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6 - 필연적 존재 (2)
정치에 관심 있는 청소년은 거의 없다. 애초에 조금 고루한 분야일뿐더러, 우리 사회가 조금은 그를 터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재영의 경우는 달랐다.
밥상머리에서 듣는 대화가 조금은 남달랐던 탓이다.
“아무래도 2분기도 상황이 나쁜 모양이야. 1.1%라고 좋아하는데 이거 다 기저효과라니까. 정치고 나발이고 추경안은 통과시켜야 할 거 아니야 이거…….”
“재영이 아빠. 그냥 미친 척하고 금리 올려봐. 우리나라 정서 상으로 통화완화가 될 리가 없다니까 그러네? PBR 꼴아박은 거 보면 답 안 나와?”
“그게 말처럼 쉽나. 그러다 잘못하면 빨갱이 소리 들어. 내년이 총선인데 미쳤다고 대통령이 그 짓을 해?”
“아니면 물 떠놓고 연준한테 빌던지.”
기획재정부 고위공무원 아버지와 대학교수 어머니를 둔 탓일까. 아니면 밥상머리에서 듣는 이야기가 ‘한은의 금리인하에 이은 추경안과 그로 인한 내년 총선 전망’이라서일까.
유재영은 중학교 시절부터 학교에서 정치 이야기를 곧잘 입에 담았다, 일종의 지적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원래 그 나이는 한창 아는 거 자랑하고 싶을 때가 아닌가.
그녀는 약간 엉성한 전문가 행세를 하고 다녔다. 사실 남들이 듣기에는 조금 재수 없는 말투였다.
“으음. 얘들아. 내가 보기에 이번 이슈는 말이야? 가장 문제가 되는 게 가처분소득 줄여놓고서 분배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거든? 신용화폐라는 것 자체가 기준금리만큼 녹아 사라지는 물건인데 왜 자꾸 성장 대신 분배를 택하냐고.”
“으응…… 근데 그게 무슨 뜻이야?”
“편돌이 시급 올리는 게 장땡이 아니라는 소리지!”
중학생 소녀의 별명이 ‘일베충’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이후로 유재영은 정치 이야기를 일절 끊었다.
대신 인터넷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저녁 밥상에서 국정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소녀가 쓴 글은 탄핵정국과 맞물리며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렇게 10년의 포스팅이 이어졌다.
그녀는 정치학 석사가 되었고, 게이트가 열리며 정치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자, 그녀가 수십만을 끌고 다니는 파워블로거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산나비’다.
즉,
산나비는 유재영의 음습한 자아표출이었고,
그러니까 그녀가 산나비라는 건 부모님도 몰랐다.
* * *
안녕하세요. 산나비입니다.
하루아침에 나라가 뒤집어졌습니다. 네. 맞습니다. 또 ‘그 장관’입니다.
이번에는 초상산업업계 전체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더군요. 갈수록 이 나라 대통령이 양씨인지 한씨인지 헷갈려지는데, 몇 년 뒤에는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아 무섭습니다.
[지난 대선 여론조사 그래프. 한승문이 지지율 13%로 3위를 달리고 있다. 나이제한 때문에 후보등록을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잊을 만 하면 튀어나오는 한승문의 급발진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관료제를 채택한 민주사회에서 고작 장관 하나가 국정을 컨트롤하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승문은 전쟁영웅, 승부사, 도박사 정도로 설명 가능한 인물입니다. 그것도 수틀리면 판을 엎어버리는 악질이지요.
지금까지는 기적적으로 성공했지만 언제 어떻게 넘어질지 예상이 안 됩니다. 호오를 떠나 그냥 그 사람의 성향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행성 좋아하는 우리 국민들이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이번만큼은 모처럼 흡족스러운 정책을 들고 나왔습니다. 지나치게 만족스러워서 실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말입니다.
[‘한승문 법’ 뉴스 보도. 생방송이 진행되던 와중 전경련의 규탄성명이 속보로 보도되었다.]
‘금산분리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기업’이 ‘은행’을 소유하는 것을 막는 법입니다.
보통 은행은 기업의 신용을 보고 돈을 빌려주는데, 만약 기업이 자기 소유 은행에게 돈을 무제한으로 대출받아서 사업하다 망해버리면 국민(예금주)이 피해를 보기 때문이지요.
한승문이 모처럼 의원 자격으로 발의한 ‘군산분리법’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대기업의 PMC 사유화를 제한하겠다는 겁니다.
[한국 3대 길드. GS 아이기스-삼성 수렵대행사-SK 헌터스. PMC 분야 뿐만 아니라 마석에너지 사업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다.]
앞으로 대기업은 민간군사기업(PMC)의 지분을 5% 이상 가지면 정부에 신고해야 하고, 10% 이상 보유하려면 초상관리부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도 정기적으로요.
또한, 국방과 안보에 직결되는 산업인 점을 고려해서 모든 PMC를 순수민간기업이 아니라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으로 변경해서 지원하겠다고 하는데.
사실상 모든 PMC를 반쯤 공기업으로 만들어놓고서, 언제든지 초상관리부 감찰관이 조질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겁니다.
삼성전자의 감찰권한을 과학기술부에게 준다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전국 경제인 연합회의 규탄성명 발표. 이례적으로 재벌 총수급이 직접 입장문을 국회에 전달하고 있다.]
당연히 PMC 운영하던 기업 입장에서는 눈뜨고 회사를 빼앗기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빨갱이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을 정도로 사회주의적인 정책입니다.
그러나 나는 일개 국민 입장에서 군산분리를 찬성합니다.
왜냐하면 PMC는 무력조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군대를 이길 가능성이 있는 무력조직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공익이 아닌 이윤을 위해 움직일수록 어떤 식으로든 국민의 기본권에 지장이 생깁니다.
물론 모든 PMC를 쿠데타 예비분자로 간주해서 집행하는 조치는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이 군산분리는 금산분리와 그 법리적 맥락을 공유합니다.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법원에서 나오는 천금순 사장. 재판 도중 대규모 식량지원을 타결시키며 여론을 뒤집은 바 있다.]
대한민국은 명백히 PMC가 생산하는 마석으로 돌아가고 있고, PMC는 현재 모든 산업들을 지탱하는 1차 산업입니다. 당연히 1차 산업을 조종한다면 2차, 3차 산업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즉, 셀 수 없이 창의적이고 다양한 악용이 가능합니다.
당장 대기업 PMC가 같은 그룹 계열사 포션을 대거 매입하면 계열사 간 분식회계나 통정거래가 손쉽게 가능합니다.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포션가격 담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견도 있고요.
혹은 자사 PMC가 획득한 마석을 정부를 거치지 않고 계열사 소속 연구소로 빼돌릴 수도 있고요. 이런 경우는 탈세와 전략자원 유출이 손쉽게 가능합니다.
PMC를 지배하는 자가 경제를 지배하는 겁니다.
[슬램덩크 명장면 캡쳐. 리바운드를 지배하는 자가 게임을 지배한다.]
정부 입장에서는 결코 용납하기 힘든 것들이었을 겁니다. 시장경제를 마음껏 가지고 노는 이들이 수틀리면 쿠데타까지 일으킬 수 있다니요?
미국은 정부가 약해진 틈을 타 대기업 PMC들이 시장을 완벽히 장악했고, 유럽은 정부가 약해진 틈을 타 PMC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일본은 야쿠쟈 헌터들이 모여 정부군과 반쯤 내전을 벌이고 있고, 3 세계는 이미 헌터들이 주지육림을 차리고 있지요.
보시다시피 민주적 공권력이 무너지는 순간, 사회는 힘의 논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건 서민 입장에서 생지옥과 다름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나라의 초상관리부 장관은 누구보다 헌터를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경계하는 사람입니다.
[국제 PMC 시가총액 순위. 1위는 스페인의 아르마다. 2위부터 4위는 미국 대기업. 5위는 GS 방위대행사가 차지하고 있다.]
물론 치열한 국제경쟁 속에서 초관부가 한국 대기업의 성장동력을 부숴버리겠다고 선포한 건 아닙니다.
지금의 조치는 목줄을 채우겠다는 것이지 규제라고 보기에는 애매합니다. 오히려 국가예산으로 PMC를 지원해주기로 했죠.
즉, 지금의 횡령, 배임, 담합, 착취, 남용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을 허용하되, 선을 넘어가는 순간 정부가 즉시 철퇴로 뚝배기를 날려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겸사겸사 주기적으로 감시도 하고요. 참으로 ‘그 장관’스러운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유의 편집증적인 면모를 여과없이 드러내는군요.
문제는 누가 순순히 목을 내놓겠냐는 겁니다.
[정부를 규탄하지 않는 헌터 협회를 규탄하는 시위 사진. 유사시를 대비해 군경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이름이 비슷하다고 해서 이게 김영란법 때와 비슷한 정치싸움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한승문법은 업계의 지반을 뒤틀어버리는 대개혁입니다.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한승문은 초상관리부 장관으로서 초상사회를 지탱하는 업계 전반을 향한 침공야욕을 드러냈고, 모든 민간기업은 이례적으로 정부에 맞서 단결한 상황입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국민당이고 국방당이고 가리지 않고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대변인이 어버버거리며 말을 돌리고 있다는 건 당론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건 여느 때처럼 한승문이 갑작스레 칼을 빼들었다는 뜻이니까요.
솔직히 현 시점에서 한 장관이 어떤 식으로 사태를 돌파할지는 전혀 예측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잘못하면 정치생명에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고요. 답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한승문이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상황을 헤쳐나갈지 기대되는 걸까요. 어쩌면 이제는 저도 이미 그 사람이 싸움에서 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 * *
터억-
유재영이 노트북을 덮었다.
밤새도록 퇴고를 했더니 눈이 다 아프다. 누군가를 까는 척하면서 빨아주는 글을 쓰는 건 참 어려운 것 같다.
“……하아.”
산나비라는 것을 들킨 이후로 한승문의 나팔수 노릇을 하게 된 것도 어언 몇 달째. 인턴에서 6급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한승문의 측근이 되는 건 요원하기만 하다.
“이게 뭔 댓글알바도 아니고…….”
좋아서 쓰는 글과 시켜서 쓰는 글은 차이가 있다. 당장 블로그에 광고를 걸었을 때만 해도 돈 때문에 글이 망가지고는 했다. 그 이후로 광고를 안 받았지. 어차피 금수저였으니까.
유재영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캔맥주나 한 잔 마시려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거실 구석에 있는 냉장고를 열고, 꼭대기에 있는 맥주를 꺼내려 까치발을 서는데-
“밤에 술 먹지 마라.”
“아 씨! 깜짝이야!”
소파에 앉아있던 유재경이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앉은키가 작아서 있는 줄 몰랐다.
“……아빠? 안 자?”
“아빠 안 잔다.”
“벌써 4시인데 왜 안 자……?”
“……잠이 안 오네.”
유재영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맥주를 먹겠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 뒤다.
그녀가 냉장고 문을 닫으며 조심스레 여쭈었다.
“아빠, 괜찮아……?”
“으응…….”
영혼 없는 대답이었다. 소파에 늘어진 유재경 총리의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는 파김치에 가까웠다. 이런 걸 보통 떡이 됐다고 표현했던가.
유재경이라는 사람이 사회에서와는 달리 가정에서는 영 흐물흐물하긴 해도 이렇게 무기력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보면 항상 비틀비틀 시들시들 거므죽죽한 느낌이다.
그러니 지켜보는 딸 입장에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유재영은 냉장고 문에 손을 올리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우유 드실래요? 두유 드실래요?”
“……사과즙 있니? 저번에 이재용이 준 거.”
“하나 남은 거 엄마가 먹었는데.”
“이놈에 여편네…….”
유재경 총리는 자기 무릎을 베고 잠든 와이프의 관자놀이에 콩 하고 딱밤을 찍었다. 물론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정도로 살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재영은 피식 웃으며 전자레인지에 우유를 돌리기 시작했지만, 실상 그녀의 마음은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
솔직히 유재경의 목숨줄은 점점 불안해지고 있었다. 국무총리로서 자연스런 수순이긴 했지만, 원옥분이라는 강력한 정적이 전북지사에 오른 뒤부터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지난 지방선거에서 괜히 부산시장 자리를 힐끔거리다가 몇 가지 망언에 엮여 조금 피를 본 상황이다. 인터뷰 도중 가벼운 말로 부산을 ‘수도’라고 언급해 버렸던 것이다.
당연히 전라도에서 ‘호남 홀대론’이 튀어나왔고, 서울 난민들은 서울 탈환 포기하겠다는 거냐며 유재경 총리를 몰아붙였다.
솔직히 언플로 만들어진 이미지라 행정가로서의 지위에 큰 지장은 없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다소 커다란 타격을 입은 상황.
아마 원옥분 그 늙은 마귀할멈만 싱글벙글 웃고 있지 않을까…… 하고. 유재영은 조심스레 미루어 짐작했다.
“……하아.”
그런 와중에 한승문이 갑작스레 나라를 ‘또’ 뒤집어놨다. 이번에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헌터 산업 전반을 손에 쥐려 한다.
업계는 PMC의 영향을 받고, 그 PMC는 대기업의 영향을 받는데, 바로 그 대기업을 컨트롤하겠다는 건 정부가 업계를 관리하겠다는 소리였으니까.
“……아, 열받네.”
속된 말로 한승문이 지랄을 할수록 국무총리가 욕을 먹는다.
장관은 국무위원이고, 국무위원의 중간관리자가 국무총리인데, 자꾸 총리가 장관 하나 똑바로 통제하지 못하는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
당장 원옥분과 유재경, 그리고 김두식이 차기 빅3로 거론되는 상황, 이런 양상이 계속될수록 유재경은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빠, 한승문이 또 말없이 사고친 거야? 대체 뭔 정신으로 저런대?”
“…….”
“나, 참. 능력있는 또라이가 이렇게 무서울 줄은 몰랐네. 갑자기 급발진하고 난리야 난리는-”
“……아니야.”
“어. 어……?”
아빠를 위해 일부러 언성을 높이던 유재영은, 아버지의 힘없는 목소리에 가슴에 돌덩이가 턱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뭐가 아닌데?”
“……말없이, 저지른 게 아니더라고.”
유재경 총리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도박장에서 전재산을 날린 사람처럼 보이는 표정이었다.
“각하랑 만나고 왔다. 이미 알고 계시더구나. 이야기가 끝난 모양이야.”
“아, 아! 그래? 다, 다행이다! 대책 없이 저지른 건 아니었-”
“국민당 원내대표랑, 초상위 상임위원장도 이미 알고 있었어.”
“어, 음……. 왼팔 오른팔 동원할 정도면, 여간 일이 아닌 모양인데?”
“원옥분 지사도. 이미 알고 있더군.”
“…….”
유재영은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문외한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아버지가 정보전에서 뒤쳐졌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직감했다. 이 정도 대국에서 제외되었다는 의미도 말이다.
“…….”
그는 권력의 심장부에서 멀어진 것이다.
게다가 차기 대권이 원옥분으로 넘어가는 순간, 유재경은 정치적 보복을 당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비록 아버지 앞에선 모르는 체 했지만, 그녀는 유재경이 지난 대선 당시 원옥분을 배신한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이건 단지 공무원이 해고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 가족의 명운이 걸린 문제였던 것이다.
“…….”
유재영은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꽉 깨물고, 핏줄이 설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이제는 그녀가 한승문의 측근이 되는 것 말고는, 아버지를 살릴 방법이 없었다.
한승문 의원실에 지원할 적 반쯤 우스갯소리로 내뱉은 소녀가장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라도 아끼면 안 되는 때가 왔다.
“……아빠, 사실 내가 인터넷에 글을-”
“재영아.”
유재영이 침묵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의 노쇠한 목소리는, 그의 호통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아빠가, 아주 착한 사람은 아니야.”
유재경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딸은 아버지의 표정을 보는 것이 두려워 함께 고개를 숙였다.
“……아빠가 좀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살다 보니까 남한테 상처를 많이 줬어. 어떨 때는 상처 주는 것도 모르고 상처를 줬다.”
딸은 귀를 막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 죗값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래도 마지막까지는 열심히 해볼게.”
유재경 총리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낡은 양복을 입고, 수백만원짜리 안경을 끼고, 가장 좋아하는 딸이 선물해준 중저가 명품 구두를 신었다.
지금 시각은 새벽 여섯 시. 차가운 서릿발이 얼어붙은 유리창에 햇살이 스며드는 때다.
유재경은 서리의 입장에서 밝아드는 햇빛을 보았다. 얼음이 조금씩 녹아 흘러내리며, 창가에 묻은 먼지를 닦아냈다.
“……아빠 출근한다.”
고독한 출근길이었다.
* * *
[……오늘 아침 7시 경. 검찰이 지난 5월 체포된 민정기 헌터에 대한 재수사에 나섰습니다. 담당검사인 대검 이능수사부 박윤선 검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을 아꼈-]
[……아, 네. 검찰이 다소 이례적으로 재수사에 나섰죠? 보통 쪽팔려서 그런 거 안하는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박윤선 검사가 원옥분 지사의 측근이고, 원 지사와 한 장관이 지난 지선 이후로 잠재적 동맹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저는 여기서 뭔가가 더 있지 않을까-]
[……민정기 헌터면 예전에 북한 민간인 7명을 죽인 연쇄살인마로 알려져 있죠. 그것도 8살이 안 된 소년만 살해해서 공분을 산 적이 있습니다. 인터뷰에서도 당당하게 자기가 쾌락살인마라고 밝혔던-]
[……사실 당시에도 의문이 많았죠. 의문이라기보다는 경악이었던가요? 왜 8살도 안 된 어린이들을 죽였을까. 아내랑 자식도 있는 사람이 말입니다. 당시 일각에서는 이게 쾌락살인이 아니라-]
[……아하하, 장기밀매는 너무 간 거 아닌가요? 아무튼 원옥분 지사가 한승문 의원을 위해 검찰을 움직인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 군산분리법을 지원하기 위해 괜히 헌터의 도덕성 문제를 건드리는 게 아닌가 싶네요.]
[……아, 네. 다음 뉴스입니다. 전경련에서 한승문 장관에 대한 비난성명을 철회하고, 대화와 소통의 장으로 나오라는-]
달칵-
라디오가 꺼졌다. 남은 건 조용히 들려오는 숨소리와, 살포시 퍼져나가는 하얀 입김뿐.
“…….”
새벽이 밝아오던 때.
정치가는 창가에 조용히 서서 흐리고 추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