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0 - 이게 다 한승문 때문이다 (3)
「대한민국이 세계의 경찰이 되어야 한다? 우리보다 어려운 국가들을 도와야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대학도 못 나온지라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머리가 나쁠지언정, 이 두 눈만은 똑똑히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추운 겨울에 폐지를 줍고 다녀야 하는 우리 국민들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 신수광이는 오직 국민만 보고 가겠습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가장 근본만을 챙기겠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근본은 우리 국민들임을 굳게 믿겠습니다!」
신수광의 행보는 참으로 대담했다.
내 지침을 받은 이호정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마자 국민당 선대위를 장악하고, 공천권을 휘두르며 범여권 의원들에 대한 컷오프를 천명한 것이다.
덕분에 국민당 당권은 신수광 비대위원장에게 넘어갔고, 선거캠프의 요직은 경인권 피난민캠프 출신들이 독식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예 나더러 세금도둑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서는, 신나게 이빨을 까며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있었다.
「한때 장관까지 했던 인사가 혈세를 해외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이 왕위라도 승계하듯이 권력을 남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나라입니까? 이게 민주주의입니까?」
나날이 계속되는 파격발언 덕분에 뉴스포털은 신수광의 얼굴로 도배되었다. 당연히 강경노선에 반대하는 지지층은 점차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신수광의 코어 지지층은 어차피 수도권 피난민들이었고, 그들은 대략 1천만 명을 상회하는 주류계층이었다.
따라서 통계적인 수치는 낮아졌지만, 실제 바닥민심은 점차 신수광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내가 노리던 지점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원래 기대할수록 실망이 커지는 법이다.
그리고 민심이 극도에 도달하는 시기는 선거 직전이다. 그래서 원래는 몇 달간 신나게 놀도록 놔둔 다음에, 선거 직전에 날려 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청중엽 제주지사는 생각보다 몸이 달아오른 모양이었다.
「국민당 인재영입위원장 정우섭. 약탈강도 혐의로 파문.」
* * *
“국민당 인재영입위원장 정우섭. 약탈강도 혐의로 파문…….”
양일호가 초상관리부 장관 노릇을 해먹은 지 반년 정도가 지났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녀석도 이제는 원숙한 정치인 티가 났다.
“……이거 누구 작품이에요?”
“청중엽.”
“어쩐지 조중동에서 때리더라…….”
청중엽은 본격적으로 신수광에 대한 공세에 들어갔다.
아직은 측근을 건드리는 수준이었지만, 조만간 융단폭격을 갈기며 신수광을 끌어내릴 것이 분명했다.
대충 신수광을 일찌감치 정리한 다음에 이번 총선의 구원투수로 나서겠다는 심보가 보였다. 그래야 나중에 당대표 해먹기도 편하겠지.
어쨌든 청중엽이 권력을 위해 망나니를 자처했으니, 내게도 그리 나쁜 점은 없었다.
“이제 유재경이랑 원옥분만 남았군.”
“……괜찮겠어요?”
“뭐가.”
“아니, 체급이 좀 다르잖아요…….”
양일호의 말이 정확했다. 비단 정치적인 체급을 뜻하는 게 아니다. 기반세력의 체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록 신수광이가 1천만 국민의 지지를 받는 스타 정치인이기는 했지만, 대통령 선거 나가는 게 아닌 이상에야 전국적인 지지율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물며 신수광의 홈그라운드는 국회였다. 그리고 지금의 국회는 식물국회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권위가 부족한 기관이었다.
양일호가 그 점을 지적했다.
“……보통 식물국회라고 그러잖아요. 여당이랑 야당이랑 싸워가지고 일을 못 한다고.”
“그렇지.”
“그런데 지금은 여당이랑 야당이랑 아예 안 싸우니까 국회가 진짜 식물인간이 됐어요.”
대한민국 국회에게는 강력한 권능이 있었다. 탄핵, 청문회, 국정조사, 등, 하나하나가 정권을 엎어버릴 수도 있는 권한들이다.
그러나 여당이 뭘 하려고 하면 야당이 막아 세우는 게 보통이라 그 힘은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따라서 국회의 진정한 힘은 사회적 이슈를 선점하는 것이었다.
대충 어떤 부분에서 시비가 붙으면 그 소식이 대한민국 전체를 휘두르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이 요동치기 시작하면 그제야 정부, 검찰, 언론이 움직인다.
그게 국회가 대한민국을 휘두르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연립정권이라 여야 간 싸움이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그래. 국회는 정부에서 보내는 법안만 통과시키는 거수기가 된 거지.”
양판석이 대체 어디까지 내다봤던 건지는 몰라도, 내가 초상관리부 장관에 임명된 순간부터 국회는 반병신 신세가 된 거였다.
국회에서 싸움이 없으니 국회는 모든 원동력을 상실했다. 기껏해야 가끔 누가 사고 치면 기자들 불러다가 호통이나 쳤지, 실제로는 손발이 꽁꽁 묶여 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런 상황을 타개할 정객조차 없었다. 대부분의 국회의원이 이제 막 정계에 입문한 초짜들인데, 누가 감히 막강한 연립정부에게 태클을 걸겠는가.
그나마 국방당에는 보수-진보정당에서 활동하던 기성 정치인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양판석과 원옥분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인간들이다.
따라서. 신수광이 아무리 국회에서 잘나가더라도, 실제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원옥분은 달라요.”
양일호가 말을 덧붙였다.
“검찰을 끼고 있잖아요. 그 할머니가 대통령 권한대행하던 시절에 우리가 얼마나 벌벌 떨었는지 기억 안 나세요?”
“당연히 기억 나지…….”
“그리고 유재경 총리도 맨날 눈치 보면서 이리저리 치이고 다니기는 해도. 현장 공무원이나 관료들은 전부 그 사람 지지해요. 일을 잘하잖아. 그 아저씨 대선주자로 거론되면서 점점 정부청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니까요?”
“그래. 나도 거기서 일했는데. 내가 그걸 모르겠니?”
“근데 왜 그 사람들한테 시비를 거냐고요!”
“…….”
이호정은 가끔가다 보면 너무 막 나가서 문제인데, 양일호 이 녀석은 담이 너무 작은 것 같아서 걱정이다.
아무튼 양일호가 비록 새가슴을 부여잡고 징징대고 있기는 했지만, 사법시험을 가볍게 통과한 놈답게 정확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녀석의 말처럼, 유재경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차재균, 원옥분, 양판석.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살아남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는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대한민국 행정부를 관리했다.
물론 그가 불세출의 경제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최고위 관료들을 다루는 능력은 유재경을 따라올 인간이 없었다.
“그 양반이 공무원 팔모가지 비트는 건 선수긴 하지…….”
“그렇죠? 본인부터가 뼛속까지 공무원이라니까요?”
행정의 기본은 돈이다. 그리고 유재경은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출신이다. 따라서 그는 대한민국 정부라는 거대한 기계를 톱니바퀴 하나까지 꿰뚫고 있었다.
그는 서류 한 장으로 삼라만상을 들여다보며, 잉크 냄새만 맡아도 누가 개수작을 부렸는지 알아채는 동물적인 행정가였다.
게다가 본인부터가 강자에게 관대하고 약자에게 엄격한 인물이었던지라, 아랫사람 빡세게 굴리는 건 유재경만 한 인물이 없었다.
어쩌면 나와 정반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는 임기응변으로 잔대가리는 잘 굴렸지만, 유재경처럼 행정능력이 뛰어나지는 못했으니까.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다.
“일호야, 유재경 총리 너무 얕보지 마라. 그 아저씨도 할 때는 하는 양반이야.”
“……그거 뭔 뜻이에요?”
뭔 뜻이긴 뭔 뜻이야.
“우리가 등을 툭- 하고 밀어주면. 원옥분도 이길지 모른다. 이거지.”
* * *
「靑, 총선 앞두고 개각 고심, 국무총리 김두식 유력」
「유재경 총리 낙마! 총선 차출인가 실각인가?」
「‘살림꾼’ 유 총리 후임으로 ‘명장’ 김두식 낙점!?」
여론이 요동치고 있었다. 인터넷 뉴스가 수백 개씩 쏟아졌다. 핸드폰을 든 손이 파르르 떨려오기 시작했다.
유재경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이게 헛것인가 싶어 눈을 핸드폰 화면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
동시에 수십 통의 전화가 몰려오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헛것은 아닌 모양이다. 유재경은 알림을 옆으로 밀며 전화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기획재정부 김 차관.
넘기고.
국무조정실 박 실장.
넘기고.
공정거래위원회 조 위원장.
넘기고.
유재경이 가장 먼저 받아든 건 유재영의 연락이었다.
“……어, 딸.”
-아빠!
유재영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김두식 사령관이 국무총리로? 알고 계셨어요?
“어어, 괜찮다. 괜찮아. VIP한테 미리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예상은 했다. 각성제 해외지원 문제로 걸고넘어질 때부터 찍히는 건 당연한 거지. 그렇게 놀랄 필요도 없어.”
-이, 일단 한승문 의원실은 해체되긴 했는데, 그래도 제가 연설비서관 비스무리한 상태로 있거든요? 한승문 본인이나 피채원 비서관이 청와대랑 접촉한 적은 전혀 없어요!
“그래. 고맙다. 아빠는 다른 아저씨들 만나서 회의 좀 해볼게.”
유재경은 가족과의 연락을 마치고, 그제야 측근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굉장히 여유롭고 대범한 모습이었다.
“어어, 김 차관. 그렇게 담이 작아서야 어쩌려고 그래? 대한민국에 우리 김 차관 말고 경제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 내가 김두식 장군이랑 친한 거 알지? 어쩌면 장관도 노려볼 수 있을 테니까 얌전히 있어.”
“박 실장. 많이 놀랐겠어요? 아니라고? 허허, 내가 박 실장 성격을 아는데. 거, 참. 그래요. 아무튼 내가 김두식 장군이랑 옛날부터 친분이 두터우니까. 새로 들어오시면 청와대 일 잘 알려주고 그래요. 내가 좋게 말해둘 테니.”
“조 위원장이 우려하는 바는 잘 압니다. 다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어쩌면 이번 기회에 관료생활 청산하고 국회에 나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길은 잘 터줄 테니까. 이번에 한 번 크게 능력 써보자고. 하하.”
유재경의 측근들은 대부분 고위 관료들이었다. 심지어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높았다. 따라서 국무총리가 바뀌자마자 모가지가 날아갈 확률도 높았다.
하지만 유재경은 든든한 모습으로 그들의 밥그릇을 지켜주겠노라 호언장담했고, 그것으로 불안에 떠는 측근들을 달래기에는 충분했다. 그게 유재경이라는 사람이 가진 능력이었다.
문제는 정작 본인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X됐다…….’
이제 핸드폰은 더 이상 진동하지 않았지만, 유재경의 동공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보스가 밥그릇을 챙겨주지 못하는 순간 개들은 새 주인을 찾아 떠나간다. 유재경은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불안에 벌벌 떨고 있었다.
결국,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승문 의원님.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총리님? 아니, 이 시간에 어쩐 일로-
무슨 일이 터지면 열에 아홉은 이놈 때문이었다. 일단 한승문을 털어보면 뭐라도 나올 것이라는 게 유재경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대화가 영 아리송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우리 불만 있으면 대화로 풉시다. 이건 너무 폭력적인 방식 아닙니까. 정권심판론 좀 써먹었다고 사람을 직장에서 짤라 버리면 처자식은 어떻게 먹여 살리라는…….”
-아, 아뇨, 저도 VIP랑 연락이…….
“각성제 지원 문제로 트집 잡았던 거……! 내가 미안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마음이 아파요. 국무총리라는 양반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발목을…….”
-그게 아니라, 총리님. 정말로 저도 각하랑 연락이 일절 없었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한 의원님이랑 각하가 얼마나 각별한 사이인지 내가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풉시다. 혹시 내가 그간 섭섭하게 굴었다면. 이번 기회에 경청하고 고치겠…….”
-아, 진짜로 아니라니까요!
유재경이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딸내미도 아니라고 하고. 온갖 이동통신사에 심어놓은 정보원들도 한승문이 수상한 연락을 취한 적이 없다고 보고해 왔다.
그러나 한승문과 양판석이 매번 쿵짝을 맞추는 게 한두 번이었던가? 원래 숙련된 정치인은 기본적으로 텔레파시를 사용하는 짐승들이었다.
하지만 한승문의 목소리가 유재경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유재경은 제정신을 차리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제가 왜 유재경 총리님을 견제하겠습니까? 저 대통령 하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그거 해먹고 싶었으면 장전읍 절대로 안 건드렸죠. 남들은 몰라도 총리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어디 대통령 하겠다고 설칠 인간입니까?
“아, 아니죠, 물론, 아니죠…….”
-그러면 누가 김두식 사령관을 국무총리로 만들었겠습니까?
유재경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고, 덕분에 그 질문을 듣자마자 정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서울 방어선이 무너졌을 때, 일개 소장에 불과하던 김두식에게 전권을 위임한 게 누구인지.
김두식 사령관을 지금의 위치로 끌어올린 게 누구인지. 그래서 김두식 사령관이 조명될수록 이득을 보는 게 과연 누구인지.
그걸 떠올린 순간,
파르르 경련하던 유재경의 손이 멈췄다.
“……원옥분.”
* * *
「-이에 저 유재경은, 기나긴 공직생활의 끝에 국민의 목소리를 받들기로 했습니다.」
「경제, 살리겠습니다. 정치인들이 허언으로 더럽힌 약속을 처음으로 실현하겠습니다. 그게 이 시대가 저에게 맡긴 사명이라고……」
화면 속 유재경이 비장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언뜻 보면 총선이 아니라 대선에 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자세히 따지고 보면 그게 그거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유재경의 몸집이 커질수록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TV를 시청하고 있으니, 피채원이 다가와 여론조사를 읊어 주었다.
“……유재경 총리의 지지율이 처음으로 원옥분 지사를 따라잡았다네요. 오차범위 이내긴 하지만요.”
“거봐. 한다면 하는 양반이잖아.”
입가에 저절로 웃음꽃이 피어난다.
유재경의 지지율은 절대로 원옥분과 비등비등한 수준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조만간 청중엽이 신수광을 날려 버릴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신수광이 날아간다면 그 지지자들은 어떻게 될까? 수도권 피난민들의 최대 이슈는 ‘경제’다. 그들을 흡수한 유재경의 지지율은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원옥분이 자신을 추월한 대선주자를 가만히 놔둘까? 그리고 원옥분 밑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국회의 구렁이들은, 모처럼 들어온 싱싱한 대선주자를 가만히 놔둘까?
“……벌써 겨울이네.”
올해 하반기 뉴스는 유독 시끄러울 것 같았다.
EP 30
이게 다 한승문 때문이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