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3)화 (3/282)

<3화>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나 배고프다니까요. 차 말고 식사를 가져와요.”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니?”

“그래, 멀쩡해요. 유모야말로 제정신이에요? 난 사흘이나 굶었어요.”

루시엘은 두려움에 떨지 않고 또박또박 차분하게 말했다.

‘끔찍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을 거야.’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유모의 말에 순순히 따르기만 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 기다리도록 해라.”

예전과 달라진 루시엘의 태도에 유모가 잠시 째려보더니 돌아갔다.

얼마 후, 건더기 없는 희멀건 죽과 차를 쟁반에 떠받쳐 온 유모가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자, 어서 먹어라.”

유모가 팔짱을 끼고 루시엘 앞에 서서 지켜보았다. 차를 마시는지 감시할 심산인 모양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각성을 시키라고 백작이 재촉했겠지.’

루시엘이 헛구역질을 하며 말했다.

“우욱. 유모, 나 속이 안 좋아요. 토할 거 같아.”

“자, 잠깐만. 조금만 있다가 토해라. 아휴, 더러워서 원!”

유모가 루시엘을 벌레 보듯 하면서 재빨리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주르르.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루시엘은 차를 버리고, 허겁지겁 죽을 떠먹었다. 겨우 허기가 가시는 것 같았지만 다 먹을 여유는 없었다.

그러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지하실 문은 밖에서 고리를 걸어 잠그는 형식이었다. 루시엘은 저걸 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열다섯 살에 유모와 하녀가 모두 몸살로 앓아누웠을 때 알아낸 방법이었다.

창고를 지키던 하녀에게 걸려 탈출은 실패했었지만.

뾰족하고 가느다란 물건을 문틈으로 집어넣어서 고리를 위쪽으로 넘어가게 만들면 되었다.

루시엘은 서랍장에서 뾰족한 깃펜을 찾아내, 문을 열었다.

루시엘은 모자를 챙겨서 밖으로 올라갔다. 이 지하실은 위층도 볏단이나 곡식 따위를 보관하는 창고였기에 여기만 나가면, 곧장 마구간이나 정원으로 통했다.

‘밖으로 나갈 수 있어.’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올라온 루시엘은 창고의 창문 위로 볏단을 밟고 올라섰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바깥을 살폈다. 창고 앞은 역시 하녀 하나가 하품을 하면서 지키고 있었다. 밤을 새운 모양이니, 곧 다른 하녀와 교대할 시간이었다.

그 밖에는 몇몇 일꾼들만 지나다닐 뿐이었다. 그들은 열심히 장작을 패고 있었기에 몰래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창고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누나. 창고는 내가 지킬 테니까 그만 자러 가. 설마하니 저 기운 없는 꼬맹이가 올라오겠어?”

“볼라디 부인이 알면 혼나는데. 그럼 샐리 올 때까지만 좀 부탁해.”

루시엘은 귀를 쫑긋 세웠다. 백작의 심부름꾼인 톰의 목소리였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안으로 톰이 들어왔다. 놀란 루시엘은 데구루루 구르듯이 볏단 뒤로 몸을 숨겼다.

톰이 볏단에 몸을 기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톰은 바스락거리면서 무언가를 읽기 시작했다.

“어디,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났나 좀 읽어 볼까? 역시 신문은 몰래 제일 처음 보는 게 제맛이지!”

매일 아침 백작이 읽을 제국신문을 사 오는 게 톰의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루시엘은 고개를 빼고, 톰이 읽고 있는 신문을 뒤에서 몰래 훑어 내렸다.

‘오늘은 제국력 1028년 3월 14일. 유모가 말한 대로 언니가 죽은 지 삼 일째야.’

가장 눈에 띄는 소식은 여신의 날 기도제, 그리고 경매…….

「엘란트라 경매소에서 금일 제국 최고의 경매가 벌어진다. 천재 화가 마르노사의 작품 등 각종 희귀한 예술품과 보물이 나올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기사를 본 루시엘은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과거에 카빌 전대 후작, 그러니까 루시엘의 시아버지였던 후작이 몹시 배 아파하면서 말한 적이 있었다.

‘망할 벨슈타인가의 늙은이에게 마르노사의 마지막 작품을 놓친 적이 있었지. 그때 더 높은 가격을 불렀어야 했는데! 지금은 그게 오십 배는 뛰었다고! 그러니까 루시엘 네가 그걸 메꾸려면 열심히 보석을 만들어야 한다.’

경매로 그림이 팔리고 1년 뒤, 마르노사는 폐병으로 죽었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그림이 되면서 더욱 가치가 높아진 터였다.

‘경매소에 가면 벨슈타인 가문 사람을 만날 수 있어.’

루시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벨슈타인 공작가.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가문이었다.

때문에 벨슈타인가에 관련된 소문은 전부 기괴하고 어딘가 으스스했다. 매일 밤 사람이 죽어 나간다, 악마의 핏줄이다. 마녀의 자식들이다, 같은 소문들.

모두가 두려워하는, 심지어 황족마저도 그 힘을 두려워했던 공작가다. 그만큼 위세가 대단하고, 웬만한 왕국보다도 더 부유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벨슈타인 정도의 힘이라면, 오르비아 백작 따위는 가볍게 눌러 줄 수 있을 것이다.

‘소문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닐 것 같아.’

무엇보다 황태자에게 몰락당한 그들이 루시엘에게는 가엾게만 느껴졌다.

다름 아닌 자신도 그 일에 일조를 했으니까.

죽기 전 만났던 남자를 떠올리면 왠지 그런 막연한 믿음도 들었다.

‘게다가 난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전하게 지낼 곳이 필요해.’

그곳에 가서 자신의 운명을 두고 거래를 제안할 생각이었다. 오르비아가의 사생아라고 속일 참이었다. 백작은 언제나 하녀들을 건드리곤 했으니까.

귀족가의 아이가 다른 가문에 편입되기 위한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결혼.’

물론 그쪽에서 루시엘을 받아 주어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무엇보다 죽음의 순간 마주쳤던 그 사람. 키제프 폰 벨슈타인.

그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엘은 보석안을 숨기기 위해 회색 모자를 더욱 푹 눌러썼다.

그런 후, 톰을 향해 엣헴 헛기침을 했다.

“루, 루시엘?”

화들짝 놀란 톰이 뒤를 슬쩍 돌아보자 루시엘이 팔을 뻗어 신문을 툭 치며 말했다.

“톰,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대, 대체 어떻게 빠져나왔지?”

“쉿.”

루시엘은 조그만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네가 신문을 빼돌려 읽었다는 사실, 전부 주인님께 일러바칠 거야.”

“에이, 루시엘 너야말로 지하실에서 나와 돌아다니는 모습을 주인님께서 보시면 큰일 나지 않아?”

톰이 작게 비웃었다. 저택의 외부에서 주로 일하는 톰이지만 루시엘의 사정은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루시엘은 톰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그가 빼돌리던 건 신문만이 아니었다. 손버릇이 나쁜 톰은 틈틈이 백작의 물건에 손을 대곤 했다.

훗날 절도한 죄가 드러나 그는 실제로 손목이 잘렸다.

“다른 물건도 훔친 거 알고 있어. 당장 네 방을 조사하라고 할까?”

톰이 움찔거렸다. 백작이 잃어버린 회중시계와 파이프를 침대 밑에 숨겼다. 들키면 해고는 물론, 손목이 잘릴지도 몰랐다.

“부, 부탁이 무엇인데?”

“신전으로 가는 마차를 구해 줘. 언니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싶어.”

“들키면 나도 같이 끝장날 텐데.”

“서로 비밀로 하자. 그리고 도둑질은 그만 멈추는 게 좋아. 3년 후에 진짜 들켜서 그 손, 못 쓰게 돼.”

“……말도 안 되는 말 하지 마.”

기분 나쁜 말이지만 톰은 아찔했다.

“꿈에서 봤어.”

순진무구한 얼굴로 루시엘이 말했다.

어린아이의 협박을 듣고 있자니 우스웠지만 루시엘은 일단 백작이 아끼는 아이였다. 게다가 루시엘은 예전의 그 연약한 아이 같지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톰은 하는 수 없이 움직였다.

* * *

루시엘이 사라지자 저택은 발칵 뒤집혔다. 오르비아 백작은 모든 시종과 하녀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샅샅이 뒤져라! 루시엘을 찾아내지 못하면 너희들 모두 저 꼴을 당할 줄 알아라.”

백작은 이미 제 손에 맞아 쓰러진 볼라디 부인을 가리켰다.

까드득, 백작은 이를 갈면서 번뜩이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감히 내게서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 망할 것!”

오르비아 백작은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솟았다.

크리스털 페어리는 감정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으면 각성을 한다. 제 언니의 죽음이 있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능력을 각성할 터였다.

며칠 후면 찾아가 가두려 했는데 그사이 달아날 줄은.

상상하지도 못한 뒤통수였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어딜 멀리 갔겠는가.

곧 제 손안에 다시 들어올 것이다.

‘어떻게 구한 크리스털 페어리의 핏줄인데! 절대로 놓칠 수 없지.’

사납게 일렁이는 눈으로 오르비아 백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곧 집사가 와서 고했다.

“주인님, 마차가 한 대 사라졌다고 합니다.”

백작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마차가 사라져? 당장 병사를 풀어라! 더 늦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내도록 해!”

백작이 집사의 멱살을 쥐며 말했다. 흉흉한 눈빛이 홧김에 누군가 하나 죽여 버릴 듯했다.

그때였다.

톰이 꼼지락 대면서 백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루, 루시엘은 신전으로 갔을 겁니다! 죽은 언니를 위해 기도를 하겠다면서…….”

“그게 사실이냐?”

톰이 숨을 꼴깍 넘기면서 말했다.

“예, 주인님. 혼자 중얼거리는 걸 분명 제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내가 직접 가겠다.”

히이잉!

오르비아 백작은 곧장 말에 올라타곤 신전으로 출발했다.

* * *

루시엘은 화려하게 반짝이는 커다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엘란트라 경매소.

제국의 유일한 경매소로, 생긴 지는 얼마 안 됐지만 고가의 희귀한 물품이 거래되는 곳으로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는 제법 입소문이 나 있었다.

정문은 관리인이 지키고 있어 쉽게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무언가를 확인하고 들여보내는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건물을 빙빙 돌아 다른 입구를 찾아보기로 했다.

“꼬마야, 비켜 비켜.”

“앗…….”

루시엘이 구석으로 떠밀려 갔다. 한 사내가 천으로 덮인 수레를 끌고 가는 게 보였다. 경매로 나올 물건을 안으로 들여보내는 중인 듯했다.

그 순간 루시엘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래, 이거야.’

루시엘은 곧장 뒤를 살폈다. 수레 여러 대가 경매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루시엘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루시엘을 신경 쓰지 않았다.

루시엘은 과거의 생을 통해 알고 있었다.

보석안이 크리스털 페어리의 증거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오르비아 백작과 카빌 후작, 그리고 황태자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심히 움직이자.’

루시엘은 조심조심 몰래 수레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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