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1)화 (11/282)

<11화>

태어나 처음이었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늘어지게 낮잠을 자 본 것이.

맞고 지쳐 잠들거나, 누군가 없을 때 쫓기듯이 쪽잠을 자곤 했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암막 커튼이 막아 줘서 루시엘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날 때까지도 강아지처럼 쿨쿨 잠만 잤다.

폭신폭신하고 포근한 침대만 있다면, 루시엘은 벨슈타인을 위해서 보석 몇 개쯤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생각 중이었다.

눈을 뜨자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재깍 울렸다. 침대 옆 둥근 협탁에 은색의 작은 종이 있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실 때 이 종을 흔들어 주세요.’

어젯밤 로즈가 루시엘에게 이불을 덮어 주면서 일러준 말이 떠올랐다.

루시엘은 조심스레 벽시계를 보았다.

정오가 훌쩍 넘은 시간.

점심시간이니 로즈와 베시도 식사를 하러 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사용인들의 식사가 끝난 후에 루시엘의 차례가 돌아왔으므로, 배고픔을 참는 건 익숙했다.

“조금 더 기다릴까.”

루시엘은 커다란 쿠션에 다시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눈을 한 번 떴다가 감은 것뿐인데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이젠 괜찮겠지?”

루시엘이 작은 종을 흔들자, 환한 얼굴로 로즈가 나타났다.

“아가씨, 잘 주무셨어요? 언제 일어나시나 기다렸어요. 좋은 아침, 아니 낮잠을 주무셔서 아침은 아닌가요? 시장하시죠?”

“……네, 조금요.”

“많이 배고프실 것 같은데요.”

로즈는 루시엘의 마음을 쏙 꿰뚫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아가씨를 위해서 세스 주방장님이 양고기 스튜를 준비해 주셨어요. 아직 방에서 식사하시는 게 편안하시지요? 식당에 내려가시려면, 드레스도 갖춰 입으셔야 하니까요.”

꼭 의복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루시엘은 방이 더 편안할 것 같았다.

“방에서 먹을게요.”

양고기 스튜와 함께 신선한 샐러드, 빵이 도착했다. 입맛을 잔뜩 돌게 하는 냄새였다. 크게 떠서 한 입 먹자, 감탄이 나왔다.

스튜는 루시엘도 익히 먹어 본 음식이었지만, 벨슈타인에서 만들어지는 음식에는 맛있어지는 마법이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따끈한 스튜가 위장에 미끄러지듯 들어갔고, 두툼한 양고기는 고소하고 풍미가 좋았다.

순식간에 스튜 한 그릇을 다 비운 루시엘은 포크를 들었다. 토마토와 양상추, 레몬과 치즈가 든 샐러드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호밀빵도 먹었다.

이제야 몸에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잠시 루시엘의 이불을 정리하고 있던 로즈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어머, 벌써 다 드셨어요? 루시엘 아가씨, 혹시 간식 드실 배가 남아 있으세요?”

루시엘의 눈이 총총히 빛나며, 기다렸다는 듯 자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언제든지요.”

“흑, 귀여우셔. 얼른 가서 한 접시, 아니 두 접시 갖다드릴게요!”

로즈가 루시엘을 보며, 몸을 파르르 떨고는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갔다.

부들부들한 커스터드 푸딩 두 접시에 황홀함을 맛본 루시엘은 베시로부터 엄청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시내의 유명한 아동 의상점 하나를 루시엘이 갖게 될 예정이라는 소식이었다.

“플로린 부티크의 드레스는 귀엽기로 소문이 자자한걸. 아아, 어서 아가씨가 입으신 모습을 보고 싶어.”

“맞아, 정말 사랑스러우실 거야.”

루시엘은 두 사람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농담이겠지? 아홉 살 아이에게 의류점을 통째로 사 준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어머, 주인님!”

두 사람이 화다다 놀라서 고개를 조아렸다. 뒷목을 서늘하게 만드는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마침 일어났군.”

루시엘이 뒤를 돌자 아몬드의 끝처럼 날카로운 공작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뒤를 따르던 엘링턴과 에바가 루시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루시엘이 서둘러 옷자락을 붙잡으며 예를 갖췄다.

“공작님을 뵙습니…….”

루시엘의 인사를 자르고, 공작은 엘링턴으로부터 전달받은 서류부터 내밀었다.

“여기 사인하지.”

“……네?”

플로린 부티크. 그가 내민 서류는 문제의 그 의류점 소유 문서였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어?’

루시엘의 커다란 눈망울이 더욱 커다래졌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면 더욱 큰일 아닌가?

‘이런 건 나중에 다 갚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받을 수 없어요.”

루시엘이 도리질을 쳤다.

“옷이 필요하잖나.”

옷이 필요하면 의류점을 통째로 사 버리는 경제관념이라니……. 황족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작이 날렵하지만 단단한 턱가를 문지르며 물었다. 붉은 눈동자에 잠시 회색빛이 서렸다.

“마음에 안 드나?”

루시엘은 은빛 눈썹을 늘어뜨렸다.

“선물이 너무 과분해서요.”

“선물 아닌데.”

“……!”

‘역시 나중에 돌려받으시려고?’

루시엘의 얼굴에 걱정이 스멀스멀 번졌다. 가게 하나를 사려면 보석이 얼마나 필요할까? 더욱이 시내의 유명 상점이라면 보통 비싼 게 아닐 거야…….

얼굴에서 땀이 흐를 것만 같았다.

“빚지기 싫어요.”

공작은 루시엘이 늘어놓는 말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 점은 나랑 비슷하군.”

“그런데 왜…….”

“……갚을 필요 없다. 빚이 아니니까.”

그를 올려다보던 루시엘의 조그만 고개가 연신 갸웃거렸다. 공작은 옅은 한숨을 후 쉬었다. 어떻게 자라 왔기에 의식주 같은 응당 주어지는 것도 갚아야 하는 빚이라고 사고가 흐르는 것인지.

“그, 그러면 왜…….”

“벨슈타인의 일원이 될 사람이니까 자리에 걸맞게 격식을 차리는 것뿐이다.”

“아하, 멋져요.”

루시엘의 댕그래진 눈이 경이로움으로 초롱초롱 빛났다. 공작은 애써 차가운 척 말했지만 그 귀여운 모습에 잠시 냉정함을 잃고, 무너지고 말았다.

“……따, 딱히 너를 위해서 주는 선물이 아니다.”

“네, 알겠어요!”

루시엘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공작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도, 시선을 외면하는 것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내 착각일까? 방금 왠지 쑥스러워하신 것 같은데……. 어쨌거나 내가 아니라 벨슈타인을 위해서 주시는 거구나. 그럼 다행인가.’

여전히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공작이 헛기침을 한 후 물었다.

“……글씨는 쓸 줄 알겠지?”

“네, 능숙하진 않지만 조금씩 배웠어요.”

교사에게 정식으로 배운 건 아니지만 틈틈이 닥치는 대로 활자를 읽어 왔다.

루시엘은 서류의 빈칸에 서툴고 삐뚤빼뚤한 서체로 서명했다. 아이 손이라 기다란 깃펜이 익숙하지 않았다.

‘루시엘 폰 벨슈타인’이라고.

낯설지만 익숙한 가문의 이름. 제 것이 될지도, 어쩌면 그저 계약으로 지나갈 뿐일지도 모를 이름이었다.

아직 구두 계약일 뿐이지만, 벨슈타인의 일원이기에 의류점을 내려 주는 것일 테니……. 벨슈타인의 성을 붙이라는 의미 같았다.

그걸 포착한 공작은 루시엘을 다시 한번 더 눈여겨보았다.

‘아이치곤 제법 눈치와 상황 판단이 빨라.’

공작은 그 점이 마음에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다.

어쩌면 오르비아 백작가에서 자라면서 눈치를 보는 버릇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밝고 순수하게 자랐어.’

무수한 일들을 거쳤을 루시엘을 생각하니 루이비드는 아이에게 잘 대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무뚝뚝한 자신에게는 그것이 퍽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공작의 붉은 눈동자가 루시엘의 옷차림에 닿았다.

“이제 다른 걸 입지.”

그 말에 에바가 손짓하자, 시종들이 분주하게 드레스를 안으로 날라 왔다. 고급스러운 옷감과 아기자기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드레스였다.

어림잡아 보아도 스무 벌은 족히 되었다. 드레스 옆에는 아이용 구두와 모자, 리본 같은 장신구도 있었다.

분홍색 눈동자가 토끼처럼 더욱 동그랗게 커졌다.

“이게 전부…….”

“아가씨를 위한 것이랍니다.”

에바의 말에 로즈와 베시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루시엘의 분홍빛 눈망울이 일렁이더니 공작을 향해 인사했다.

“감사해요.”

“선물 아니니 고마워할 것 없다.”

“그래도 감사드려요. 절 벨슈타인으로 받아 주셨으니까요.”

루시엘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봐도 귀여운 모습이었다. 밀가루를 반죽하면 저리될까? 하얗고 몰랑한 뺨을 한번 쿡 찔러 보고 싶었다.

잠시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공작이 말했다.

“평소에 입을 드레스를 골라 둬. 급한 건이 마무리되면 가족 만찬도 가질 예정이다……. 우린 이만 가지.”

공작이 빙글 등을 돌려 떠났고, 그 뒤를 엘링턴과 에바가 서둘러 따라 나갔다.

방 안을 가득 채우던 긴장감이 사라지자 베시가 루시엘의 손을 잡고 드레스를 고르기 시작했다. 로즈는 벌써 달려가 몇 벌을 골라 왔다.

“이 드레스 어떠세요?”

“예뻐요.”

“그럼 이건요?”

“그것도 예뻐요.”

루시엘은 전신 거울을 앞에 두고, 여러 벌의 드레스를 입어 보았다. 전부 예쁘고 마음에 들었다.

‘내가 아닌 것 같아. 예쁘다.’

만찬에 입을 드레스와 외출용 드레스, 공작성 안에서 입을 간편한 원피스도 몇 벌 골랐다. 구두와 장신구는 드레스에 어울리는 것으로 로즈가 골라 주었다.

옷 고르기가 끝나자 베시가 루시엘에게 베이지색 바탕에 하얀 원이 콕콕 박힌 원피스를 입혀 주었다.

허리끈을 묶어 주고 흰 양말을 신겨 주려는데, 루시엘이 살그머니 양말 한쪽을 붙잡았다. 본인이 하겠다는 뜻이었다.

“알겠어요, 아가씨.”

베시는 대신 루시엘의 머리를 빗질해 주었다. 빗질만 했을 뿐인데도 머리칼이 은실처럼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루시엘은 제 키에는 다소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 양말을 보았다.

참 보드랍고 따뜻해 보이는 양말이었다. 발목에 레이스가 둘러진 꽃무늬 양말.

과거 어린 루시엘이 지하실에서 꽁꽁 언 맨발로 걸어 다니면서 가장 간절했던 건 드레스보다도 양말이었다. 그때 생각이 나 루시엘은 양말을 엄지로 쓸었다.

“루시엘 아가씨, 왜 그러세요?”

“양말이…… 좋아서요.”

로즈의 물음에 루시엘이 대답하며, 양말에 발을 차례로 꿰어 넣었다. 로즈와 베시가 ‘들었어? 아가씬 양말을 좋아하신대. 귀여우셔.’ 하고 소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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