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6 - 필연적 존재 (1)
꿀꺽-
피채원이 마른침을 삼켰다. 가느다란 목덜미가 꿈틀거린다.
“…….”
고개를 들자 하늘을 찌를듯한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외벽에 비친 햇빛이 따가워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양복쟁이들의 무대. 그녀가 향할 곳은 GS 그룹의 본사.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GS 그룹의 총수다.
“……하아.”
양복을 입은 소녀는 살포시 가슴을 쓸어내리고서,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음울한 눈빛의 초보 정치인이, 그녀를 기다리는 무대를 향해 서서히 나아갔다.
* * *
GS 그룹의 사장실은 1층에 있었다. 사원들보다 밑에서 일하겠다는 각오라고 했지만, 한승문에게 듣기로는 지하벙커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하나 피채원이 둘러본 사장실은 평범한 임원의 집무실이었다. 곳곳에 별 요상한 것들이 널려 있는 것만 빼면 말이다.
“…….”
다이소에서 팔 법한 싸구려 연필꽂이에 들어있는 수천만원짜리 만년필. 으리으리한 진열장 안에 들어있는 건 낡아빠진 삼선 슬리퍼 하나.
커다란 책상은 못 봐줄 정도로 어지럽게 정리되어 있었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다시피 한 벽걸이 TV에서는 온갖 그래프가 실시간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온갖 사무용품과 집기로 어지럽혀진 책상에서 능숙하게 커피 프림과 코코아 봉지를 찾아낸 천금순이 생긋 미소지었다.
“자기는 뭐 먹을래요? 커피……? 코코아……?”
“아…… 율무차 있나요…….”
“있지 그럼!”
천사장은 벌떡 일어나 방구석 탕비실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고, 피채원은 살짝 뻘쭘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
피채원이 천금순과 독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업무상 그녀의 속내를 사찰하거나, 한승문의 어깨 뒤편에서 그녀를 마주하며 눈인사를 나눈 적은 많았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대하는 천사장은 참으로 미묘한 인물이었다.
“율무 율무 율무- 차…… 걸쭉- 한 설탕- 물…….”
“…….”
달그락. 달그락. 탕비실 비스무리한 곳에서 율무차를 타는 모습이 영락없는 직장인이다. 사이사이 들려오는 의미 모를 콧노래는 흥겹기까지 하다.
“자 다 됐다!”
“아, 감사합니다…….”
“인건비 비싼 율무차니까 맛있게 먹어요!”
조곤조곤 들려오는 목소리는 따스하고 친절했고, 부스스한 머릿결과 짙은 다크써클은 과로에 시달리는 직장인의 그것이었다.
이런 생각까지 하기는 뭐하지만 살짝 맹하고 어리숙해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그녀의 행적을 떼어놓고 본다면 말이다.
“아야얏……!”
바닥에 깔린 랜선에 걸려 넘어질뻔한 이 여자가 한승문이 가장 경계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이 나라 국무총리의 숙적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녀는 새된 소리와 함께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싱글벙글 미소를 띄고 피채원에게 물었다.
“자…… 이번에는 그이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나요? 직접 안 온 거 보니까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피채원이 본격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장기밀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미소 띤 상태로 잠시 굳어버린 천 사장. 피채원이 그녀의 표층심리를 읽어내는 건 그 찰나의 순간이면 충분했다.
‘장기밀매’라는 키워드에 천사장의 내면이 반응했고, 피채원은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스캔한 것이다.
그리고, 아주 다행히도.
천금순의 행적은 한승문이 예상한 바에서 크게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었다.
“…….으음. 조치가 생각보다는 빠르네요. 오히려 너무 이른 감이 없지 않아요…….”
“…….”
“오늘은 그거 얘기하러 온 건가?”
피채원은 눈매를 찌푸리며 상황을 정리했다.
천사장은 사건의 실체를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침묵했다. 오히려 GS 해운을 통해 장기가 밀수입되는 것을 알면서도 방조했다.
여타 재벌 본인이나 그들의 가족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목숨 걱정에 반쯤 눈이 뒤집힌 이들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바에는 그를 이용해 이익을 취했던 것이다.
그 정도 선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본다면. 그녀가 협박용으로 수집한 장기밀매와 관련된 재벌들의 대략적인 구도 또한 파악할 수 있었다.
누가 가족을 구하기 위해 장기를 밀수입했고, 누가 이윤을 취하기 위해 장기를 매매했는지 말이다.
그렇게 대략적인 선 정리를 마친 시점에서, 피채원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견디며 첫 번째 미끼를 던졌다.
“……정부 내에서. 칼을 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이, 참…….”
그녀는 무슨 귀찮은 잔업이라도 받은 것처럼 머리를 긁적였다.
“거, 한통속인 사람들끼리 너무하다 정말. 유재경 총리가 몸이 달았나 봐요? 갑자기 이렇게 무리수를 던지고 말이야…….”
피채원이 다시금 마른침을 삼켰다.
이 나라 국무총리를 동네 복덕방 아저씨 대하듯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낚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아휴……. 원옥분이 그렇게 무서웠나? 대통령 한 번 해보겠다고 식구끼리 칼부림 내려는 거 보면 정치판도 참 야박-”
“한승문 장관님이 결정하신 사안입니다.”
“뭐요?”
천금순의 유들유들한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순한 눈매는 어느새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한승문이라는 사람이 거론된 이상. 이 사안은 가볍게 짚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흐음.”
피채원은 꿋꿋이 포커페이스를 지켰고, 천사장은 심드렁한 눈빛으로 턱을 괴었다.
견디기 힘든 침묵이 이어졌다. 피채원은 마른침을 삼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처진 눈매에서 새어나오는 무언의 압박을 감당했다.
그녀는 무언가 따져 묻지도 않았다.
그저 한참동안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처량하게 미소지을 따름이었다.
“나참. 그이는 그걸 이제서야 안 모양이네요?”
“…….”
그 짧은 순간. 천사장은 모든 상황을 대강 파악한 상태였다. 특히 한승문의 심리에 관해서는 아주 정확하게 말이다.
“하여튼. 이 나라 고위층들이 가족 살려보겠다고 품을 얼마나 팔고 다녔는데. 맨날 공무원처럼 책상에서 벗어나지를 않으니까 소식이 느리지…….”
“…….”
“그걸 머구리라고 하는 거예요. 도박하는데 자기 패만 쳐다보는 사람.”
천사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도 혼자서 온갖 거 붙잡고 일하죠? 그러다 밤새고, 퇴근도 안 하고. 부하들이랑 주변 사람 고생시키고. 그게 다 사람 못 믿어서 그런 거예요. 자기가 안 하면 안심이 안 되는 거지.”
피채원이 처음으로 움찔거렸다. 정곡이었기 때문이다. 천금순은 측은하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우리 둘째 오라비가 딱 그랬죠.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인 사람들이 그래요. 하여튼 타협할 줄을 몰라…….”
에휴. 작은 한숨을 끝으로 푸닥거리가 끝난 모양인지, 천 사장은 다시금 슬쩍 미소지으며 본론을 캐물었다.
“하여튼. 그이 성품상 충격 많이 받았을 테니 유감 정도는 표하고. 그래서 대체 어떤 딜을 붙이려고 밀사까지 보내셨대요?”
“……딜, 까지는 아닙니다만.”
“에이, 조질 거였으면 말도 안 붙였을 거잖아.”
“일방적인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 * *
“……참, 피곤한 사람이다 정말.”
기나긴 설명이 끝나고. 한승문의 요구사항을 전달받은 천사장의 첫 소감이었다.
“……그냥 눈 딱 감고 넘어가면 될 것을.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직성이 풀려요?”
“싫으면 마시죠.”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세상일인가?”
피채원이 내심 그 멘트를 언젠가 써먹기 위해 마음 속에 저장해놓는 동안, 천사장은 머리가 복잡한 모양인지 머리칼을 헤집으며 으스스하게 중얼거렸다.
“자꾸 법리랑 생리를 맞추려고 들지 말라 그래요. 대한민국은 관습법의 나라니까.”
아마 한승문이었다면 ‘경제사범이 집행유예를 받는 게 관습법이냐’고 따져 물었을 거다- 라고 피채원은 생각했다.
“내가 알기로는 2차 한국전쟁이 코앞인 걸로 아는데. 리스크 관리할 자신 있어서 저지르는 거 맞죠?”
“장관님은 뭐든지 자신 있게 추진하신 적은 없습니다. 전전긍긍 앓다가 어떻게든 이루셨을 뿐이죠.”
“확실히…… 나를 놀래켰으면 놀래켰지 실망시켰던 적은 없죠. 그런데 이번 건 조금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내가 그쪽한테 투자한 자금이 1천억이 넘는데?”
“이번에도 만족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자기는 뭐, 이미 내가 도와주기로 한 것처럼 말한다?”
문득 치고 들어오는 서슬퍼런 눈빛에, 피채원은 잠시 움찔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하나, 먼저 긴장을 풀어낸 건 천사장 쪽이었다.
“하하. 그래요. 이런 부탁을 하는데 직접 찾아오지도 않았지만, 나야 뭐 수틀리면 쓸려나가는 날파리 비스무리한 거니까. 고분고분 말 잘 들어야겠죠? 요즘같이 무서운 세상에?”
“그렇긴 하죠.”
“……장관이나 비서나 똑같이 밉상이라니까.”
그녀가 흐릿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무튼 다음에는 직접 찾아오라 그래요. 바쁜 건 알겠는데 이런 걸 사람 시켜서 말하는 건 예절이 아니지…….”
“그리 전하겠습니다.”
이윽고, 떨떠름한 목소리의 수락이 떨어졌다.
“그래요. 일단은 수용하죠. 대신 약속은 철저히 지키라고 그래요. 이거 뭐 날강도도 아니고 갑자기 장사 밑천을 털어가네.”
“그 점은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사장님께서 지금 대화 녹음하시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럼 다행이고!”
잠시 커다랗게 기지개를 켠 천사장은 잔뜩 지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언뜻 후련한 것 같기도 하다.
“근데, 나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말씀하시죠.”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대요?”
가벼운 말에 무거운 진심이 들어있었다. 아마 알면서 물어본 것일 터이다. 다만 이해가 안 될 뿐이지. 둘은 다른 인종이었으니까.
“…….”
어쩌면 진짜 공감이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 피채원은 굳이 그 부분까지 마음을 읽지 않았다. 정신병자의 심리에 공감하는 건 한승문 한 사람으로 충분했으니까.
물론 피채원이야 어찌 생각하든, 천사장은 자신의 의문을 토로했다.
“뭐……. 여자는 안 만나나? 이런저런 모임 나와서 골프나 좀 치고 양주나 땡겼으면 장기밀매고 뭐고 진즉에 파악했을 텐데. 맨날 혼자서 일만 하니까 삶에 재미가 있냐고. 재미가…….”
“…….”
“자기도 완전 깨끗한 사람은 아니면서, 눈 딱 감고 넘어가면 될 것을 굳이 부여잡고 아둥바둥…….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내가 아는 이맘때 남자는 여자가 기본이고 마약이 옵션인데?”
그녀가 물었다.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하냐 이거예요. 기득권까지 잡아놓고 왜 자꾸 좌파처럼 굴어?”
즉, 천금순이 의문을 표하는 건, 한승문이라는 사람이 권력을 대하는 태도였다.
피채원은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한승문의 신조를 입에 담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요.”
“호구네.”
“……!”
피채원이 움찔거렸다. 아니, 울컥했다.
조금 많이 찔리는 멘트였기 때문이다. 매번 한승문의 심정을 무의식적으로 공유하다 보니 자연스레 분노하게 된 걸까.
표정에도 나타난 모양인지 천사장은 방긋 웃으며 이죽였다.
“아하핫……! 상사랑 많이 친하나 봐요? 그거 쉽지 않은데. 부럽다. 나도 요런 비서 하나만 있었으면…….”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뭘, 어서 장관님한테 가서 임무 성공했다고 그래요. 천금순이 꼬셨다고.”
피채원은 잠시 말을 더듬다가, 결국 잽싸게 도망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계세요.”
뭔가 학교 선생님한테 인사하는 말투가 되어버렸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피채원은 잽싸게 뒤돌아 종종걸음으로 달려나갔다.
그렇게 사무실을 빠져나가려던 찰나였다.
“아…… 로비에서 산삼이나 좀 챙겨 가요. 자꾸 픽 픽 쓰러지던데 보양 좀 하셔야지. 장관님도.”
“……네?”
“왜요. 나 호구 좋아하는 거 몰랐어요?”
잠시 굳어버린 피채원이 뒤돌아 천 사장을 바라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실없는 미소와 의미모를 한 마디.
“나 사기꾼이잖아.”
왜일까. 문득 커다랗고 화려한 방 한가운데 있는 그 모습이, 조금은 처량하고 외로워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 * *
다음 날.
대기업의 PMC 보유를 대폭 제한한다는 ‘한승문법’이 발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