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자아, 다 되셨어요. 갈아입으실 옷은?”
“여기!”
그러나 베시는 옷을 보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로즈가 가져온 의복은 깨끗하지만 남자 아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에구, 죄송해요. 성에 당장 여아용 드레스가 없어서 도련님 옷을 빌려 왔어요. 당장 아가씨의 드레스부터 사러 가야겠어요. 그전에 우선 예산부터 받아야…… 아직 그건 무리이려나요?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모두 아가씨를 좋아하시는 것 같았어요! 아, 제가 말이 좀 많았죠?”
“쿡, 아가씨 정신없으실라. 로즈는 수다쟁이예요.”
로즈가 머쓱하게 루시엘과 베시를 보면서 웃었다.
“으응, 그렇지 않아요. 고마워요, 두 사람. 그리고 난 옷은 별로 필요 없어요.”
루시엘이 고개를 저으며 자그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이 가엾기도 하고, 사랑스러웠다.
로즈와 베시가 잠시 서로의 눈을 흘깃 바라보았다. 둘은 그대로 팔을 벌리고는 루시엘을 꼭 안아 주었다.
“루시엘 아가씬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에요.”
“맞아요. 이렇게 꼭 안아 주고 싶을 만큼.”
포근하고 부드럽고, 보호받는 느낌.
‘공작성은 어쩜 이렇게 모두가 상냥한 걸까.’
지금껏 겪어 온 그 어느 곳보다도. 늘 사용인들의 무시와 구박만 받아 온 루시엘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기분이 이상해.’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욕조에서 반짝이던 비눗방울이 톡톡 터지는 것처럼.
“아가씨, 손부터 뻗어 보세요.”
베시가 가져온 하얀색 튜닉은 입고 나니 원피스처럼 보이기도 했다.
“둘째 도련님의 옷인데도 잘 맞으시네요.”
루시엘은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활동하기 편한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옷을 다 입고 나자 루시엘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향했다.
로즈가 빙긋 웃으면서 의자를 빼 주었다.
“이제 간식 드셔도 돼요.”
“네!”
온도 보존 마법이 걸려 있어서 파르페의 아이스크림도 녹지 않았고, 우유와 카스테라도 따뜻한 채였다.
노란색의 카스테라는 이 방 침대처럼 폭신폭신했다. 한 입 먹고 따뜻한 우유를 마시면 그 맛이 또 그렇게 부드럽고 조화로울 수가 없었다.
루시엘의 입가에 우유 자국이 둥그렇게 난 모습을 보며, 냅킨을 챙겨 주곤 베시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아가씨. 천천히 꼭꼭 씹어서 드세요. 얼마든지 더 가져다드릴게요.”
“……네!”
루시엘은 행복이란 게 뭔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루시엘의 방을 나선 베시는 곧장 에바를 찾아갔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에바의 표정이 굳었다. 에바는 베시와 함께 공작을 찾았다.
산사태 대비 건에 대해 엘링턴과 논의하던 공작은 잠시 멈추고, 두 사람을 들였다.
“가주님, 루시엘 아가씨에 대해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듣지.”
“루시엘 아가씨의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공작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어떻게 안 좋다는 뜻이지?”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셔서 그런지 또래보다 정말 많이 작으세요. 둘째 도련님보다 살짝 크신 정도예요.”
“네……. 정말 뼈밖에 없으셨어요. 어떻게 그런 귀여운 아가씨를.”
에바의 보고에 이어, 베시가 눈물을 보이면서 말했다.
“…….”
공작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아무리 냉정한 그라도 경멸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아이가 제 나이로도 안 보이는 이유가 있었군. 그가 낮게 읊조리며 살벌하게 동공을 굴렸다.
“예비 사돈이란 작자에게 하루빨리 동의를 받아야겠군. 엘링턴.”
“옛. 아, 그런데 루시엘 아가씨는 아직 아홉 살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결혼은 법적으로 열 살부터 가능합니다.”
엘링턴의 지적에 공작이 서늘하게 말했다.
“약혼부터 하지. 우선 약혼과 결혼 서류 둘 다 준비해. 기왕이면 오늘 보내는 게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리고 에바.”
“예, 가주님.”
“주치의를 불러서 루시엘을 진찰받게 해. 그리고 여자애를 키우려면 또, 무엇이 필요하지?”
공작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에바와 베시가 동시에 대답했다.
“예산을 정해 주시면 목록을 작성해 보겠습니다.”
“……아가씨가 쓰실 만한, 그러니까 여자아이 물건은 지금 아무것도 없는 상태예요.”
“그런가? 내가 직접 들르지.”
공작이 직접 루시엘의 방으로 걸음 하겠다는 말에, 에바와 베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방에는 간식을 다 먹은 루시엘은 로즈가 읽어 주는 동화책을 들으면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뒤늦게 공작의 모습을 본 로즈가 놀라며 일어났고 루시엘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남자아이용 튜닉을 대충 걸친 루시엘의 모습에 공작의 얼굴이 구겨졌다.
“……저건 레오니 옷 같은데.”
베시의 말대로 여자아이가 사용할 만한 옷이나 용품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침대나 가구들도 체구가 작은 루시엘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큰 성인의 것들이라 거슬렸다.
루시엘은 별안간 들이닥친 벨슈타인 공작이 제 방을 이리저리 훑어보자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대로 떠나려던 공작이 말갛게 씻은 루시엘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아까도 영 못 봐 줄 수준은 아니었지만, 씻고 나니 다른 아이 같았다.
보송보송한 은발에 진홍색 눈, 자그만 얼굴에 들어찬 이목구비.
이게 정말 사람인지, 새끼 짐승인지도 모를 만큼 한없이 유약하고 자그마했다.
공작이 훌쩍 다가오더니 루시엘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사람 되려면 멀었군.”
“……?”
‘무슨 뜻이지?’
루시엘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쁜 의도는 없는 것 같기도.
종일 고단했던 탓일까.
루시엘은 눈꺼풀과 고개가 저절로 무거워지고, 나른해졌다. 공작님 앞이라 하품을 겨우 참아 내는데 루시엘을 빤히 보던 공작이 말했다.
“애들은 잘 시간이로군.”
공작은 말없이 돌아서서 방을 떠났다. 루시엘은 뒤늦게 그것이 밤 인사라는 걸 깨닫고, 등을 돌린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히 주무세요, 공작님.”
힐끗 시선이 느껴졌지만, 공작은 그대로 말없이 사라졌다.
루시엘은 자못 소심해졌다.
‘역시 내가 마음에 안 드시나 봐.’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아이를 거두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더 노력해야지.’
벨슈타인가에서 지내기 위해서는 가주의 눈에 들어야 한다. 살기 위해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 * *
‘굿나잇 인사를 받아 본 건 처음인가…….’
서재로 돌아온 공작은 조금 전을 떠올렸다. 말끔해진 루시엘이 양손을 모아 공손하게 인사하는 모습은 꽤나 귀엽고도 다정했다.
어린것이 붙임성도 좋지.
어지간한 아이라면, 자신을 보고 울지만 않으면 다행일 텐데 말이다.
사실 종종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내심 궁금하긴 했다.
딸 가진 가신은 입을 모아 말했다.
‘딸은 다르다고.’
회의를 하다가도 쉬는 시간만 되면, 딸이 최고라며 자랑을 하는 가신들이 눈엣가시였다.
그런 저의 상황은 어떠한가.
달랑 아들 둘인 데다 두 놈 다 제 성격을 쏙 빼닮아서 애교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첫째 놈은 그야말로 고슴도치 새끼.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쁘다는데, 제 아비에게조차 가시를 드러내니 예뻐하고 싶다가도 다가가다 찔리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루시엘 같은 며느리가 들어오다니……. 확실히 아들놈들과는 달랐다.
“딸 같은 며느리라……. 나쁘지 않군.”
공작은 찡그렸던 인상을 풀면서 중얼거렸다.
* * *
‘적어도 이곳에선 보석 노예 취급은 당하지 않을 수 있어.’
루시엘이 아는 한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침대도 아주 크고, 달콤한 음식도 있고…….’
사람들도 전부 상냥하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오늘은 예전의 루시엘이라면 몰랐던 것들을 한 번에 누리게 된 것만 같았다.
‘다행이야. 정말.’
벨슈타인에서의 첫 밤.
무사히 벨슈타인에 입성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새로운 설렘이 루시엘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루시엘은 의자를 놓고 올라가서 창문을 달칵 열었다.
창밖에는 저녁 무렵 보았던 달이 한층 더 높고 밝게 떠 있었다.
루시엘은 눈을 감고 단풍잎 같은 손을 그러모아 기도했다.
‘나 무사히 도착했어.
백작가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크리스털 페어리로 살지 않을 거야.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거야.
그러니 지켜봐 줘, 언니.’
기도를 마친 루시엘은 안도감이 드는 한편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벨슈타인에서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를 철저하게 숨겨야겠지.
‘내가 요정의 핏줄이라는 걸, 아무도 몰라야만 해. 정신 차리자, 루시엘.’
* * *
오르비아 백작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신전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로도 찾을 수 없어, 인력을 더 풀어서 시내 골목까지 샅샅이 수색했다. 그러나 루시엘의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계집애!”
쾅!
오르비아 백작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지고 부쉈다. 시종도 마찬가지였다. 뭐든지 눈에 띄면 분풀이의 대상이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손에 넣은 크리스털 페어리의 핏줄인데, 이대로 놓칠 수 없었다.
루시엘의 언니가 만든 보석으로는 그의 욕심을 채우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게다가 그것들은 최상급의 보석도 아니었다. 더 빛나고 더 영롱한 보석이 필요했다.
볼라디 부인 말로는 루시엘은 제 언니보다 배는 빛나는 보석안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루시엘은 그에게는 긁지 않은 복권이자, 부를 거머쥘 기회였다.
마법사만 도착하면 끝이었는데. 각성만 기다리면 되었는데.
방심한 틈을 타서, 루시엘이 도망친 것이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것!”
어리다고 봐주지 말 것을. 발목이라도 부러뜨려 놓을 것을.
백작의 손이 분을 이겨 내지 못하고, 부르르 떨렸다.
제국 전역을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크리스털 페어리, 다이아몬드 광산보다도 더 귀한 재산이었다.
잿빛 눈에는 분노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르비아 백작은 집사를 손짓해 불렀다.
“날이 밝는 대로 길드에 의뢰를 넣어라.”
그러나 날이 밝는 동시에 백작은 눈이 뒤집힐 서신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