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화 (1/282)

<1화>

꽃잎이 흩날렸다.

루시엘의 처형이 있는 날이었다.

“죄인은 들으라. 감히 가짜 보석으로 황태자 전하와 모든 귀족, 제국민을 속이고 대업을 망친 죄, 목숨으로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집행관이 엄중한 목소리로 외쳤고 성난 군중들은 소리를 높였다.

“보석이 아니라 돌을 만들어 낸 사기꾼이야!”

“죽여라!”

여기저기에서 돌이 날아왔다.

유리관에 금이 가고, 돌에 맞은 그녀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가짜 보석을 만든 사기꾼이라…….

그것이 평생을 희생한 그녀에게 돌아온 이름이라니. 고문당하다가 마지막 남은 마력까지 쥐어짜서 보석을 만들어 낸 대가가 고작 이거였다니.

유리관에서 멍하니 선 그녀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황태자의 명령이 들려왔다.

“죄인을 끌어내라.”

루시엘의 갸날픈 몸이 형장에 끌려가 묶였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아니, 그냥 처음부터 모든 게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루시엘, 착하고 가여운 내 동생.’

일시아 언니가 저쪽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언니, 나 너무 힘들어…… 이제……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루시엘의 뺨을 타고 소리 없는 눈물이 흘렀다.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다.

처형장 위에는 새파란 칼날이 달린 단두대가 놓여 있었다.

죽음의 순간을 앞두고 루시엘은 자신이 마지막에 보았던 짧은 생을 회고했다.

평생 누군가의 욕심을 위해 감정을 쏟아 내고 보석을 만들었다.

황태자뿐만이 아니었다.

오르비아 백작도,

팔리듯 시집간 카빌 후작가의 사람들도.

하나같이 루시엘에게 보석만을 원했다. 그녀의 순수한 감정 따윈 외면한 채 그저 보석만을 요구했다.

차라리 심장 어딘가가 부서져 버렸으면 하고 루시엘은 간절히 바랐다. 어쩌면 오래전 이미 고장 난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그녀는 웬만한 일에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끄흑…….”

루시엘의 보석으로 채워진 황태자의 검은 드디어 열두 개의 보석을 모두 장착해, 마력을 머금고 찬란하게 빛났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했던 일은 벨슈타인을 몰락시키기 위해 저 성검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황태자는 그 검을 가지고 귀족과 연합해 군사를 이끌고 벨슈타인으로 쳐들어갔다. 대륙 최고의 힘을 가졌다는 벨슈타인도 신성한 검의 힘 아래에서는 굴복한 것이다.

시기가 적절한 면도 있었다. 그 지옥의 사신, 키제프 폰 벨슈타인이 마물 토벌로 영지를 비운 틈을 타 쳐들어간 것이었으니까.

황태자 레이놀드는 승리감에 도취해 제국이 완벽히 자기 것이라는 듯이 웃었다.

그는 권력을 위해 수많은 이를 죽이고 몰락시켰다. 모든 것이 루시엘의 보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회한에 찬 루시엘의 눈에서 눈물이 가득 고였다.

‘차라리 마지막까지 죽을 각오를 다해 도망이라도 갈걸. 그랬더라면 내 죄라도 덜어졌을 텐데.’

처형장에 묶인 그녀를 보고 황태자가 넌지시 말했다.

“마지막으로 느끼는 것이 없느냐?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석을 만들어 봐라.”

“…….”

루시엘은 황태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보석을 제공하는 짓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스릉.

황태자는 루시엘의 보석이 박혀 있는 검을 꺼내 들었다. 그의 싸늘한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네가 양심이 있다면 마지막에는 쓸모를 보여야지.”

루시엘은 거부의 의사로 고개를 돌렸다.

끝까지 제 명령을 어기며 굽히지 않는 루시엘의 모습에 황태자는 더욱 약이 바짝 올랐다.

“건방진…… 그래, 소원대로 해 주겠다.”

황태자의 손에 들린 보석 검이 웅웅거리며 시끄럽게 울었다. 마치 보석을 만든 주인을 기억하듯이.

검의 울림에 몸을 구속한 밧줄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자신을 구경하는 수많은 군중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천하의 죄인이 되어 죽는 삶. 어릴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땐 언니와 함께 둘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날을 꿈꿨다.

혹은 누군가와 만나 평범한 사람처럼 살게 되기를 꿈꾸기도 했다.

크리스털 페어리의 삶이 평범하기를 바라는 건 멍청한 짓이란 것도 모르고.

하지만 보석 노예로 팔려온 때부터 이미 불가능했던 꿈이란 걸 루시엘은 오랜 세월로 깨달았다.

‘언니…… 미안해. 감정을 느끼지 않겠다고 해 놓고 약속을 못 지켜서 이렇게 돼 버렸어.’

몸을 휘감던 밧줄이 빳빳하게 당기기 시작했다.

환호하는 건지 비난하는 건지 소리치는 군중들 속에서 시퍼런 칼날이 번쩍이자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커흑……!”

고통이 차오를수록 오히려 루시엘은 점점 평온해짐을 느꼈다.

한때는 하늘의 별보다 반짝이던 보석안은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였고, 안색은 점점 창백해져만 갔다. 루시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니, 조금만 기다려. 나도 곧 그곳으로 갈게.’

“이, 이 지독한 것!”

끔찍한 고통에도 더는 보석을 만들어 내지 않는 루시엘을 보면서, 황태자가 중얼거렸다.

“정말 쓸모를 다한 건가?”

그때였다.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면서 저 멀리서부터 어둠의 기운이 몰려오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칠흑으로 무장한 자였다.

검은 드래곤이 새겨진 화려한 휘장이 어깨에서 휘날렸다.

최후의 심판을 하기 위해 지옥에서 온 사자가 저러할까.

모든 걸 끝낼 것만 같은 무감각한 얼굴의 남자는 행색과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사신이라 불리던 벨슈타인 공자였다.

핏빛 눈동자가 구르며 황태자를 발견했다.

‘이 모든 일의 원흉. 금수만도 못한 벨슈타인의 원수.’

무너지다 못해 폐허가 되어 버린 벨슈타인의 검은 장벽, 그곳에 묻히고 흩어진 가족들의 유해.

가장 그를 미치게 만드는 광경은 세상을 호령했던 벨슈타인 공작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성벽에 매달려 있을 때였다.

그 순간이 떠올라 키제프는 또다시 울부짖었다.

한 마리의 짐승처럼.

이어 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후, 허공에 검은 마법진을 그렸다.

그의 주위로 크고 작은 마법진이 그려졌다. 검은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그야말로 폭주였다. 황태자의 기사단도, 귀족들도, 전부 집어삼켰다.

-으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지고, 순식간에 모든 게 파멸했다. 실로 깔끔할 정도로 완벽하게.

군중으로 가득 찼던 광장이 무색할 만큼 사방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제 남은 건 자신뿐이라는 걸 깨달은 황태자가 눈을 부릅뜨며 검을 고쳐 쥐었지만, 벨슈타인 공자는 이미 황태자의 등 뒤로 순간 이동했다.

“……내 가문의 복수를 하러 왔다.”

“어, 어느 틈에!”

파아앗!

벨슈타인 공자는 손가락을 들어, 황태자를 단숨에 공중으로 매달았다.

“끄윽!”

점점 황태자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 갔다.

챙그랑.

황태자의 검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것을 쳐다보던 벨슈타인 공작의 손에 그 검이 착 달라붙었다.

기이한 힘이 흐르는 검이었다.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 순식간에 검이 색색의 기운을 피워 올리더니 황태자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황태자의 숨이 끊기며 검도 빛을 잃었다.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형대 앞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루시엘은 황태자의 죽음을 먼저 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모두 끝이었다.

루시엘은 벨슈타인 공자에게 죄가 있었다.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저벅.

벨슈타인 공작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루시엘은 천천히 생명이 다해 갔다.

눈이 가물거리고, 숨을 쉴 수조차 없다.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다. 제 의지가 아니었다고.

자신은 아무도 해치고 싶지 않았다고.

평생 이용만 당하는 삶이었다고.

그러나 루시엘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 모든 것이 결국 변명이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은 루시엘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그에게 뻗으려던 손이 이내 힘없이 툭 떨어지고 말았다.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는 이 비참한 삶을 살지 않겠어. 나를 위해서 살 거야. 그리고 당신을 기억할게.’

비로소 루시엘은 잠들 듯 숨이 멎었다. 아주 편안하다는 듯이 미소 지으면서.

루시엘의 몸에 남아 있던 마력이 허공을 맴돌다가, 이내 이슬처럼 맺혀졌다.

또로롱, 툭.

바닥에 떨어진 건 루시엘이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만든 보석이었다.

스르르.

맑고 투명한 보석이 내뿜던 영롱한 빛이 루시엘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새하얀 빛은 이윽고 사방을 감쌀 정도로 커다랗게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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