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34화
EP 36-수도를 잃었습니다(2)
내가 보좌관으로 처음 취직했을 때는 미국에서 한참 PC 운동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미국물 좋아하는 국회답게 한국 정계에서도 잠깐 힙스터 분위기가 반짝했었고, 국회의원들은 어설프게나마 신문물을 따라 하곤 했다.
그래봤자 보통은 유튜브나 SNS를 기웃거리거나, 최신 댄스라도 배워서 꿈틀거리는 수준이었지만, 양판석은 한 발 더 나갔다.
무려 장애인을 운전비서로 채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러니까 나는 약간 인간 악세사리 비슷한 거였는데, 양판석은 나를 인터뷰에 데리고 다니면서 장애는 장애물이 아니라며 광을 팔고 다니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지만 그때는 그게 먹히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양판석이 소싯적에 화염병 좀 말아본 원조 힙스터기도 했고 말이다.
비록 본인 손으로 옛 운동권 동지들을 공천학살로 수술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좌파스러웠던 건 양판석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양판석은 잔대가리 좀 굴릴 줄 아는 절름발이 수행비서를 꽤 마음에 들어했고, PC 유행에 편승해서 단물을 다 빤 이후에도 나를 줄곧 데리고 다녔다.
물론 즐거웠던 추억만 있는 건 아니다. 술기운에 탈모 소리 했다가 얻어맞은 적도 있고, 담뱃불 붙이다가 지포라이터 떨어뜨려서 넥타이에 불 지른 적도 있다.
그때 옆에 있던 재수탱이 수석보좌관이 깜짝 놀라서 쪼인트를 깠는데, 하필 의족이 날라가서 꼴사납게 넘어지지 않았으면 아마 100% 짤렸을 거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최악의 에피소드는 따로 있었다.
양판석의 밀명을 받아 나이트클럽에 잠입해서, 약에 취한 양정석을 데리고 경찰과 CCTV를 피해 탈출한 사건이었다.
심지어 정신을 차린 양정석이가 수치심을 못 이겨 나에게 온갖 육두문자까지 퍼부었으니 오죽했을까.
비록 양판석에게 위로금을 두둑하게 챙겨 받긴 했지만, 그때는 여도연에게 달라붙어 하소연하며 잉잉 울었을 정도였다.
다행히 이젠 젊은 날의 고생으로 남아 기억도 잘 안 나지만, 그래도 ‘그때 그 새끼’가 티비에 나온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제천 사태는 더 거대한 폭풍의 전조에 불과합니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약을 할 것이지.
[……원옥분 대통령은 지난날 초유의 국방농단과 선거개입으로 한국 민주주의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습니다.]
양정석의 긴급 기자회견은 슬슬 분위기를 올리고 있었다. 아버지 재능을 물려받았는지 얼굴이나 말본새는 생각 외로 그럴듯했다.
“……저거 괜찮은 겁니까?”
“괜찮겠나?”
양판석은 표정관리가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기에 이 상황에서도 무표정했으나, 부끄러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이유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양판석 얼굴이 저렇게 빨개진 건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살짝 양판석을 의심하던 마음을 고이 접었다.
[……조만간 한국에 대규모 게이트 사태가 발발할 것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의 공식 보고서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일대의 마력이……]
양정석은 아버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나도 분노한 시민들이 길거리로 뛰어나올 생각을 하니 숨이 턱 턱 막힌다.
양판석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헛짓거리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식 문제가 어디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뱃지 놈들 말하는 걸세.”
“아.”
그래, 배후세력이라. 자세히 보니 기자회견장에도 양정석의 병풍을 서주는 국회의원이 몇 명 보였다.
대부분 국방당 소속 양판석계 의원들이었다. 모두가 양판석을 배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양정석은 그걸 믿고 달려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대충 뭘 할지도 감이 잡혔다.
[……저는 애통한 마음으로 국방당에서 탈당하겠습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국민의 생명권을 존중하지 않는 정부는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국가 멸망의 위기가 다가온 지금, 올바른 방향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탈당러시. 양정석과 친구들은 국방당을 반으로 갈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양판석계와 원옥분계의 불편한 동거가 깨진 것이다.
선출직이 아니어도 당적을 가질 수 있으니 누구나 탈당은 할 수 있었지만, 저렇게 탈당하겠다며 고개를 숙이는 양정석은 마치 국회의원이라도 된 것 같았다.
거기에 원옥분 대통령을 저격하면서 국방당을 반갈죽시켰으니, 이제 저걸 일반인으로 인식하는 국민은 없을 거였다. 이렇게 밑밥을 깔면 나중에 당대표 선거에 나가도 체면이 서겠지.
“크흠.”
그제서야 양판석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진 말게. 조만간 몇 명 잡혀 들어가면 흐지부지 넘어갈 거야. 집안 망신은 어쩔 수 없겠지만…….”
“이 상황에 검찰이 기소하면 탄압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탄압도 탄압 나름이지. 아주 으스러질 때까지 밟으면 역풍도 안 불어.”
하긴, 어차피 그 양판석 정신 운운하는 세력은 오래 가지 못한다. 양판석 없는 양판석 팀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정말 대재앙이 들이닥치기 전에 국내의 혼란을 정리할 필요는 있었다. 일단 그놈의 양판석 정신을 운운하지 못하게 언플을…….
[……원옥분 대통령의 독재를 멈추겠습니다! 비록 한승문 장관은 정치에서 물러났지만, 한 장관의 정신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온몸으로 부딪혀 독재와 억압에 항거했던……!]
어?
* * *
“청중엽 대표님. 국민당에 입당하겠습니다.”
“으음.”
국민당 당대표, 청중엽은 난처하다는 듯 미소지으며 대답을 뭉갰다. 양정석이라는 놈이 얼마나 몸이 달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양정석은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정치를 잘하는 핏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어렸을 적부터 보고 배운 가락이 있는 놈 같기는 했다.
“만약 우리를 받아주신다면 차기 대선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의향이 있습니다.”
“우리, 라고 하신다면.”
“원옥분 대통령의 폭정을 경계하는 국방당 의원들이 스무 명 정도 있습니다. 대부분 호남 쪽 지역조직을 장악한 분들이니 당이 바뀌더라도 선거에서 최소한의 경쟁력은 유지하시겠죠.”
“신당 창당을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하하, 그건 그냥 보험이라고 생각해 주시죠.”
“하하하!”
청중엽은 습관적으로 웃어넘기며 양정석의 스펙을 머릿속에서 한번 훑었다.
미대 졸업. 호남토호 집안. 약쟁이. 시의원 당선 경력. 대지주. 부동산 투기……
그다지 매력적인 이력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반반한 상판과 풍족한 재산, 그리고 혓바닥으로 단점을 커버하는 스타일이었다.
전형적인 지역 토호 스타일의 인사였고, 사실 청중엽도 전라도가 아니라 제주도라는 것만 빼면 양정석과 대충 비슷한 과였다.
청중엽이 말없이 양정석을 스캔하고 있으니, 대답을 재촉하는 것처럼 몇 가지 구체적인 제안이 튀어나왔다.
“청중엽 대표님. 제주도지사 임기를 마치고 중앙정계에 진출하셨지만, 당내 기반이 아직 부족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승문 계열 일파들의 견제 때문이겠지요.”
“상당히 직설적이시군요.”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쪽 등쌀에 밀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호사가들이야 제가 부모 이름을 팔아 정치를 한다고 비판하지만, 정말로 남의 이름을 팔아 정치를 하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어디 한승문계 의원들이 정권의 하명입법 말고 자기들 이름으로 정책이라도 추진한 적이 있습니까? 책임 없는 권력이라니요. 이건 기형적인 형태입니다.”
“…….”
“만약 국방당 내부의 탈당파를 수습해주신다면 당정이 정상적으로 회복될 겁니다. 덩달아 허수아비 국회도 바로잡히겠지요. 제가 원옥분 대통령을 탄핵하자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도의적인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야당으로서, 시민으로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개문 사태 이후로 한참이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밀실에서 모든 걸 결정하면 안 되죠.”
청중엽의 당내 기반이 부족한 것도 맞고, 이호정을 중심으로 뭉친 한승문계 의원들이 거슬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청중엽이 양정석(과 친구들)을 소화 시킬 수 있느냐였다.
그리고 말하는 본새를 보니 양정석은 능히 국민당 내부에서 계파를 형성하고 분탕질을 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차기 대선에서 밀어주겠다고는 했지만 원옥분은 이제 막 임기를 시작한 대통령이었다. 살벌하게 살아 있는 권력은 둘째치고 다음 대선까지 4년이나 남아 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청중엽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양정석이 첨언했다.
“이번 정계개편 작업이 성공적으로 완수된다면 제1당이 바뀔 겁니다. 이미 레임덕에 돌입한 원옥분 대통령은 무엇 하나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겠죠. 그러면 우리가 협치와 견제의 묘를 살려 민주적으로 국정을 견인하면 됩니다.”
“협치와 견제라. 지금껏 그런 시도가 성공한 적이 있었던가요?”
“없지요. 하지만 언제까지 밀실정치 같은 구시대적 행태를 용인할 겁니까? 차재균, 원옥분, 양판석. 모두 그나마 괜찮은 독재자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망국적인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나라가 생존할 수는 있어도 거기서 발전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제는 깃발을 들고 나갈 기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청중엽 대표님을 중재자로 모시고 싶습니다.”
“…….”
“지금 정부와 국회 사이에서 국정을 조율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청중엽 대표님밖에 없습니다. 기업들 사이에서 협상력을 발휘하셨던 것처럼, 그 능력을 살려 국정을 견인하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로비스트 제주도지사에서 중앙정계의 조율자로.
그게 양정석의 진짜 제안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는 청중엽이 될 것이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권의 지도자는 언제나 차기 대통령으로 거듭났으니까.
거기에 정말로 정권을 갈아엎을 작정이 아니었으니 원옥분 대통령도 행보가 제한된다.
그러니 청중엽은 정부와 국회 사이에서 교통정리만 잘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협상과 타협이야말로 청중엽의 진짜 특기였다. 잘생긴 얼굴만 팔아서 제주도지사를 10년 넘게 해먹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하!”
청중엽은 이런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좋습니다, 입당원서부터 내시죠.”
* * *
[국방당 탈당파가 국민당에 입당을 신청했습니다. 이번 합당이 성사된다면 원내 1당이 국민당으로 교체됩니다. 현재 국민당 지도부는 비공개 의총을 소집하고……]
양정석의 폭로는 나라를 뒤집어놨다. 안 그래도 제천 사태로 달아오른 민심이 한 차례 폭발했고, 양정석이네 패거리는 그렇게 터진 분노를 자신들의 지지율로 만들었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시위 현장을 돌아다니며 목소리를 높이는 국회의원들을 보면, 소싯적에 데모 좀 해본 사람들인 것 같았다.
치안은 이미 붕괴했고, 경찰은 대피는커녕 마트나 지키고 있다. 원옥분이 언론을 조져가며 가까스로 막아냈던 뱅크런의 조짐까지 보였다.
국가 부도를 목전에 둔 상황이었지만 원옥분 대통령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양판석도 마찬가지다.
“신기하네요.”
리모콘을 내려놓고 소파에 기대자, 옆에서 짐짓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그렇게 신기하십니까?”
“그냥 양판석 대통령이나 자기가 직접 나가서 아니라고 그러면 되는 문제 아닌가 싶어서요. 저렇게 하루종일 뉴스에서 안 내려오면 광고효과가 대체 얼마에요?”
천 사장은 뉴스 화면에 손가락질했다.
“체면 때문에 안 되는 건가요? 멋대로 이름을 빌려 갔는데 왜 해명도 안 하는 건지. 가끔 보면 정치인들도 이해가 안 된다니까…….”
나는 진지하게 맞불을 놓으면 양정석 체급만 키워주는 효과가 나온다고 대답하지 않고, 그냥 다른 질문을 던졌다.
“청중엽 지사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음. 글쎄요…….”
천사장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친기업 정치인이라는 인식은 많은데, 막상 우리랑 잘 안 만나주는 사람이었죠.”
“아, 그랬습니까? 오래 해먹은 이유가 있었군요.”
“그냥 행정상으로 편의만 잘 봐줬어요. 괜히 수작 안 부리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갔죠. 그래서 우리 동네 어르신들이 좋아하잖아…….”
그쪽 동네 어르신이라면 재벌 회장들을 말하는 것이겠지. 천사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공장 어디에 지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면 자연녹지지역 풀어주고. 예산 가지고 싸웠으면 싸웠지 괜히 기죽이려고 들지도 않고…….”
“유들유들하네요.”
“어디 사는 한 씨 의원님이랑은 정반대죠. 임기 내내 기업들 잡아먹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어허, 큰돈 만지게 해줬으면 됐지.”
“우리가 돈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랬다. 재벌이 가끔 체면이 상할 수는 있어도, 돈이 없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정치인도 가끔 돈을 날릴 수는 있어도, 체면을 잃지는 않았다.
시총만 수천억이 넘어가는 대기업 회장이 청문회 불려가서 개망신을 당하고, 월세방 사는 국회의원이 수십조 예산을 주물럭거리는 세상 아니던가.
그러나 재벌이 돈을 잃으면 재벌이 아니게 되고, 정치인이 체면을 잃으면 정치인이 아니게 됐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의전을 따지는 거였다. 따라서 정치인들이 급이 낮다 싶으면 말도 걸지 않는 거였다.
그러니 청중엽이 돈을 퍼줬으면 퍼줬지 재벌들 경조사에 따라다니지는 않은 거였다.
결국, 재벌을 죽이려면 돈을 뺏어야 했고, 정치인을 죽이려면 체면을 뺏어야 했다. 그게 양판석과 원옥분이 침묵하는 이유였다.
“양정석은 해결됐으니 경제나 어떻게 좀 해봅시다. 며칠 사이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멋있는 연출을 위해 말없이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천 사장이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내 뒤에서 새로 뉴스 속보가 떠올랐다. 천사장이 화들짝 놀라 나를 따라왔다.
[국민당 의총, 탈당파 입당 거부.]
* * *
청중엽 대표는 결국 우리와 손을 잡았다. 양정석은 순식간에 비웃음거리로 전락했고, 나는 기자회견을 열어 양정석 일파와 뜻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리고 검찰이 움직였다. 양정석은 철저하게 가만히 내버려 두고, 그 옆에 있는 국회의원들을 거냥한 표적수사였다.
수사는 극도로 정밀했고, 신속했으며, 치명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내부정보를 밀고한 것처럼. 마치 첩자라도 숨어 있던 것처럼.
양정석과 붙어있던 양판석계 의원들은 자기가 모시던 영감이 소싯적에 운동권 동지들을 자기 손으로 토막 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아야 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치안이 정비될 무렵, 원옥분 대통령이 군복을 입고 회견장에 나와, 부산과 광주 사이에 게이트가 열릴 것이라는 관측 결과를 발표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