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8 - 초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3)
「와이즈힐의 영웅. 홍선아 헌터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녀는 하얗게 탈색된 모습으로 휠체어를 타고 짧은 기자회견을 가졌는데요, 그녀의 곁에는 WPO 평의회 노아 뤼미에르 의장과, 한승문 부의장이 함께한 것으로…….」
「괴수들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습니다. 가족, 생명, 안전, 그리고 고향을 말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우리의 양심마저도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그게 이번 투표의 결과가 의미하는 것이라고…….」
「허버트 중장이 핵무기 사용 혐의를 인정함에 따라 국제사회에 공분이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오스트레일리아 군부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레이널드 국방부 대변인은 어디까지나 현장 지휘관의 독단적인 월권이었다는 입장을…….」
술집 천장에 매달린 텔레비전에서 이런저런 소식이 들려왔지만 노인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이 나이쯤 되면 머리가 굳는 법이다.
“……크흠!”
그 대신 노인은 어기적어기적 술집 밖으로 나섰다. 사막의 햇살이 유독 따사롭다. 노인은 뉴스가 아니라 현실에서 세상을 보았다.
노인이 바라본 마을의 모습은 공사장에 가까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목을 옮기고, 잔해더미를 치워내며 건축 재료를 조달했다.
“어이! 거기! 망치 좀 줘봐!”
“점심밥들 드시고 하세요!”
“자아, 하나, 둘, 셋 하면 드는 겁니다.”
괴수를 코앞에서 목도했던 와이즈힐은 재건에 열중이었다. 중장비를 굴릴 기름도 없는 마당이라, 주민들이 손수 팔을 걷어붙였다.
물론 평생 톱질이라고는 해본적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니, 주민들의 손은 금방 물집과 상처로 얼룩졌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선 웃음꽃이 가시지 않았다.
“곧 대피소가 완성된대요!”
“하아…… 드디어 야외취침은 끝이구만.”
“드웨인! 살아 있었구나!”
“거대괴수와 핵폭탄도 나를 죽이지는 못했지.”
“선생님! 내일 적십자가 온답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오늘 중으로 환자들 분류를…….”
내일의 희망으로 오늘의 불행을 견디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선아는 그들에게 삶을 되찾아주었다.
식수도, 식량도, 거주지도 부족한 채 공사장에 내몰린 사람들은, 피난민이던 시절보다 더욱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삶을 가구했다.
“…….”
이에, 노인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지평선에 산처럼 솟아오른 괴수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푸른 불꽃은 아직도 꺼지지 않고,
번지고 있었다.
* * *
괴수가 쓰러졌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에 언론들이 처음으로 입을 모았다.
「영웅들이 괴수의 시체 위에 섰습니다! 헌터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지켜냈습니다! 기나긴 투쟁의 끝에 얻어낸 값진 승리입니다.」
「정부의 오만에서 비롯된 참극을 헌터들이 끝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많은 희생자 분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평화를 지켜낸 헌터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표합니다.」
정치성향에 따라 논조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모든 언론이 헌터들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대개 정치세력과 유착한 언론은 대중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보도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언론의 반응이 현재 대중들의 심리를 대변했다.
게다가, 영웅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에는 그간 일어났던 모든 어두운 사건들을 덮으려는 의도 또한 농후했다.
모두가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민주당은 연방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중국과 손을 잡고 호주를 멸망으로 몰아갔고, 연방정부는 의미모를 속사정으로 기습적인 핵폭격을 감행해 지저괴수를 지상으로 끌어올렸으며,
호주 군부는 그 괴수를 잡기 위해 민간인을 상대로 핵폭격을 감행했고, 결정적으로 그걸 승인하고 원폭기를 띄운 게 미군이었다.
아무도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헌터들에 대한 찬양 분위기에 섞여 모든 사실에 대한 은폐를 시도했다.
그러나,
「와이즈힐 일대에 핵무기가 투하된 건 사실입니다.」
정부의 묵인 하에 핵무기 투하를 명령한 장본인. 에드윈 허버트 중장이 혐의를 자백하고야 말았다.
「저는 현장 지휘관으로서 괴수로 인한 추가피해를 막고자 했고, 그래서 사건 당일 핵무기를 사용했습니다. 와이즈힐에 대한 민간인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허버트 중장은 사실관계에 대해서만 명확히 밝혔을 뿐. 국익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둥 사견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는 철저한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다만,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군인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후련해 보였다.
* * *
「호주-미국 정부. 생물병기 제작?」
「미국이 괴수를 조종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어째서 미국은 앨리스 스프링스를 폭격했는가」
핵무기 사용 문제가 공론화되자 음모론과 진실이 뒤섞인 후폭풍이 시작됐다. 중국이나 러시아였으면 모를까 이곳은 호주였다.
이제,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 한다. 누군가는 지금껏 쌓인 피와 눈물을 마셔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 죽음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정치권력들은 서로의 치부를 폭로하며 전면전을 시작했다.
「연방정부의 저열한 욕망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망쳤습니다! 생체병기라니요? 최소한의 인간성을 저버린 정부를 믿으시겠습니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음모론으로 국제군을 퇴각시키고. 그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으니 이제는 남탓을 하는군요. 우리 민주당은 참 한결같아서 좋습니다.」
「사과합니다. 본 언론사는 지난 사태 당시 호주 정부 대변인의 발표를 검증 없이 보도하여, 수많은 유가족들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긴 것에 대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정국이었다. 미국 대선은 점차 양비론에 가깝게 흘러갔고, 당장 호주 군부에서도 수많은 별들이 떨어졌다.
오히려 사태 직전에 외국으로 도망쳤던 호주 총리가 할 만하다 싶어서 다시 돌아오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호주의 정권을 잡으려는 군부와 정부가 충돌했다.
그렇게, 기적과도 같은 분투로 되살아난 세상은 다시 정쟁의 늪에 휘말렸다. 희망적인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걸 이용하려는 이리떼만 창궐했다.
호주에는 여전히 수천만의 괴수가 들끓었으나, 그 어떤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예전과 같았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뒤바꾼 것은, 기적과도 같은 소식 한 줄기였다.
「각성제 해외지원 국민투표. 72.8%로 가결!」
「대한민국. 대규모 해외지원 결정.」
「기사회가 십자군을 편성했다.」
* * *
정치를 하다보면 이변이라는 게 생긴다.
나도 양판석 보좌관 하던 시절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16부작 대하드라마를 찍으며 대통령이 된 노통. 그리고 국민의당에게 호남을 빼앗기고서도 새누리당을 꺾은 20대 총선의 민주당.
심지어 나는 현직 업계 종사자로서, 무명(無名)의 국회의원 유재광이 민주당 경선에서 그 이낙연과 유시민을 꺾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때도 제가 오늘처럼 충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
“72%가 말이 되는 숫자입니까?”
물론 각성제 해외지원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700만을 죽이자고 반대표를 던지기보다는, 그냥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그럼에도 국민투표 참여인원은 참정권자의 과반수를 넘겼고, 국정원 쪽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국민의 58% 정도가 해외지원에 찬성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경제회복의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말이다. 솔직히 내가 추진한 일이지만 믿기지 않는 결과였다. 압승이라니.
그렇게 살짝 정신이 나가 있으니, 뤼미에르가 미심쩍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잘된 것 아닙니까?”
“잘된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면 된 거 아닙니까?”
“그…… 렇죠.”
“그러면 식사나 하시죠. 스프가 다 식겠습니다.”
“네…….”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뤼미에르였다. 그녀는 최후의 최후까지 오스트레일리아를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유럽의 영웅은 세계의 영웅으로 격상되었다.
덕분에 기사회의 이미지도 EU의 집권당이 아닌 국제기구 수준으로 거듭났다. 수많은 나라가 붕괴하며 생겨난 무국적 헌터들이 기사회로 몰려든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뤼미에르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그녀는 금발을 뒤로 젖히고 오뚜기 분말스프를 떠먹으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직 세상에 정의가 남아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치역학에 지나치게 매몰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흐려집니다.”
“……그런가요.”
“예. 그러니 가끔은 저처럼, 맹한 눈으로 세상을 보시던가요.”
그녀의 일침에 스프를 떠먹다가 혓바닥을 데었다.
“크흡……! 큽……!”
젠장. 역시 유튜브를 본 건가. 하기야 뉴스에도 떴으니 모를 리가 없겠지.
나는 황급히 변명에 나섰다.
“……아, 제가 진짜로 맹하다고 그런 게 아니라-”
“이제 와서 말을 바꾸시는군요. 직업병입니까?”
“……솔직히 제가 아주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거기에 뻔뻔하기까지?”
그녀는 서양인답게 큼지막한 눈으로 나를 빤히 응시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너무도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그래서 눈을 내리깔고 있으니 그녀가 그만 놀려먹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이쯤 하지요.”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뭐가 그리 걱정이신 겁니까?”
“…….”
그녀의 지적은 정확했다. 막상 국민투표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하아…….”
70%의 압승은 나머지 30%의 반대와도 같은 의미였다. 투표 거부자가 많았으니 실질적 반대는 30%라는 숫자보다 훨씬 클 것이 분명했고 말이다.
물론 욕먹는 거야 정치인 팔자이겠다만은, 욕먹는 것과 증오받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근본적인 원인은 각성제 정국의 핵심 이슈가 ‘경제’였던 탓이다.
나는 그녀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한국의 빈민들. 특히 수도권 출신 피난민들은 이번 투표가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계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문제였지요.”
그러니 이게 옳다-
라고 뤼미에르는 거침없이 단정 지었다. 워낙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인지라 가능한 대답이었지만, 정치는 정의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야권에서 수도권 난민 홀대론을 밀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한국도 총선이 얼마 안 남았군요.”
“네. 그런데 이 시국에 빈부격차 문제 건드리면 상당히 치명적입니다. 가뜩이나 헌터들을 상대로 전 국민이 상대적 박탈감을 품고 있는데…….”
“그…… 위로의 차원에서라도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받은 돈을 뺏긴 게 아니라, 받을 돈이 없어진 것 아닙니까?”
뤼미에르의 비유는 적절했다. 우리는 경제를 망친 게 아니라, 경제를 살릴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 급한 사람들에게는 차이가 없는 짓이기도 하다.
무엇이 옳은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내가 공직자로서의 의무를 저버렸다는 것은 확실했다. 국익보다 공익을 우선했으니까.
그래서 죽상을 짓고 있으니, 그녀가 조금 걱정스런 눈치로 묻는다.
“……마음이 많이 불편하십니까?”
“정치인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렸으니 당연히 불편해야지요.”
“……혹시, 후회하십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적어도, 책임을 질 필요는 있었다.
겸사겸사 책임에서 도망치기도 하고 말이다.
* * *
각성제 국민투표가 대이변을 일으키며 끝났지만, 국내 정세는 여전히 팽팽하게 대치 중이었다. 서로의 명분이 너무도 합당했기 때문이었다.
“2천만 수도권 난민들이 빈민으로 전락했습니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정도의 경제적 위기는, 고 김영삼 대통령께서 긴급명령을 내리셨을 정도의 헌법적 국난으로 규정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경제위기 극복을 포기했습니다. 대체 왜 국민을 저버리는 겁니까?”
수도권 난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신수광 계열은 날선 공격을 쏟아냈다.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 민심을 결집시키려는 의도였다.
빈부격차로 인한 분열이 거세질수록 피난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
“물론 양판석 대통령께서도 선의로 하셨을 거라는 생각은 있지요. 그런데 그게 국가적 이익에 합당하느냐-라고 묻는다면. 한때 대통령 권한대행을 했던 사람으로서, 분명히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옥분은 양판석의 권위를 훼손하며 서서히 대권주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발언은 중도층을 포섭하기 위해서라도 아주 온건한 수준에서 그쳤지만, 그녀가 모든 사건의 배후라는 것을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각성제 지원이 성사된 이상 추가적인 경제적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단순한 일회성 후원이 아니라, 지속적인 경제교류를 통해 이익을 창출해야겠지요. 특히 마석시장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수요를 우리나라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적인 에너지배터리 경쟁력을 지속시키면서…….”
유재경 총리는 EBS 강사 컨셉을 잡고 언론노출을 개시했다. 평소와는 달리 아주 쉽게 경제를 풀이하며, 경제 전문가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는 행보였다.
거기에 제주도지사 청중엽은 재벌들 사이를 오가며 수많은 이권에 개입했다.
총선이 가까워지면서 지방정부에 대한 감시의 눈이 흐려진 것이다. 덕분에 장전읍으로 무너졌던 정경유착 카르텔을 서서히 복구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 모든 반정부 세력의 칼날은 한승문을 향하고 있었다. 한승문이 한국 빈민들의 공적으로 낙인찍힌 탓에, 가장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승문은 정치판을 탈출했다.
「제가 공직자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번 투표는 명백히 대한민국의 국익과는 다소 상반되는 부분이 존재하며, 그 논란 때문에 국민 여러분들께서 크나큰 분열의 상처를 얻으셨음에, 깊은 책임을 통감합니다. 이에 저 한승문은 국회의원 직을 내려놓고…….」
물론 지지자들의 눈에는 적폐세력의 핍박에 한승문이 쫓겨난 모습이었다.
또다시,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EP 28
초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