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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화 (2/282)

<2화>

루시엘은 몇 번이나 거울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어린 시절로 돌아온 지 정확히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깨지 않는 걸 보면, 역시 꿈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거울 속에는 인형처럼 예쁘고 자그만 아이가 들어 있었다.

토끼처럼 커다란 진홍빛 눈동자와 발그레한 뺨, 앙증맞은 단풍잎 모양의 손, 이마에 난 은빛 잔털마저 보송보송하다.

고작 예닐곱 살의 어린아이로 보였지만, 이 모습이면 적어도 아홉에서 열 살은 먹었을 것이다.

제대로 먹고 자라지 못해 발육이 늦었으니까.

그나저나 어떻게 된 일일까. 심장은 틀림없이 뛰고 있다.

‘분명히 난 죽었는데…….’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나서일까.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루시엘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보드라운 은발이 자그만 어깨 위로 사르르 쏟아졌다.

어느 것 하나 작지 않은 게 없었다. 얼굴도, 몸도, 손과 발도.

심지어 간마저 작아졌는지 쉴 새 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꿈이라면 벌써 깨고도 남았을 거야.’

루시엘은 며칠간 이 좁은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잠들고 깨고를 반복했다.

상식적이라면 아이가 아픈지 살펴보기라도 할 텐데. 백작가의 하녀와 시종들도 모두 루시엘에게 관심이 없었다.

루시엘은 자그만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곰팡이가 가득 핀 어둡고 습한 지하 창고. 이곳에서 열일곱까지 자랐었다.

루시엘은 백작가에 언니와 함께 하녀로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도 루시엘에게 일을 시키지 않은 데다 하녀지만 감시하는 유모도 있었다.

그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는 것도 영양가 있는 식사도, 그 어느 것도 루시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썩은 감자나 옥수수로 쑨 멀건 죽이 하루 식사의 전부였고, 따뜻한 옷 한 벌, 벽난로 한 번 쬔 적 없이 추위에 떨었다.

오르비아가의 사용인들은 루시엘을 그저 귀찮게 여겼다.

그저 언니와 유모만이 루시엘을 가끔 상대해 주곤 했다.

하지만 언니는 자주 만날 수조차 없었고 어린 루시엘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붙은 유모는 막상 보호에는 별관심이 없었다.

“유모가 차를 주면 마시지 말고 버려.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을 감고 검은 배경에 원을 그리는 거야. 하나, 둘, 셋, 원이 백 개, 천 개가 넘을 때까지. 루시엘, 할 수 있겠지?”

“응, 언니.”

유모가 주는 차를 마시면 이상하게 감정이 들끓고 예민해 졌다.

루시엘은 그때마다 언니가 시킨 대로 원을 그렸다. 그러고 나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루시엘은 햇빛이 비치지 않는 어둡고 캄캄한 지하실 창고에 늘 갇혀 언니가 시키는 대로 훈련을 했다. 자기 전에도. 아침에 일어나서도.

그러던 어느 날, 오르비아 백작이 지하실에 있는 루시엘을 찾아왔다.

“네 언니가 죽었다. 호수에 몸을 던졌다는군.”

“……어, 언니가 죽었다고요?”

슬픔과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백작이 말했다.

“그래, 이제는 네가 언니를 대신해 보석을 만들어야지. 그동안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이제는 너도 슬슬 힘을 깨달을 때가 되었지. 이리 아름다운 진홍안을 가졌으니 말이다.”

루시엘의 찬란한 진홍빛 보석안을 보며 광기에 사로잡힌 백작의 눈이 번뜩였다.

“과연 네 언니보다 아름다운 보석안이야. 그렇다면 더 값진 보석을 만들 수 있겠구나? 나를 위해서!”

머릿속에 번개가 치듯 모든 걸 알게 되었다.

왜 언니가 그런 걸 시켰는지.

‘언니는 날 지키려고 했던 거였어. 난 그것도 모르고……!’

하지만 아홉 살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너희 자매는 이국의 상인에게 거금을 주고 사 온 나의 보석 노예였지. 이제는 네 차례다.”

루시엘은 충격과 절망에 빠졌다. 바르르 온몸에 힘이 풀려 무너지던 그 순간.

“시, 싫어!”

다시는 언니를 볼 수 없다는 두려움과 슬픔, 백작을 향한 두려움과 원망. 그 모든 커다란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올라왔다.

쿵쿵!

자그만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려서 그만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만해!”

귀를 막으며 웅크린 루시엘의 온몸에서 뿜어진 거대한 마력이 일렁거렸다. 그 마력들은 이내 얼음 결정이 맺히듯, 송골송골 맑고 투명한 보석이 되었다.

툭, 투둑.

우수수수.

순도 높은, 여러 빛깔을 띤 보석이 지하실 바닥에 쌓였다. 최상급의 사파이어와 루비였다.

그걸 본 백작의 눈이 회까닥 뒤집혔다. 보석을 한 움큼 집어 올린 그가 감탄했다.

“오오, 이 선명한 빛깔, 찬란한 아름다움! 게다가 이렇게 많은 보석을 만들어 내다니! 너는 내 거야, 루시엘! 나를 위해서 보석을 만드는 거다! 하하하. 하하하하! 이제 난 부자야!”

희열에 가득 찬 백작이 이내 루시엘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뭐 하느냐? 루시엘을 어서 끌고 가!”

유모와 시종들이 달려와 루시엘의 몸을 붙잡았다.

그날부터 루시엘의 삶은 지옥으로 떨어졌다.

백작은 루시엘에게 보석을 만들지 않으면, 특수제작한 유리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게 가두고 버려 두었다.

분노와 고통.

슬픔과 그리움.

강렬한 감정으로 보석을 만들어 냈고, 그것들은 전부 백작의 잇속을 채우는 데 소진되었다.

루시엘의 자그만 몸은 마력이 남아나는 날이 없었다. 나날이 야위어만 갔고, 제대로 성장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아이였던 루시엘은 사용인들의 감시 때문에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부를 거머쥔 오르비아 백작이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도박장에서 만난 카빌 후작에게 루시엘의 존재를 들키고 말았다.

크리스털 페어리.

제국의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요정족.

아름다운 보석안과 감정으로 보석을 만들어 내는 신비한 존재.

루시엘은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크리스털 페어리였다. 누구나 탐낼 만한 황금알을 낳는 거위.

목숨을 위협받자 오르비아 백작은 루시엘을 자신의 사생아로 속여, 카빌 후작에게 거금을 받고 넘겼다. 열일곱의 나이, 그렇게 팔려 가서도 루시엘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망나니였던 카빌 후작의 아들과 정략결혼을 했지만, 애정은 없었다. 그는 매일 술과 도박에 빠져 있었고 루시엘을 백치, 보석 노예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루시엘은 신과 죽은 언니를 향해 매일 기도했다.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루시엘은 카빌 후작가의 연회에 참석한 황태자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애정이라는 것을 받아 보았다.

“루시엘, 내가 그대를 구원해 주겠어. 그대만이 나의 유일한 사랑이야.”

황태자 역시 아름다운 루시엘의 모습에 홀린 듯 첫눈에 반했다. 밀회를 이어 가던 그는 루시엘에게 미래를 약속했다.

그 달콤한 말에 속아 루시엘은 황태자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를 믿어선 안 되었다.

함께하자던 약속도, 사랑한다던 말도 전부 거짓이었다.

황태자는 카빌 후작과의 거래를 통해 루시엘을 파혼시키고, 그녀가 제 손에 들어오자마자 본심을 드러냈다.

이웃 나라 공주를 황후로 들이고 루시엘은 가장 낮은 위치의 후궁으로 맞이했다.

결국 그녀가 들어가게 된 곳은, 조금 더 커다랗고 화려해졌을 뿐인 유리관이었다.

보석 노예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평생을 이용당하다가 죽었다.

불행했던 인생을 짧게 회고하며, 루시엘은 심장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루시엘은 문득 깨달았다.

몸에 있던 상처가 하나도 없이 멀쩡했다.

어떤 감정을 느껴도 보석을 만들지 못하는 걸 보면 아직 각성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걸까? 그렇다면…….’

어쩌면 신이 주신 또 한 번의 기회.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라는 뜻일지 몰라.

‘이번에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겠어.’

루시엘은 앵두처럼 자그만 입술을 앙 사리물면서 굳게 다짐했다.

그녀의 몸에 깃든 마나의 양 또한,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이건 루시엘이 성인이 되었을 때와 거의 비슷했다.

지금부터 꾸준히 단련한다면 훗날엔 정말 엄청나리라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또한 지금 이 정도라면 마법 저항력도 높을 가능성이 컸다.

그야말로 모든 걸 시작하기에 더없이 좋은 신체적 조건.

인생을 바꾸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이 집에서 달아나야 해.’

모든 불행은 언니가 죽고 일주일 후, 백작이 자신을 찾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아직 유리관에 갇혀 있는 게 아닌 걸 보니, 기회는 있다.

‘그럼 혹시 언니는 살아 있을까……?’

며칠간 거의 잠들어 있느라고, 누군가 왔어도 마주치지 못했다.

‘우선은 지금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아야 해.’

루시엘은 낡은 모포를 끌어당기면서 지하실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루시엘을 위해 풀꽃을 가져다주던 언니였다. 그러나 테이블에는 말라비틀어진 꽃이 담긴 빈 유리병이 보였다. 언니가 이곳에 온 지 오래되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미…….

그런 생각을 하는데 터벅터벅 층계를 내려오는 발소리가 울렸다.

철그럭.

두꺼운 철문이 열리기 직전.

누군가 스윽 방 안을 훑어보는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루시엘?”

유모의 목소리였다.

“유모.”

“이제야 깼구나. ……하도 잠을 많이 자길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

“…….”

“언니가 그렇게 되었더라도 살 사람은 살아야지. 그래야 착한 아이인 거란다.”

루시엘은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이제 그만 정신 차리렴. 네 언니는 삼 일 전 죽었어.”

유모가 냉정하게 말하면서 찻잔을 루시엘 앞에 내려놓았다.

“아…… 언니가.”

역시 언니는 이미 죽은 후였다. 안타까움과 허망함이 밀려왔으나, 오래전 죽은 사람이었기에 그 슬픔은 희석되었다.

하지만 다시 만났더라면 기뻤을 텐데…….

당시 루시엘은 유모의 말을 듣고도 언니의 죽음을 믿지 못했었다.

‘그저 꿈이라고 생각했어. 바보같이.’

백작의 입으로 듣고 현실을 깨달은 충격으로 능력을 각성했었지. 끔찍했다.

“우선 차부터 마시도록 해라.”

“난 배가 고파요…….”

“쭉 들이켜라니까.”

감은 눈이었지만, 슬쩍 아래로 볼 수 있었다. 불그스름한 찻물이었다.

‘대체 뭘 넣었을까?’

이것만 마시면 신경이 날카로워지니 신경 계통 약일까? 각성을 앞당기기 위해서?

그동안 루시엘을 감시해 왔던 것이 바로 유모 볼라디 부인이었다.

‘절대 먹어선 안 돼.’

주르르.

루시엘은 찻물을 바로 쏟아 버렸다. 그걸 본 유모가 경악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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