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04화 (204/296)

EP 30 - 이게 다 한승문 때문이다 (2)

「kikk : 아니 님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요. 한승문이 이 시국에 대선 나간다고 나댈 사람임? 그리고 출마선언을 할거면 각 잡고 했지 뭐 하러 이 지랄을 하겠냐고. 아ㅋㅋㅋ」

「우남정 : 나라도 팔아먹었는데 뭘 못 하리?」

「kikk : 딱 봐도 선거철 들어가면서 한승문 다리몽댕이 뽀개겠다는 건데. 이거 대국민 사기극이라니깐요??」

「나비탕 : 선거철에는 누구나 맛이 가기 마련입니다. 한승문도 예외는 아닐 거고요. 불출마선언 한지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에는 상당히 실망스럽네요.」

「람보88 : 뇌피셜 자제」

「dk0dk : 설득하려 들지 마세요. 돈 없는 사람들이 그냥 누구 욕하고 싶은 거니까^^」

「NAM : 각성제 해외지원은 국민투표로 정해놓고. 이제 와서 한승문더러 경제 망쳤다고 이지2랄. 이래서 한국은 민주주의하면 안 된다」

「세슘업 : 사람들이 뭘 잘 모르는데 국회의원은 절대로 소신발언 안 합니다. 아는 사람이 업계 관계자라서 제가 잘 압니다. 당연히 대통령 연령제한 낮추자는 말도 윗선에서 떨어진 거고…… 지금 젊은 놈이 얄팍하게 머리 굴리다가 크게 데였다……. 이게 정답.」

「dnkm : 결국 민심이 다 말해준다! 피난민들 추위에 떨며 배곯는데 세금으로 호의호식한 역적 놈!!! 드디어 심판당하는 꼴을 보겠구나~~」

「에꾸스 : 이게 세금으로 영웅놀이한 업보지」

* * *

본격적인 개싸움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어쭙잖은 해명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모든 의혹과 인터뷰에 대해 무시로 일관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원옥분과 유재경 쪽의 공격은 점차 잦아들었다. 물론 그네들이 내게 알량한 자비심을 보인 건 아니고, 놈들의 주적은 내가 아니라 서로였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대선은 3강 체제였다.

일단 원옥분 전북지사가 새만금 신도시를 순항시키며 1위로 앞서갔다. 전직 대통령 권한대행에다가 검찰을 끼고 있는 인간을 누가 막아세우겠는가. 그녀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전라도까지 서서히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를 뒤쫓는 게 유재경 총리다. 경제위기가 심각해질수록 경제 전문가가 주목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양판석과 각을 세우고 있었기에 정권심판론도 먹히지 않았다. 다만 뚜렷한 지역적 기반이 없다는 게 장점이자 흠이었다.

그리고 충청 방어선으로 남부지방을 지켜낸 김두식 충청군구 사령관이 대선주자 3위였지만, 본인부터가 정치에 뜻이 없었고, 사람들도 정치인으로 대접하는 게 아니라 위인 취급을 하는 거라서 사실상 대선은 투톱 체제였다.

따라서 원옥분과 유재경은 나를 제껴 두고 서로 치고받는 게 훨씬 중요했다. 하지만 신수광이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국민당을 먹으려면 이호정을 잡아야 하고. 이호정을 잡으려면 나를 잡아야 한다.’

국민당 비상대책위원장(당대표) 신수광은 수도권 피난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놈은 지난 몇 년간 삭발과 단식을 거듭하며 피난민들을 열성적으로 비호했다. 본인부터가 최대규모 피난민 캠프의 리더였고 말이다.

수도권 피난민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사람일수록 나를 싫어하는 정도가 심했으며, 신수광이는 국민당 당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그리고 피난민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나를 공격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그놈을 먼저 밟기로 했다.

“야. 호정아.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이호정은 국민당 원내대표를 하면서 내 계파의 바지사장 노릇을 했다. 하지만 나는 국회를 순수하게 입법기관으로만 이용했으니 사실상 이호정이 계파의 리더였다.

“일단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네. 내가 국내 정치판에 조금만 관심을 가졌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진 않았을 거다.”

“……아니에요. 오빠도 헛짓거리하면서 세월 보낸 건 아니잖아요. 빈말이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했는데 내가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지.”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지만 내가 정치질에 미흡했던 게 사실이다. 사실 한승문계라고 부르는 게 우습지. 내가 언제 그 사람들 데려다가 밥이라도 사줬니? 그냥 너한테 맡기고서 장관 노릇이나 열심히 했지.”

“그게 팩트긴 하죠.”

“……크흠.”

솔직히 언론에서 ‘한승문계’로 분류하는 세력은 사실상 콩가루였다.

대부분이 선거철에 내 인기를 보고 달려든 사람들이고, 나 장관하던 시절에 법안 쏴주면 거수기 노릇하던 사람들이다.

심지어 정치 경력자들은 국방당이 전부 가져갔으니, 국민당에는 다선 의원들이 고작 10명도 못 되는 게 현실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나와 안면조차 없다.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긴 하지만 말이다.

청중엽이네 세력은 제주도발 검은돈으로 뭉쳤고, 신수광이네는 난민캠프 우정과 독기로라도 뭉쳤지, 한승문계?

거기서 의리를 기대하는 건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이번에 분탕질을 친 의원이 생긴 것도 당연했다.

요약하면, 국회 내부의 우호세력은 굉장히 영양가가 없는 인간들이라는 거였다.

냉정한 소리였지만 현실이 그랬다.

“……호정아. 이걸 내가 너한테 물어보는 상황이 굉장히 민망하긴 한데. 국회 내부에서 믿을만한 인간이 몇 명이나 되는 것 같냐?”

“일단 신분당선 출신 퇴역헌터들이 비례대표로 있긴 한데…… 오빠가 생각하는 ‘믿을 만하다’의 기준이 뭔데요?”

“비밀을 말해주면 입을 다물고 있는 정도?”

“그런 사람 없어요.”

쓰읍. 이걸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군.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호정아. 일단 우리 총선에서 이기는 건 포기하자. 내가 옛날부터 제대로 정치를 한 인간이면 몰라도. 나는 너무 야바위꾼처럼 정치를 했어. 내가 인재가 있니? 돈이 있니? 아예 총선을 끌어나갈 능력이 안 되는 것 같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크흠. 아무튼.”

수긍이 빨라서 좋다고 해야 할지. 믿음을 못 줘서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상당히 민망한 상황이었지만 적어도 내가 잘하는 짓거리가 딱 하나 있었다.

“…….아무튼. 이기는 건 포기하자고.”

이 정도만 말해줘도 녀석은 말뜻을 충분히 알아들은 모양이다. 이호정은 눈썹을 으쓱이더니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 *

“이기지 못할 바에는. 부숴버리겠다고요?”

“바로 그겁니다.”

애초에 국민당은 원옥분이 권한대행하던 시절에 부패한 기득권을 박살내겠다고 만든 신당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소리지만 기득권은 부패한 만큼 노련하고 성숙하다. 즉, 국민당은 정반대다.

게다가 그때는 원옥분 권한대행이랑 국회가 손잡고 나를 감방에 처박으려던 시절이라서, 국민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렇다 할 검증도 없이 급하게 모집한 인사들이었다.

실제로 원옥분이 검찰청 캐비닛을 열자마자 국민당 지도부 12명 중에 11명이 섹스스캔, 마약, 경제사범으로 잡혀간 경력이 있다.

따라서 국민당 국회의원들은 크고 작은 결함들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사정이 워낙 급해서 기스 난 인간도 출마시켜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그때 모아놓은 자료들을 폐기한 건 아닙니다.”

“…….”

“길드. 아니. 그때는 한승문재단인가 뭔가 그거였을 겁니다. 거기 캐비닛에 모셔놓은 자료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요.”

청중엽은 이 자료들에 대해서 알 것이다. 그는 국민당의 창당부터 함께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신수광은 나중에 합류한 인간이었다.

신수광은 정치판 엑스트라였다. 그는 총선이 아니라 대선 무렵에서야 샛별처럼 나타났다. 그러니 국민당의 추악한 실체에 대해 모를 공산이 컸다.

나는 그걸 이용해서 신수광이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릴 작정이었다. 그것도 국민당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감 기자를 찾아왔다.

“이거 받으십쇼.”

“어, 어어어, 싫습니다! 싫어요! 제가 왜 이 자료들을 받습니까!”

“제가 신호하면, 펑-하고 터뜨리면 되는 겁니다. 아는 기자들 많죠? 가급적이면 출처는 모르게 부탁드립니다.”

“아, 싫다니까! 정치하기 싫다고요!”

감 기자는 발악을 했지만 나는 기어코 그의 손에 자료들을 쥐여주었다. 감 기자는 텅 비어버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저는 정치 절대로 안 할 거예요.”

“역시 감 기자님밖에 없습니다.”

“칭찬 안 통합니다.”

“칭찬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감 기자님 빼면 저 주말에 같이 밥 먹을 사람이 각하 아니면 채원이 뿐이에요.”

갑자기 인생에 회의감이 들어서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감 기자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 아니, 그나저나 이 험악한 자료들은 왜 여태까지 가지고 계신 겁니까?”

“그게, 아시겠지만 제가 양판석 의원님한테 정치를 배우지 않았습니까?”

양판석이 처음부터 나를 정치 꿈나무로 키워준 건 아니었지만, 내가 써먹는 대부분의 잡기술들은 그 양반 어깨 너머로 배운 것들이었다.

그리고 양판석은 몇 가지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사람이었다. 본인만의 선이 굉장히 선명한 양반이다.

가급적이면 적을 만들지 않고. 적이 생기면 무조건 처단하고, 권력으로 비리는 저질러도 사람을 해치지는 않으며,

“……그 양반. 사람 쓸 때는 무조건 폭탄 하나 박아넣고 씁니다.”

* * *

신수광을 위해 준비한 폭탄의 구조는 간단했다.

일단 호구처럼 공천권과 당권을 넘긴다. 그러면 우리 사람들이 알아서 그 양반한테 달라붙을 것이었다.

신수광이도 국민당을 홀라당 삼키기 위해 국회의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할 것이었고 말이다. 그러면 비대위원장으로서 총선캠프를 차지하고 감투를 뿌리기 시작하겠지.

그렇게 암세포 같은 국회의원들이 서서히 섞여들어 가기 시작한다면, 국민당 총선캠프는 거대한 암덩어리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총선이 시작되면 자료를 터뜨린다.

물론 몇 년 전에 모아놓은 낡은 자료로 현역의원들을 날려 버리는 건 너무 희망적인 소리였다. 하지만 국민당 총선을 말아먹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선거 망하면 지도부가 책임지는 것이 우리네 정치판 전통이었다. 그 모든 피해는 결국 비대위원장인 신수광이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흐음…….”

그러나 돌발변수가 너무 많은 계획이다.

그리고 국민당이 선거에서 질 거라는 예상도 충분히 가능한 시점이었고, 신수광이가 여기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놓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었다.

즉, 국민당 내부의 조력자가 필요했다. 신수광이 폭탄의 살상범위에 예쁘게 들어가도록 조종해 줄 사람이 말이다.

하지만 이호정은 너무 눈에 띄는 위치였고, 나는 국회 바깥에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조력자를 구하려고 발품을 팔 필요는 없었다.

조력자는 제 발로 찾아 걸어왔다.

“한승문 장관님. 그간 잘 지내셨지요? 하하!”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청중엽 지사님.”

제주도지사 청중엽. 제주도 재벌들의 로비스트이자 대한민국의 지방영주.

수만 명의 팬클럽을 거느린 미중년은, 특유의 호탕한 미소를 지으며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눈빛으로 그를 맞이했다.

“아니, 날씨도 추운데 이게 어쩐 일이십니까?”

“하하. 요즘 음해공작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구태문화는 빨리 사라져야 할 텐데요.”

청중엽과는 장기밀매 건으로 서로의 추잡한 면모까지 들여다본 사이였으니, 거추장스러운 인사치레는 그쯤이면 충분했다.

청중엽은 내가 신수광이에게 인간폭탄을 던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요즘 국민당 총선캠프에 사람을 지원해주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수광 비대위원장에게 큰 힘이 되겠어요.”

“다 똑같은 의원인데 누가 누굴 보내겠습니까? 그냥 제 발로 가는 거죠. 아이고. 저는 이제 의원도 아닌데. 참.”

“하하! 누가 장관님더러 그냥 야인이라고 하겠습니까? 그 정도 도량이 있으면 그때부터는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는 생각보다 노골적인 어투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이거, 들고 계신 거에 보태시죠.”

그는 내게 서류봉투를 하나 건넸다. 봉투에는 커다랗게 인쇄된 사진들이나, 자필로 쓰여진 편지 등이 존재했다.

그건 내 계획을 바꿔 버릴 정도의 물건이었다.

“……이거 어디서 났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재벌들의 눈을 피할 사람은 없습니다.”

게이트 사태 초기.

사회가 무너진 서울에서 약탈과 강도를 저지른 사람은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당시의 범죄자들은 별다른 처벌 없이 구출되어 사회에 합류했다.

그게 수도권 피난민들과 빈민층에 대한 차별을 불러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였지만, 현재 극심한 과도기를 앓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그리 주목되지 않는 문제였다.

무엇보다 범법자를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피난민 누구나 편의점에서 물건 훔쳐본 경험은 있을뿐더러, 살기 위해 범법을 저질러야 하는 상황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수광이 아들내미가 약탈 범죄자였고, 범죄자 패거리가 적잖게 난민캠프 대가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잠시 침묵으로 충격을 삭이고 있으니. 청중엽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걸었다.

“신수광 비대위원장이 괴수에게 딸을 잃어서 그런지, 하나 남은 아들은 많이 애지중지하는 모양입니다. 군인 신분일 텐데도 이런저런 편의를 많이 봐주더군요.”

“……양판석 대통령이 신수광이를 대선 때 써먹은 이유가 있었군요.”

“호오. 그게 그렇게 되나요? 이거 좀 충격인데요.”

봉투에는 시체가 찍힌 사진도 섞여 있었다.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봉투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청중엽에게 이야기했다.

“……이걸 왜 저한테 가져오냐는 이야기는 안 하겠습니다. 뭘 원하시는 겁니까?”

“하하. 역시 장관님과는 말씀 나누기가 참 편합니다. 젊어서 그런가요?”

“지사님.”

“아, 다름이 아니라…….”

청중엽이 살풋 미소 지었다.

“이번 총선 끝나면 신수광 비대위원장은 아마 없어질 것 같은데. 사실 제가 당대표 선거에 도전할 의향이 있습니다.”

“……제주도지사 신분으로요?”

“3선 연임 제한에 걸리는 바람에 다음 지방선거가 어려울 것 같아서요. 슬슬 중앙정계 쪽으로 진로를 결정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하.”

“아, 네. 그렇다면야 응원해드려야죠.”

내가 거절할 이유는 딱히 없는 제안이었다. 어차피 차기 당대표로 밀어줄 사람도 없는 실정이었으니까.

그러나 다시 말하면, 이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 청중엽이 내게 부탁할만한 일이 못 된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청중엽은 물 흐르듯 말을 이어갔다. 또 다른 제안이었다.

“아, 그리고, 이번에 제주도에서 전경련 회합이 열립니다. 새로 회장을 뽑는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삼성에서 가져갈 것 같아요. 그래서 별다른 싸움 없이 무난한 파티 분위기일 것 같습니다. 혹시 참석하실 의향이 있으신지……?”

“……거기 재벌들 모이는데 아닙니까?”

“하하! 전국 경제인 연합회 아닙니까. 나라살림에 뜻있는 분들이 의견 나누는 곳이지. 무슨 재산이 삼천억 넘어야 들어가는 곳은 아닙니다. 그런데 나라살림을 논하는데 초상관리부 장관을 빼먹을 수가 있나요. 그쪽에서 정중하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기성 재벌들과 화해하자는 소리였다. 내가 장전읍에서 때려잡았던 그 양반들 말이다.

당연히 썩 내키지 않는 일이라 인상을 살짝 찌푸리니, 청중엽이 자연스럽게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장전읍 사건 때문에 염려하시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때 여러 사람 밀려난 덕분에 자리 차지한 사람들이 꽤 많거든요. 그 사람들에게는 장관님이 영웅입니다. 영웅.”

“…….”

“이번에 GS 그룹 천사장도 모처럼 시간 내준다고 하더군요. 드디어 옛날 재벌들과 신재벌들이 화합하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도 이제 안정기 아닙니까? 장관님께서 쓰라린 과거를 청산해주신 덕분에 이제야 화합의 장이 마련된…….”

“아아, 알겠습니다. 저도 머리가 그렇게까지 굳은 사람은 아닙니다. 적당히 타협하지요.”

“그거 참 기꺼운 말씀이십니다. 하하!”

나는 청중엽과 손잡고 신수광이를 보내버리기로 약속하고서, 조만간 재벌들과 화해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정경유착을 죄처럼 생각하는 인간도 아니고.

덕분에 청중엽은 후련하게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조만간 당대표 해먹을 생각에 신이 난 모양이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하!”

“아, 예. 살펴 가십쇼.”

그렇게 청중엽 지사가 돌아갔다. 나는 긴장을 풀고 의자에 늘어졌다. 너무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을 추진시켜서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대로 진행되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나와 내 주변 인간들이 무사할 수 있다.

막중한 중압감에 가슴이 답답했지만 호주에서 700만 명의 목숨을 걸고 도박하던 시절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다. 사람이 이렇게 성장하는 건가 싶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모처럼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하아…….”

그렇게 일단 한 놈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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