혀만 지내서 꽃들을 보러 다닌 기억이 없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면 세상에 이렇게 예쁜 게 있다는 것도 몰랐겠지.

루시엘은 꽃향기를 맡으면서 새로운 감회를 느꼈다. 문득 머릿속에 두 사람을 떠올렸다.

할아버님과 공작님.

‘두 분은 히아신스가 핀 걸 아실까? 보여 드리고 싶어.’

“로즈, 잠깐 들르고 싶은 곳이 있어요.”

공작의 집무실 책상 한구석에 히아신스와 메모를 남긴 루시엘이 총총걸음으로 나왔다.

밖에서 로즈와 함께 루시엘을 기다리던 에바는 잠시 감상에 젖었다. 제 주인의 책상에 꽃이 어울릴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 * *

라파예트 산맥의 산사태는 무탈하게 지나갔다. 인근 영지 사람들은 모두 대피해 안전했고 곳곳에 실드 봉인석을 설치해 둔 덕에 마을도, 장벽도 큰 피해가 없었다. 산사태를 잘 대비한 덕분에 영지민들의 지지와 신뢰도 높아졌다.

이 모든 대비를 할 수 있었던 건 루시엘의 예측이 있어서였노라고, 공작은 설명했다.

덕분에 가신들 사이에서는 루시엘이 벌써 ‘아가 마님’으로 불리며 입에 오르내렸다.

“어린 분이 참으로 영특하기도 하군.”

“산사태를 예측한 것도 모자라, 비 내리는 날 지반이 무너지는 소리로 사실을 가늠하다니 보통 아이라면 생각하지 못할 일이지요.”

“그러게 말일세. 우리 중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지. 하마터면 그대로 당할 뻔했어. 대체 어떤 분일까 궁금하군.”

“소문에는 아주 조그맣고 어리다는군요.”

“소녀가 아니라 아기란 말인가?”

“예, 여섯 살로 보일 정도로 어린애라고 합니다.”

“허, 아무리 똑똑하다지만 그렇게 어린아이를 각하께선 며느리로 들이시겠다는 건가?”

귀족 간의 결혼에서 나이를 논하는 건 의미가 없었지만, 공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면서 약혼 의논을 거절해 온 공작이었기에 베르가 자작은 의외다 싶었다.

“쉿, 각하께서 오십니다.”

푸른 망토를 두른 공작이 성큼성큼 회의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곧 베르가 자작과 루퍼스 자작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조금 전의 이야기를 들은 탓이었다.

“내가 며느리를 고르는 일까지 경들이 참견할 셈인가.”

“옛? 아, 아닙니다. 각하.”

“그저 아가 마님이 결혼을 하기에 어리신 듯해 노파심에 한 말이었습니다.”

베르가 자작과 루퍼스 자작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공작이 말했다.

“그 아이, 몇 달 후면 열 살이 된다. 약혼은 당연하고 추후 결혼을 진행하는 데에도 문제는 없지.”

“아…… 그렇습니까.”

“그건 그렇고, 회의나 시작할까. 안건을 보아하니 여섯 시간은 족히 걸리겠군.”

기가 바짝 곤두선 공작이 눈짓을 보내자 부관 엘링턴이 문을 잠갔고 동시에 가신들의 낯빛은 잿빛이 되고 말았다.

공작은 원하는 결론을 얻을 때까지 회의실 문을 열어 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렇게 시작한 회의가 네 시간 하고도 삼십 분을 훌쩍 넘겼다.

쉼 없이 계속된 회의에 다들 지쳐 갈 무렵, 공작이 손을 들고는 휴식을 선언했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사이 잠시 집무실에 들른 공작은 책상 구석에 아주 이질적인 것이 놓인 걸 확인했다.

“거기 밖에 누구…….”

청소 담당 시종을 부를까 하던 그가 미간을 좁혔다.

앙증맞은 리본으로 매듭지어진 히아신스 묶음을 들어 향을 맡아 보았다. 향긋한 단내가 훅 올라왔다.

「‘마음의 기쁨’을 드릴게요.」

메모에 삐뚤빼뚤 적힌 서툰 글씨를 몇 번씩이나 들여다보다가 그것을 접어 재킷 주머니 속에 감췄다.

그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간 것 또한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홍차 가져왔습니다.”

문득 공작은 차를 끓여 오는 에바에게 넌지시 물었다.

“에바, ‘마음의 기쁨’이 뭔지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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