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35화
EP 36-수도를 잃었습니다(3)
-정부는 전라, 경상 일대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충청, 강원, 제주, 그리고 그 외 부속도서에 경비계엄을 선포하였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군의 통제에 따라 주십시오.
-저희 KBS는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국민 여러분들과 함께 남아 보도를 이어가겠습니다. 반복합니다. 현재 전라, 경상 일대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으며…….
-광주에 가족이 있다니까요! 제발! 지나가게 해주세요! 이거, 이거 좀 치우라고요!
-유럽연합에서 인증받은 제품입니다. 팔찌를 누르면 음이온 반마력장이 작동하는데, 그러면 5분 동안 괴수들 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제가 미쳤다고 사람 목숨으로 장난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폴리스라인 넘어오지 마세요! 어이, 거기! 넘어오지 마시라니까! 야! 저거 막어! 막어!
-정부는 계엄사령관으로 유현종 대장을 임명하고 남부 지방 전역에 군대를 투입했습니다. 현재 시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군사작전이 시행 중이며, 국민 여러분들께서는 군의 통제에 따라 침착하게…….
* * *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게 있다.
대통령의 직속 자문기관이며 의장은 ‘직전’ 대통령이 맡는다. ‘전직’이 아니라 ‘직전’이다. 군사정부 시절에 헌법으로 박아놨다.
물론 직전 대통령에게 훈수까지 받아가며 정치하고 싶은 대통령은 없었으므로 국가원로자문회의가 제대로 출범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은퇴하고 나서도 계속 해먹고 싶다는 권력자의 염원이 헌법에 구구절절이 흔적을 남긴 것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원옥분 대통령이 그걸 소집했다고요?”
양판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헌법에 따라 내가 의장이 됐고, 나는 자네랑 김두식 전 총리를 원로위원으로 추천했네. 거기에 원통이 사인했고.”
“……제가 원로 소리 듣기에는 너무 파릇파릇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계엄령 끝나면 없어질 조직이야. 국가안전보장회의 들어가려면 명함이라도 파야 하니까 잠깐 써먹는 거지. 빨리 따라오게.”
“예, 예? 아니 잠깐만요. 짐 좀 챙기겠습니다. 야! 채원아!”
양판석은 계엄령이 터지자마자 주요 인사들을 자기 리무진에 쑤셔 넣고 청와대로 달렸다.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공무원도 아닌 인간들이 너무 어거지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막상 벙커에 도착하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 위치부터가 1급 군사기밀로 관리되던 대통령의 지하벙커는, 사방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어어, 저 양반 CEM 회장 아닙니까?”
“지금 그게 눈에 들어오나?”
거대 PMC 사장, 재벌, 국회의원들이 벙커 입구도 뚫지 못하는 와중에, 양판석은 기분이 거지 같은 모양인지 사람들을 퍽 퍽 밀치며 입구를 뚫었다. 집안과 나라에 연달아 망조가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지하벙커 청와대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지난 몇 년간 살던 곳이었으니 별다른 안내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대한민국의 실권자들이 모여 있었다.
‘다 아는 얼굴들이고만.’
원옥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핵심 인사들이 둘러앉아 있었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모니터에도 사람 얼굴이 빽빽했다.
익숙한 긴장감에 넥타이를 한 번 조이고 양판석 옆자리에 앉았다. 저절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원옥분 대통령은 국가안보실장을 붙잡고 지시를 내리는 와중이었다.
“그거를 갖다가 거기에 하라 그러면 그 양반들이 뭐 어째요. 합참에다 넘기고 탱크로 밀어야지.”
“예, 대통령님.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미그기 띄우지 말라 그래요. 미군은 재깍재깍 미사일만 쏴주면…….”
보통 국가적 위기사태가 들이닥치면 거물들이 모여서 무릎에 고양이 한 마리씩 올려놓고 무게 잡는 게 영화 속 클리셰였지만, 실제로는 장관부터 대통령까지 똥줄이 타는 모양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TV에 나온 재벌 회장은 손톱을 뜯고 있었고, 이번에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된 양반은 식은땀이 뻘뻘 흐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어어, 한승문 장관님? 언제 오셨습니까?”
“유재경 총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 제가 한 장관님 몇 차례 뵈면서 생긴 믿음 같은 게 있어서…… 이번에도 현명하게 푸실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해먹은 가락이 있는 양반들은 어느 정도 긴장을 숨기는 눈치였다. 회의는 그런 사람들 위주로 진행되었다.
“괴수는 군대가 잡고, 게이트는 헌터가 닫읍시다. 당연히 시민들도 군대가 대피시키고, 헌터들은 철저하게 게이트 파괴를 목적으로…….”
“각하. 시가지에 숨어든 괴수를 상대하려면 헌터의 조력이 필수적입니다.”
“군대에 있는 헌터들은 군대랑 같이 싸우고. 민간 측 헌터들만 따로 돌리자는 거예요. 김두식 전 총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군대 안에 있는 헌터들만 갖다가 시가전에 투입할 수 있겠어요?”
“오로지 그럴 용도로 편성된 헌터들이니만큼 충분할 것으로 보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사령부를 아예 이원화시켜서…….”
정부 차원에서 작성해놓은 매뉴얼이 있던 만큼 회의는 깔끔하게 정리됐다.
군대는 시민을 대피시키며 괴수를 소탕하고, 헌터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는다.
합참에서 세운 시민대피계획은 그럴듯했고, 지난 몇 년간 각 지역에 벙커까지 완공한 상태였다. 슬슬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희망이 보이자마자, 귀신같이 회의는 점점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입을 꾹 닫고 있던 장사꾼들이 판에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계엄사령부가 국군을 지휘하고, 초상관리부가 헌터를 지휘하는 겁니까?”
“법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다만 경찰청장 출신이 이런 대규모 군사작전을 지휘할 수 있을지는…….”
“뭐요!?”
“자존심 내려놓고 이야기합시다. 경찰이 군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거는 시위 진압이 아니에요.”
“맞습니다. 그 독한 헌터들이 말을 들을지도 의문이고요. 차라리 GS 방위대행사나 SK 헌터스에 전략고문을 받아서…….”
“삼성은 왜 빼먹습니까?”
“거기는 삼성 사이오닉이랑 삼성 수렵대행사랑 지분 문제로 싸우고 있잖습니까. 집안 정리도 못 하는데 뭘 믿고…….”
“아무리 비공개 회담이래도 그렇지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닙니까? 그냥 국방부에서 군대랑 헌터 둘 다 지휘하고 싶다고 솔직히 말을 하세요. 괜히 남들더러 찌그덕거리지 말고…….”
“군부에서 다 해먹겠다는 거구만…”
“거, 해먹긴 뭘 해먹습니까? 다만 전략적인 관점에서…….”
익숙한 개판의 향기였다. 어째서 양판석 정부나 원옥분 정부나 회의 중간쯤 넘어가면 아사리판이 나는 걸까.
결국 원옥분 대통령이 나서서 깔끔하게 정리했다. 흉측한 칼자국 사이의 희뿌연 눈동자가 째려보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초상관리부에서 모든 민간 초상능력자들을 지휘합니다. 그 어떤 PMC도 개별활동은 허락 못 해요. 해외에서 들어오는 지원군을 제외하고. 아무도. 알겠습니까?”
“…….”
“그리고 김두식 전 총리가 특임장관 직위를 받아서 초상관리부와 국방부를 둘 다 감독하세요. 그리고 양판석 전 대통령께서는 여기 남아서 내 판단을 보좌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원옥분 대통령은 말주변이 그리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녀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국가 비상사태를 지휘한 경험이 있었고, 그런 경험은 이번 사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말이다.
“국군은 지난 며칠간 시민들의 위치를 옮기며 인구밀도를 조절했고. 게이트 발생 위치를 부산과 광주 사이로 맞췄습니다. 이제 모든 도로를 봉쇄하세요.”
“…….”
“각 지역에 있는 거점을 요새화시키고 시민들을 대피시킵시다. 지역별 인구가 변화하지 않게 심혈을 기울이세요. 대피는 허락하되, 피난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알겠습니까?”
* * *
“뭐야. 부산이랑 광주 사이에 열리는 이유가, 사람들을 거기에 모아놔서 그런 거였어?”
“그렇다기보다는 부산이랑 광주 사람들을 인근에 흩어서 인구밀도를 낮췄다고 봐야지.”
“그쪽 사람은 죽으면 안 되고, 여기는 죽어도 되나?”
“사람 문제가 아니라, 부산은 공업지대고 광주는 곡창지대니까…….”
“그거 완전 개새끼구만!”
“어허, 지윤아.”
감지윤은 예나 지금이나 후드티를 가장 좋아했고, 입이 거칠었으며, 대한민국 최강의 초상능력자였다.
그러니 내가 요 맹랑한 꼬맹이 옆에 배치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감지윤에게는 이게 꽤 의외의 배치였던 모양이었다.
감지윤이 나와 깍지 낀 손을 방방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중학교 들어가며 젖살도 빠지고 성격도 살짝 까칠해졌지만, 이 해맑은 웃음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나저나 아저씨가 현장에 나올 줄은 몰랐네? 나야 좋지만!”
“지윤이가 아저씨를 그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는걸?”
“아니. 일이 반으로 줄잖아.”
그렇군. 씁쓸한 심정으로 수긍했다. 정치인이 뽀로로도 아니고 애들한테 인기가 많지는 않겠지.
나는 옥상을 거닐며 도로를 지켜봤다. 가로등 아래로 탱크 몇 대가 줄지어 지나가고, 창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우리를 찍고 있었다.
카메라에 이골이 난 감지윤이 인상을 찌푸리며 후드티 속으로 얼굴을 집어넣길래, 나는 괜히 녀석의 손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쳤다.
“지윤이 너, 중학교 들어갔으니까 이제부터 존댓말 써라.”
“고등학교 들어가면 쓸게!”
“지난번에는 중학교 들어가면 쓴다면서.”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고!”
그렇게 긴장을 풀고 있으니 옥상 구석에서 대기하던 홍선아가 다가왔다. 밤바람에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흩날렸다.
“의원님? 오랜만에 같이 싸우네요?”
“어어, 선아 씨.”
“국경선 게이트는 전부 파괴하기로 결정됐다면서요?”
“그렇죠. 채산성은 둘째 치고 마력에 자극받아서 괜히 폭주하면 큰일 나니까요. 아마 지금쯤 PMC들이 자기네 담당구역에 있는 게이트 전부 닫고 있을 겁니다.”
보통 정신계 초능력자는 방어용 디바이스만 걸치고 다니지만, 홍선아의 옆구리에는 언제나 기관단총이 매달려 있었다.
그건 그녀가 압구정에서 얻은 철학이었다. 괴수보다 사람이 무서울 때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건 기관단총 하나 들고 다니는 수준의 신념은 아니었다.
“국경에 사람 보내서 확인했어요. 길드장 몇 명이 담합하고 게이트를 남겨놨더라고요.”
“저런.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됐을 것 같나요?”
“너무 조져놓지는 마십쇼. 원래 그런 건 오케이 캐쉬백 모으듯이 조금씩 쌓아놨다가 터뜨려야지, 일일이 터치하면 반발만 쌓입니다.”
감지윤이 그게 애 앞에서 할 이야기냐며 투덜대길래 대화를 마치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지윤이 녀석의 뛰어난 마력 감응력이 내게 전해졌고, 나는 밤하늘 너머에서부터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 별빛은 없었다. 시꺼먼 어둠 사이로 어둠이 일렁거렸다. 꿈틀대는 검은 물감 사이로 파란 물결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열렸다.”
검은 하늘이 쩌억 입을 벌리자 파란 목구멍이 드러났다.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계의 시퍼런 불빛이 내리쬐었다.
이내 하늘이 구멍 난 치즈처럼 변하자 세상은 거의 파랗게 물들었다. 게이트 불빛이 달빛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계의 너머에서 괴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사실 게이트 공략이라고 해봤자 그냥 들어가서 다 때려 부수고 탈출하는 거였지만, 조금 고상하고 학술적으로 표현하자면 3단계로 나뉜다.
진입, 파괴, 탈출.
우선 진입부터 설명하자면, 편하게 진입하려면 일단 최대한 친절한 게이트를 만나야 했다. 착한 게이트는 땅에 있었고, 나쁜 게이트는 하늘에 있었으며, 좆같은 게이트는 땅속이나 바닷속에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차원축을 파괴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아공간을 유지하는 차원축이란 허공의 어느 지점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거기에 게이트버스터를 설치하고 탈출하면 됐다.
문제는 가끔가다 강력하거나 거대하거나 아니면 둘 다인 단일 개체가 차원축의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다. 그러면 얄짤없이 괴수들 틈바구니에서 보스몬스터를 때려잡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들어왔던 입구로 다시 탈출하면 되는데, 문제는 아공간에서 개고생하는 사이에 입구를 까먹거나, 길을 잃거나, 너무 늦게 탈출하면 평생 지구로 못 돌아왔다.
그러니 진입, 파괴, 탈출 과정에서 어느 단계에서든 긴장의 끈을 놓치면 골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지윤은 예외였다.
“쉽구만.”
슝 날아서 파박 갈아엎고 다시 슝 탈출하면 게이트 공략에 성공하는 것이 감지윤이었다. 그리고 그런 감지윤이 두 명 있으면 어떻게 될까.
“아저씨, 다음 게이트 들어가자!”
“저기 옆동네에도 열렸네. 밤이라서 보기 쉽구만. 저거, 저, 시퍼런 거 봐라.”
우리는 밤하늘에 뚫린 구멍을 순식간에 틀어막고 옆동네로 향했다. 비록 시가지에서는 군인들이 여태껏 튀어나온 괴수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일단 괴수 못 튀어나오게 싹 다 틀어막고 나서 시가지 전투에 합류하라는 게 정부 지침이었다.
물론 시가지에서 백날 막아봤자 게이트를 못 닫으면 말짱 도루묵이니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그래도 눈앞의 참상을 외면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계획은 차차 진행되고 있었다. 갑자기 초대형 게이트가 등장했다는 연락도 없었고, 어느 도시가 박살났다는 비보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순조롭게 진행돼서 불안한 감이 있었다. 이 나라가 이렇게 순탄하게 굴러가는 나라가 아닌데……? 정도의 느낌이랄까.
아니나 다를까, 우리와 붙어 다니던 홍선아가 의문을 제기했다.
“슬슬 지리산으로 갈 때 아닌가요?”
“아직 지시가 안 왔잖습니까.”
“그래도요.”
당연히 홍선아가 꿀이나 빨려고 감지윤과 내게 합류한 건 아니었다. 우리 3인조에게는 지리산 국립공원을 통째로 불태우는 임무가 하달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한반도 남부에 퍼진 괴수들을 국군이 지리산 국립공원으로 밀어내면, 대규모 산불 폭풍을 일으켜서 괴수를 전부 구워버리라는 게 우리의 보조 임무였다.
그래서 원옥분 정부가 지리산 인근에 사람이 가장 많도록 인구밀도를 인위적으로 조작하기까지 했다.
부산, 광주 사람들은 인근 대피소로 흩어버리고, 지리산 인근을 요새화시켜서 사람들을 모으고, 거기에 군인들까지 대거 배치하고…….
지리산 국립공원에 개발허가를 내면서 신도시가 형성됐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국토의 대부분은 산악이었다.
그러니 지리산에 괴수를 몰아넣고 불태워 버리는 작전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홍선아는 그게 너무 늦어지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었다.
“하지만 선아 씨, 지시도 안 왔는데 불부터 붙이기에는 너무 이른 시점인 것 같은데요.”
나는 지리산 초토화 작전을 너무 이른 시점에 진행하려는 게 아니냐고 물었지만, 홍선아의 대답은 정반대였다.
“지리산에 불부터 붙이자는 게 아니라, 불붙이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닐 텐데 이상하게 연락이 없네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홍선아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우리는 밤하늘에 둥둥 떠서 잠시 의견을 교환했다.
“우리가 처음에 예상했던 것처럼 초거대 게이트는 없었어요. 별다른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아직 까지는 그렇겠죠.”
“그래서요?”
“그러면 이번 사태가 시가전이나 소규모 교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소리고. 당연히 지리산에도 괴수가 얼마 없을 텐데, 그거 막자고 지리산을 통째로 불태우는 건 수지타산이 안 맞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러면 지리산 초토화 작전을 축소시키든, 취소하든, 아니면 빨리 시행하고 넘어가든, 거기에 대한 지령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별말이 없는 건 좀 이상해서요.”
“……전화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나는 홍선아의 핸드폰을 빌리려 했다.
“선아 씨, 핸드폰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제 것도 꺼져 있는데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그 와중에 감지윤도 자기 핸드폰을 흔들었다.
“내 것도 안 나오는데……?”
나는 차분히 질문했다.
“무전기 가진 사람 있습니까?”
“괴수 상대하는 데 누가 무전기를 들고 와요.”
그랬다. 대(對)괴수 전략은 효율적이고 현대적으로 발전했고, 괴수가 통신 방해를 시전하는 경우는 당연히 없으니, 무전기는 버려지고 스마트폰과 카톡이 그 자리를 대체한 뒤였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먹통이다.
괴수가 EMP라도 터뜨린 건가.
정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애초에 사령부와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는 소리 아닌가. 과연 연락이 끊긴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아.”
사실 초대형 게이트는 이미 출현했는데 우리만 모르고 있던 게 아닐까? 사실 부산이랑 광주는 이미 공격받고 있는데 우리만 모르고 있던 게 아닐까? 우리만 게이트 몇 개 지워버리고 신나서 이기는 중이라고 착각한 게 아닐까?
시퍼런 구멍이 숭숭 뚫린 밤하늘. 넋 나간 초능력자 3명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