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97화 (197/296)

EP 28 - 초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2)

화르륵-!

갈라진 대지에서 솟아난 화염이 뱀처럼 흑사의 목덜미를 물었다. 크기는 비교적 작았으나 열기는 비할 바 없었다.

캬아아아아악-!

뱀의 짝짓기처럼 두 마리 뱀이 뒤엉키고 또 뒤엉켰다. 그리고 거칠게 몸부림쳤다.

쿨럭, 턱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뚝 뚝 떨어져 모래를 적신다.

쉬익- 쉬이이익-

바람에 모래가 스치는 소리인지, 뱀이 우는 소리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뱀울음이 폭풍 속에 메아리쳤다.

눈을 감으면 붉은 뱀눈초리가 보이고, 눈을 뜨면 거대한 아가리가 보인다. 땅, 하늘, 바람, 모든 것이 괴수의 영역이었다.

그때, 괴수의 거대한 꼬리가 그녀를 덮쳐왔다.

“……!”

그녀의 몸이 불꽃처럼 사라졌다. 짧은 순간이동으로 회피한 것이다.

그러나 그 ‘꼬리 내려치기’는 운석 충돌과 비슷한 효과를 냈다.

쿠우우우웅 -!

거대한 충격파가 홍선아를 날려보냈다.

그녀는 사막 위에서 네다섯번 구르며 모래사장에 처박혔다. 그러니 이번에는 다시 괴수의 아가리가 덮쳐온다.

“크흐윽……!”

숨 돌릴 틈도 없이 점멸을 사용했으나, 입에서는 이미 피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다.

흩날리는 모래가루에 찢긴 동공에서도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결국 홍선아는 피눈물, 코피, 각혈을 토해내며 상반신을 핏물로 물들이고야 말았다.

괴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잠시나마 괴수의 시야에서 벗어난 그녀에게, 다시 공격의 차례가 돌아왔다.

“죽어……!”

마녀가 괴수를 저주했다.

광기에 찬 눈빛에서 피고름이 흘러내린다.

화르륵-!

괴수의 몸통에 듬성듬성 드러난 모든 상처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물경 수천 개의 도깨비불이 동시에 피어오른 것과 다름없었지만, 회광반조의 상태에 들어선 초인의 발악이 이를 가능케 했다.

쿨럭, 초인이 각혈하고, 괴수가 고통에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친다.

샤아아아아악-!

검은 뱀의 비명이 바람을 갈랐다.

괴수가 그녀를 본다. 그녀도 괴수를 본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대체…… 왜…….”

전투헬기의 상공영상으로 현장을 지켜보던 통신병의 입에서 의문이 새어 나왔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싸운단 말인가.

눈, 코,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모습은 영웅이라기보다는 중환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보는 이가 저절로 섬뜩해진다.

가장 기이한 점은 이것이다.

홍선아는 피칠갑을 한 채로 웃고 있었다. 통신병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현장을 관찰하는 가운데, 중장이 심드렁히 질문한다.

“헌터는 어떻게 됐지?”

“아직…… 분투 중입니다.”

“와이즈힐 대피 현황은?”

“괴수의 난동 때문에 지진피해가 큽니다. 규모 7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고 있는지라, 대피가 굉장히 늦어지고 있습니다.”

“……대피가 늦어져?”

“대부분의 주민들이 차량도 기름도 없이 도보로 대피하는데다가, 지진까지 겹쳤습니다. 이대로 핵무기가 투입된다면 와이즈힐 전역이 휘말립니다.”

“……그래. 알겠네.”

호주군 사령부는 그나마 침착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들 대부분이 베테랑이었고, 무엇보다 허버트 중장이 현장을 휘어잡았기 때문이었다.

“저놈 상대로 방어선 구축은 의미가 없다. 후방으로 돌아오겠다는 모든 사단에게 전해라. 큰 놈 하나보다 개미떼 수백만이 더 무섭다고.”

“전투헬기라도 보내서 제공권 확보해. 원폭기 편대가 눈먼 괴수에게 부딪힌다면, 그때는 정말로 모든 게 끝나는 거다.”

“경찰이 와이즈힐 대피를 돕겠다고? 이미 늦었다. 기름낭비하지 말고 퍼스 치안이나 유지해라. 어차피 여기에서 못 막으면 다 죽는다.”

그의 명령은 윤리적 측면을 떠나 효율적이었고, 그는 책임을 회피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정부 측에서도 노골적으로 모든 책임을 한 사람에게 덮어씌웠다. 공군 사령부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다.

그러던 도중, 악재가 전해져왔다.

“주, 중장님! 기사회가 출격했답니다!”

“뭐? 대체 어떻게!?”

“그쪽에서 조종사를 구한 모양입니다……!”

본디 수송기가 뜨려면 전투기 편대가 동행해야 했다. 그래야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되고, 그마저도 완전하지 못한 마당이다.

그러나 기사회는 고작 수송기 한 대로 이 위험지역을 가로질렀다. 그것도 온갖 곡예비행을 서슴지 않으면서 말이다.

물론 운전대는 감기자가 잡았다.

“앞에 괴수 있습니다! 다들 꽉 잡으십쇼!”

“으아아아!”

“르윈! 염동력으로 비행기를 미십시오! 마예드! 상승기류를 만들어요! 나는 배리어로 괴수를 막겠습니다!”

거기에 온갖 초상능력으로 수송기를 가속시키고 있었으니, 그들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되어 호주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어차피 유럽에서 이런 경험이 아예 없지는 않았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오스트레일리아 사령부 입장에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젠장……!”

기사회가 참전한다면 핵무기 사용에 커다란 차질이 생긴다. 게다가 그들이 괴수를 잡는데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결국 호주 국민 300만의 목숨은 그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중장은 그런 불확실한 도박을 할 생각이 없었다.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었으니.

“원폭기……! 원폭기는 어디쯤인가!”

“자, 잠시 통신이 불확실한 상황인지라……!”

원폭기 편대가 먼저 도착하느냐. 아니면 기사회가 먼저 도착하느냐. 호주의 운명이 하늘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먼저 도착한 비행기는 낙하산이 아니라 폭탄을 떨어뜨렸다.

전술핵이었다.

* * *

사실, 괴수와 싸운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가장 큰 적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 고문과도 같은 악전고투의 와중에도. 어느 순간 화염이 그녀를 덮쳤을 때도.

그녀는 도망칠 수 있었다.

“…….”

순간이동으로 괴수의 공격을 피하는 게 아니라, 괴수에게서 도망치면 해결되는 일이다. 싸워야 할 의미도, 의리도, 의지도 없다.

그러니 한국으로 돌아가 한승문의 정책에 도장이나 찍으며 권력과 부를 누리고, 이런 생지옥 따위 8시 뉴스 밑단으로 흘려보내면 된다.

다만 그러지 못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

오직 질문 하나가 머리를 떠돈다.

왜 싸우는가.

노인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 누군가 도와주러 올 것이라는 것을 믿어서?

아니. 그런 생각은 없다.

지금 그녀를 지배하는 것은 김춘식의 그림자다. 오직 한 사람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그녀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그를 이해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한 사람을 향한 애증과 순정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게 전부다.

그러니 다만 바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크흐……!”

왜 싸워야 하는가.

지워지지 않는 질문 속에 정답은 이미 존재했다. 김춘식이었다면 싸웠을 것이다. 상쾌하게 웃으며 전장으로 몸을 던졌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게이트 속으로 사라졌다.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남긴 말 한마디.

‘네가 해라.’

대체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우스운 쫄쫄이를 입고 지구를 구해야 하나? 그러지는 못했지만 나름 노력은 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아귀들의 소굴이었다.

인류의 희망이라고 불리던 오스트레일리아는 며칠 만에 정치세력들에게 잊혀진 애물단지가 되었다.

정치가들은 700만 명의 목숨보다 다음 선거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언론은 피와 눈물로 기사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대중은 민족과 국가라는 허울 속에 갇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인간은 멸망 앞에서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못했다.

우스운 일이다.

“크흐흐……!”

그가 고작 이 따위 세상을 지키기 위해 죽었단 말인가?

어린 고아들을 데려다가 세뇌하겠다는데도 대안이 없어서 침묵해야 하고, 그깟 각성제가 아쉬워서 700만의 목숨을 투표까지 해가면서 죽여 버리려고 하는 이 따위 세상을?

인정할 수 없다.

“……당신.”

당신도 초인은 아니었다. 평생 동안 전쟁터에서 태워 죽인 갓난아기를 두려워했고, 그 속죄 때문에 여러 사람을 지옥불로 끌고 들어갔다.

결국은, 자기 맘대로 살다 간 인간이다.

그래. 마음대로.

이익도, 도리도, 국가의 영광도 아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었다. 입장, 처지, 선線, 그것을 허물어야 마음이 통한다.

세상이 그것을 부정한다면 내가 그것을 옳게 만들겠다. 오직 그 심정으로 죽음 앞에 서 있다. 그러니 당신의 불꽃은 누군가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당신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당신의 꿈은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 그래서 내가 당신의 의미가 되기로 했다.

“……!”

당신은 죽어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항상 당신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망설임 없이 위험에 뛰어들던 푸른 눈동자. 한없는 선함과 정의, 그리고 죄책감으로 불타오르던 그 파란색.

세상이 당신과도 같았다.

그 색채가 푸르게 번져나갔다.

온몸을 녹일 것 같던 뜨거움은 점차 따스함으로 물들었다.

아주 푸르게.

푸르게 물들었다.

* * *

“핵폭발이……. 멈췄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중장이 병사를 밀쳐내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위성영상 속에는 푸른 태양이 있었다.

본디 사방 2㎞를 불태웠어야 하는 핵폭발의 중심에는, 버섯구름 대신 푸른 불꽃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통신병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다행히도 마을은 무사합니다. 퍼져나가던 충격파도 도중에 압축됐고, 화염폭풍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방사능 낙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민들은 대피를 이어가는 것으로 보입-”

“……괴수는, 괴수는!”

중장이 표독스런 목소리로 괴수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괴수는 거대한 용틀임으로 대답했다.

“……!”

검은 뱀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장대한 거구가 요동치며 몸을 배배 꼬았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피가 사막을 적셨다.

그러나. 놈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젠장……!”

혈관으로 기능하는 것 같은 촉수가 꿈틀거리며 상처를 빠르게 재생하는 것이, 위성영상으로도 관측될 정도였다.

그리고 괴수는 머리를 사막에 처박고, 모래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허버트 중장이 소리쳤다.

“……이대로 놓치면 안 돼! 당장 핵폭탄을 추가로 투하해라! 설마 이 멍청한 놈들이 고작 한 개만 싣고 온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원래 요청대로 전술핵 15발을 탑재했고, 현재 14발이 남아 있는 상황…….”

“당장 투하해!”

“하지만 편대가 귀환하고 있습니다!”

“뭐?”

허버트 중장이 통신기를 붙잡고 항의했다.

그리고 다윈 공군기지는 답했다.

아무리 강경하게 나가더라도, WPO 수뇌부를 죽일 수는 없다고 말이다.

* * *

정신을 차리니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다.

“끄으윽…….”

옷이며 살가죽이며 전부 불타버렸다. 군데군데 뼈가 드러난 것 같기도 했다.

눈을 뜨는 것도 눈꺼풀에 말라붙은 진물 때문에 힘들었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근육은 꿈틀거릴 때마다 극도의 고통을 선사했다.

“끄흐윽…… 크흐흐흐……!”

하지만 지금 그녀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광기에 가까운 집념이다.

홍선아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녹아내린 살가죽이 흔들리고, 수포에서 누런 진물이 뚝 뚝 흘러내려도, 결국은 일어서고야 말았다.

그렇게 꿋꿋이 서서, 괴수를 본다.

괴수의 몰골도 자신과 비슷했다.

키에에에에엑-!

머리는 지하로 도망치려 땅을 파냈고, 꼬리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천지사방을 내리쳤다.

그 거대한 질량이 일으키는 파괴력은 가히 압도적이었지만, 멀쩡한 상태의 괴수를 상대했던 그녀가 보기에는 참으로 우스웠다.

“흐으. 크흐흐흐……! 끄흑!”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숨 넘어가는 소리에 가깝긴 했다.

그렇게 세상을 멸망시킬 것 같던 괴수가, 저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도망치려 하다니.

땅을 파내려 안간힘을 쓰던 괴수는 결국 도망을 포기했다. 그리고 가만히 자연회복을 기다리기로 한 모양이다.

상처에서 기생충처럼 튀어나온 촉수가 괴수의 살을 메꾸던 와중, 괴수의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

쿠구구구 -!

상처입은 뱀이 고개를 들었다. 중력조차 견디지 못한 살가죽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뱀의 피가 비처럼 내렸다. 세 쌍의 눈동자에선 붉은 안광이 일렁인다.

“…….”

모래마저도 녹아내린 사막에서 괴수가 입을 벌렸다. 컨테이너 크기의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사냥꾼의 숨통을 끊으려 달려들던 그때.

쿠우우우웅-!

압도적인 질량이 충돌했다.

괴수는 샛노란 장벽에 부딪혔다. 홍선아는 어느새 방어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난데없는 박치기에 충격을 받은 괴수가 고개를 터는 사이, 거대한 뇌전이 괴수의 관자놀이에 직격했다.

파지지지직-!

동시에, 그녀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뿌옇게 보이던 세상이 선명해졌다. 안구의 손상이 치료된 것이다.

손발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새 살이 돋아나고 뼈가 다시 붙었다. 화상으로 인한 수포는 따끔거리며 터져나갔다.

“우욱……!”

검은 피가 한바가지 정도 입으로 왈칵 쏟아지더니, 내장의 고통마저도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아주, 잘 버텨 주셨습니다.”

기사회장. 노아 앤-마리 뤼미에르.

모래마저도 녹아내린 사막에, 그녀가 달려와 홍선아의 뒤편을 지키고 있었다.

그 곁에는 손에 전기를 모으고 있는 다니엘 웰링턴이 있었고, 르윈 슈미트체바가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내가 간다-!”

성기사. 미하일 제호프가 백발을 휘날리며 달려나갔고, 변형계. 마예드 알 무왈리드가 양팔을 촉수로 변형시키며 그 뒤를 따랐다.

그윈 슈미트체바는 강체술사이면서도 미약한 염동술을 응용해 창을 휘두르며 허공을 달려나갔고,

쥬히 빌테르는 파도를 끌어내 불꽃을 진화하는 동시에, 어마어마한 수압의 물대포로 괴수의 상처를 저격했다.

그리고,

기사, 설진운이 칼을 뽑으며 걸어나왔다.

“…….”

“…….”

푸른 검기가 맹렬하게 요동치는 가운데, 뤼미에르에게 부축받던 홍선아와 설진운의 시선이 스친다.

설진운은 피칠갑이 된 홍선아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고, 홍선아는 피식 웃으며 괴수를 향해 턱짓한다.

별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일검一劍.

설진운이 검기를 휘두르자 괴수의 목에서 핏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져내렸다. 이어지는 비명을 타고 그가 괴수를 향해 돌진한다.

홍선아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본다.

그리고 슬쩍 미소 짓는다.

“…….”

망설임 없이 전장으로 향하는 그 뒷모습이, 문득 당신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피웅덩이 속을 바라보니, 당신은 언제나 그렇듯 파란 눈동자로 나를 들여다본다.

그런데 오늘, 거울 속의 당신이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불꽃은, 번지는 거라고.”

* * *

다음 날.

황야의 지평선에서 아침 해가 솟아올랐고,

그 여명을 바라보던 한 여자가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은발이라기보다는 노인의 백발에 가까운 머리카락. 이제 막 화상치료를 마친듯한 울긋불긋한 피부.

그리고 시꺼멓게 말라붙은 핏자국들과, 온갖 흙먼지와 잿가루로 범벅이 된 모습으로 말이다.

그러나,

푸른 마력으로 불타오르는 그녀의 눈동자와. 해맑게 뒤돌아 웃음 짓는 그 모습이, 아침햇살을 등진 찬란한 그 미소가.

그토록 아름다웠다.

SIDE EP - 촬영중이라고 말했잖아요

수송기에서 내린 감기자가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지진이 조금 심하긴 한데…….”

삼각대를 세우니 카메라가 너무 흔들려서 촬영이 안 된다. 그냥 어깨에 들쳐매고 인간 자이로스코프가 되기로 했다.

어이쿠. 옆에서 총폭탄 터질때도 카메라 붙잡던 가락이 있어서 그런지, 나름대로 화면발이 잘 받는다.

“오케이. 준비 끝!”

준비물이 전부 갖춰졌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탁 트인 지평선. 서부영화에서 떼어놓은듯한 석양. 그리고…….

캬아아아아악 -!

“야! 막아! 막아 저거!”

“뤼미에르 오더 똑바로 안 해!?”

“아, 이게 다 작전입니다!”

미쳐 날뛰는 거대괴수! 그리고 영웅들!

* * *

“미하일! 도발!”

“글쎄, 포켓몬처럼 명령하지 말라니까!”

뤼미에르가 빛덩이를 쏘아보내자, 미하일이 망치 옆면으로 빛을 반사시켜 괴수의 눈에 비추었다. 곡예에 가까운 호흡이었다.

이는 ‘OME’라는 은어로 불리는 탱커의 기술이다. 괴수가 그를 향해 돌진하자 미하일은 망치를 휘두르며 공격을 피해냈다.

“제기랄……! 마예드! 이놈 딱 잡아라!”

“이미 잡았다.”

그 틈에 마예드의 촉수가 컨테이너만한 송곳니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괴수의 머리가 잠시 균형을 잃을 정도다.

콰직! 곧이어 미하일의 망치가 괴수의 송곳니를 박살냈다.

크아아아악 -!

끔찍한 고통. 괴수가 고통스레 울부짖는다. 그리고 미하일을 향해 증오스런 눈빛을 보내며 달려든다.

“좋아……! 여기다! 여기!”

그렇게 탱커가 성공적으로 어그로를 끄는 사이, 그윈 슈미트체바가 날쎄게 돌아다니며 괴수의 몸통에서 화상이 가장 심한 부위를 파악했다.

“정찰 끝났습니다! 이쪽이에요!”

다니엘 웰링턴과 쥬히 빌테르가 그곳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쥬히가 커다란 물줄기를 쏘아보내 환부를 흠뻑 적셨다.

그러자 다니엘이 씨익 웃으며 고무장갑을 벗어던진다.

“좋아. 다 차려진 밥상이구만…….”

이윽고, 거대한 뇌전이 괴수의 상처를 파고들었다. 괴수의 살점은 시꺼멓게 타올랐고, 괴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허리를 비틀었다.

괴수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자 접근한 헌터들이 전부 물러섰으나, 공중에서 대기하던 르윈 슈미트체바와 설진운은 예외다.

그들은 다니엘이 지져놓은 상처를 노리고 있었다.

“하여튼 바싹바싹하게도 구워놨네…….”

“준비하시죠.”

“딱딱하기는. 알았어.”

르윈이 가볍게 괴수의 꼬리를 피하고 위치를 잡는다. 그리고 괴수의 상처 위에서 설진운을 툭 놓았다.

허공에서 낙하하는 설진운이 정신을 집중한다.

그리고

“……!”

일섬一閃.

푸른 섬광이 번뜩이자, 괴수의 몸통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설진운의 발이 지상에 닿기도 전에, 르윈이 잽싸게 날아와 그를 낚아채고 재빨리 후퇴했다. 요동치는 괴수의 몸통 사이로 아슬아슬한 곡예비행이 이어졌다.

캬아아아아악 -!

괴수가 고통에 차 비명지르며 입을 벌리니, 그 속으로 푸른 불덩어리가 쑤욱 들어간다.

불꽃은 꺼지지도 않고 식도에서 한참이나 괴수를 괴롭힌 다음에야 사그라들었다.

“크흐흐……!”

살거죽이 다 벗겨져 바싹 익은 고깃덩어리에 가까웠던 홍선아가, 어느새 멀쩡한 모습으로 능력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저어 멀리 절벽 위에서 촬영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케이. 그림 좋고…….”

감기자가 헌터들의 사냥을 보며 감탄했다. 그는 커다란 방송용 카메라를 들고 있다. 진즉 작정하고 챙겨온 물건이었다.

헌터들의 협공으로 괴수의 몸뚱아리가 반으로 갈라지고, 사막에 요동치는 뱀의 몸부림이 대지를 진동시켰다.

게다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석양은 서부영화에서나 볼법한 모습이었으니, 헌터들의 전투는 한층 박진감 있게 그려졌다.

그때. 괴수의 머리에 거대한 충격파가 가해졌다.

파아아아앙-!

어찌나 강력한지 충격파가 여기까지 전해져온다.

“어이쿠!”

괴수의 두개골이 찌그러지며 보통 짐승은 죽었을만한 상처가 생겼다. 금방 다시 회복하기는 했지만 괴수는 어지럼증에 고개를 비틀거린다.

그러나, 헌터들이 당황하는 것을 보니 예상치 못한 변수인 모양이다. 감기자도 같이 놀라서 중얼거렸다.

“저건……?”

“지윤이가 합류한 모양이군요.”

대답은 뒤쪽에서 들려왔다.

감기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한 의원님?! 여긴 어떻게……?”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이네요.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

“저야 뭐……. 촬영하고 있습죠.”

감기자가 뻘쭘하게 웃는다.

나는 피곤한 기색으로 앞선 질문에 대답했다.

“……저는 지윤이 데리고 사태 터지자마자 비행기 탔습니다. 거의 염력으로 기체를 던지다시피 날아왔지요.”

도착할 즈음에는 비행기가 반쯤 고물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결국 한발 늦은 모양이다.

“…….제가 현장에 있으면 핵폭탄 안 터뜨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제가 한발 늦은 모양입니다. 아니면 그놈들이 워낙 막 나갔던가요.”

“지윤이랑 같이 오신 겁니까?”

“예.”

“그러면 왜 같이 안 싸우시고…….”

쉬지 말고 나가 싸우라는 소리인가. 나는 감기자를 살짝 째려보며 대답했다. 아직도 속이 메슥거려서 반응이 살짝 예민했다.

“……모든 운전을 제가 담당했습니다. 7,000㎞를 달리는 내내 몇 시간동안 염력을 쓰니, 코에서 피가 줄줄 쏟아지더군요.”

“아……. 과부하…….”

감기자는 그제서야 피로 젖은 와이셔츠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는 심지어 카메라를 돌려 나를 살짝 찍기까지 했다.

“아이고. 괜찮으십니까?”

“포션 한 사발 하니까 좀 낫습니다. 정 위험해진다 싶으면 다시 가서 싸워야죠. 게다가 듣자하니 홍선아 씨는 과부하 수준을 넘어서 아예 핵폭탄까지 맞았다고 들었는데. 무사합니까?”

“아, 예. 살가죽이 거의 벗겨졌다가 재생되고,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리기는 했는데, 지금 현장에서 뛰고 있습니다.”

“…….”

핵폭탄을 막아냈다는 사실보다, 다른 생각이 먼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기 위한 소형 전술핵이라고는 하지만 핵무기는 핵무기다. 그걸 막아낼 정도면 그만한 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뜻이고 말이다.

걸어다니는 핵폭탄의 위험성. 그것을 떠올리니 가슴에 돌덩이가 턱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일단 앉으시죠.”

“아, 예.”

나는 감기자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걱정스런 눈치로 내게 묻는다.

“속은 좀 괜찮으십니까? 방사능 때문인가……. 혹시 방사능 면역제 맞으신 적 있으십니까? 여기 핵폭탄 터진 지 얼마 안 됐는데…….”

“저는 UN 총회 때 공항에서 맞았습니다. 그것도 뤼미에르한테 직접요. 그나저나 지윤이 걱정은 안 하십니까?”

“저야 그거 와이프가 연구소에서 삥땅친 거 온가족이 맞았죠. 그거 개량할 때 화란이가 참여했습니다.”

“아아, 맞다. 맞다. 그랬었죠. 제가 도장 찍은 거였는데 그걸 까먹네…….”

거대한 괴수가 요동치며 지진을 일으키고, 헌터들이 협공하며 괴수를 사냥하는데, 우리는 멀찍이 떨어진 절벽 위에서 담소를 나눴다.

나도 산전수전 다 겪어보니 담이 조금 커진 모양이다. 지진이 느껴지는 와중에도, 나는 구두에 들어간 모래를 빼내며 그에게 물었다.

“……제가 지윤이를 싸움터로 데려왔는데, 혹시 원망스럽지는 않으십니까?”

“자기가 간다 그랬죠?”

“예.”

“그러면 지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건데요, 뭐. 아빠가 괜히 발목 붙잡을 일 있습니까?”

“천화란 박사님이 속 많이 썩으시겠네.”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아버지나 남편으로서 제 구실 못하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요.”

“그…… 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감기자는 피식 웃으며 카메라를 고쳐 잡았다. 그는 딸의 얼굴을 찍고 있었다.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은 지윤이가 뤼미에르와 접선해 작전을 하달받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이 퍽 듬직하다.

“저는, 지윤이가 큰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기웃거리니, 감기자는 언제나 그렇듯 명언을 술술 늘어놓았다.

“보통 사람은 가족을 아끼고, 사람이 덜 된 인간은 가족마저도 아끼지 못합니다. 그렇지요?”

“그렇죠.”

“여기서 친구까지 아끼는 게 착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하물며 나라를 아끼는 건 더욱 어렵죠.”

그는 사람의 그릇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결국 저마다 자기의 선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동정심이나 책임감에도 한계가 있지 누가 지구 반대편 일까지 신경 씁니까. 미련하게.”

“…….”

“그러니 지구 반대편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싸워주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겠습니까?”

이건 나한테 하는 소리였다.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저는 바르지 못한 것을 고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기자질이나 하며 누군가에게 고쳐달라고 애걸복걸 소리나 질렀지요.”

“…….”

“그런데 지윤이는 힘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저는 지윤이가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보통 아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니 옳은 일을 하겠다면 그걸 도와야죠. 부모의 역할은 옳지 않은 일을 할 때. 그걸 막아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느새 카메라를 들고서 촬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감기자는 학예회를 바라보듯 전장을 누비는 딸을 지켜보았다.

“어이고. 잘한다. 잘해.”

홍선아가 커다란 불덩이를 만들어내자, 감지윤이 괴수의 머리를 잡고 물고문 하듯 불구덩이에 패대기친다.

그 와중에 다른 헌터들은 괴수의 몸통을 영차영차 다시 잘라내고 있다. 또, 발작하는 꼬리 파편으로부터 마을을 지켜내기도 하고 말이다.

가까이에서 본다면 치열한 전장이겠으나, 멀리서 보니 꽤나 재미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렇게 피식거리고 있으니 문득 상념이 치민다.

‘큰 사람이라…….’

감기자는 옳은 행동을 하라 그러지만, 옳은 게 무엇인지 분간이 안 되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선을 그었다.

지구 반대편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라 그러지만, 나는 나랏일만으로도 너무 벅차다. 그래서 선을 그었다.

그런데 이제는 선을 허물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나더러 뭘 어쩌라는 소리인가.

“후우…….”

이런 고민도 이제는 지겹다. 그냥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피채원에게 묻고 싶어진다.

일단 저놈부터 빨리 조지던가 해야지. 그래야 이 지긋지긋한 오스트레일리아 바닥을 뜰 것 같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어디 가십니까?”

“괴수 잡으러 갑니다.”

“아프시다면서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서 뭐 합니까. 저놈 빨리 잡고 병원에 수액이나 맞으러 가야지.”

나는 씨익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뭐, 지금은 정치인이 아니라 헌터 한승문입니다.”

“오호, 차이점이 뭔데 그러십니까?”

“정치인보다는 헌터가 생각을 덜 하죠. 그리고 아마도 착할 겁니다. 뤼미에르처럼요.”

“아하……. 뤼미에르 씨는 생각이 없다?”

“솔직히 가끔 보면 살짝 맹하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감기자는 카메라를 들고 슬쩍 일어났다.

그는 나를 찍으며 씨익 미소 지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시청자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뭐요?”

“이거. 유튜브 생방송이거든요.”

SIDE EP

촬영중이라고 말했잖아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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