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50화 (50/296)

EP 9 -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6)

“‘각성’의 원리는 개괄적으로나마 밝혀진 바가 있어요. 인간이 마력에 적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포 형질의 변화가 일어난다.

의원님이 저번에 연결해주신 펜타곤 쪽 연구원들도 비슷한 생각이었죠. 뮤턴트 소리를, 네. 그러니까, 돌연변이 소리를 먼저 꺼내더라고요.

게이트를 통해 넘어온 마력을 다룰 수 있게 진화한 사람들, 그게 각성자라고.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약물은 돌연변이를 촉진시키는 약이에요. 절대로, 능력을 만들어주는 약이 아니라는 거죠.

보통 같으면 숨쉬다가 대충 적성에 맞고, 마력에 오래 노출된 사람들이 각성을 하는데.

그러니까... 이, 각성 촉진제? 같은 경우는, 사람 몸속에 마력을 순식간에 퍼뜨려서 세포변이를 촉진시키는 거죠.

직접적으로 세포를 바꾸는 게 아니라 그냥 마력을 퍼뜨려서 세포 변이를 유도하는 거에요.”

- 짝!

천화란이 가볍게 박수를 치더니, 살풋 미소지으며 ‘참 쉽죠?’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해하셨어요?”

“아뇨.”

* * *

천화란은 잠시 매끈한 턱을 매만지다, 검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허공에 흔들며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갔다.

“물속에 빠진 사람들이 아가미가 생겼어요.

근데 이 약은, 아가미를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아가미가 생기라고 물속에 집어넣는 약이에요.”

“아, 이해했습니다.”

“비유 좋았죠?”

“유치원 선생님이신줄.”

“애가 넷이잖아요.”

천화란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이더니 실험실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나는 등산용 지팡이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그녀의 농담에 어울렸다. 꼬맹이 카운팅에 그녀 남편이 포함되어 있다.

“감기자님은 애라기엔 너무 큼직하신데요.”

“이곳저곳 궁금해서 들쑤시는 거 보면 애기라니까요... 아구, 어디까지 말씀드렸더라?”

“아가미요.”

천화란이 각성 촉진제를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수백명을 갈아 만든 약물은 파란 형광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이게... 아가미가 생기라고 물속에 집어넣는 약이잖아요?”

“그렇죠.”

“아가미가 팔에 생길지, 등에 생길지 몰라요.”

“능력이 무작위로 각성한다는 겁니까?”

“그 정도면 양반이죠. 실험체들 보셨잖아요. 이성을 잃고 반쯤 괴수같은 생김새가 돼서 마구잡이로 날뛰던 거요.”

“......각성자를 만드는 약이 아니라, 괴수를 만드는 약이라는 겁니까?”

“각성자와 괴수의 차이점이 뭐죠?”

“이성?”

“그렇다면. 이성이 있는 괴수를 만드는 약과, 각성자를 만드는 약이 뭐가 다르죠?”

“그 부분은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뜬구름잡는 소리할 시간 없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은은하게 빛나는 플라스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거 먹으면 정신줄 놓습니까?”

“아뇨, 그 부분은 안정된 상태에요. 그나마.”

“그러면 뭐가 문젭니까?”

천화란이 쓰게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DNA에 텔로미어라는 말단소립자가 있는데. 세포분열이 계속되면 이게 줄어들-”

“조금만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세포는 딱 정해진 횟수만큼 분열해요.

그 횟수가 줄어드는 걸 우리는 늙는다고 말하죠.

그런데 갑자기 각성해서 3번째 팔이 생겼다 쳐요.

그러면 그 팔도 세포분열로 생기는 건데, 당연히-”

“좀 더 쉽게요.”

“빨리 늙어요.”

염병.

“정상적으로 각성한 사람도 그럽니까?”

“아뇨.”

“그럼 왜 약으로 각성한 사람만 그럽니까?”

“모르죠.”

으아악 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다.

“으아악!”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거 정말 못 쓰는 겁니까?”

“.....수명 문제도 있고. 1차적으로 안정시켜놨다고는 해도 정말 이성을 잃지 않을지도 미지수고. 과연 쓸만한 방향으로 각성할지도 의문이고. 각성하다 사람 죽지 않나 싶고. 초능력을 본인이 통제 못할 수도-”

“수백명을 죽여서 만든 약인데?”

“......”

천화란이 나를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원리를 모르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씨이팔. 여기서 멈출 순 없다. 나는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반쯤 광기에 찬 눈빛이었는지 천화란이 움찔했다.

“......그렇죠. 차재균 차관도 연역이 안 되니까 귀납으로 해결한 거 아닙니까?”

[원리는 좆도 모르는데 일단 주삿바늘 꽂으면서 노가다로 해결하지 않았습니까?]

“으, 의원님...?”

나는 한참동안 말없이 천화란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불안한 눈빛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천 박사님. 예전에 지윤이랑 같이 제 능력 테스트했던 거 기억하십니까?”

“......계엄사령부에서요?”

“지윤이가, 분명히, 제 누님이랑 붙어있으면 저도 파랗게 보이고. 떨어지면 안 파랗게 보인다고 그랬는데.

초능력자랑 접촉 안하고 있으면 저 그냥 일반인이라는 소리 아닙니까? 몸속에 마력이 없으니까요.”

“......아뇨. 그건-”

“신분당선 탈출할 때 테스트해본 게 하나 있습니다.”

“......아뇨,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두 명 이상의 초능력자랑 접촉하면, 나중 사람 게 적용되더라고요.”

“의원님. 저는 못 해요.”

“......약을 맞아서 능력을 각성한 다음에, 천화란 박사님이랑 접촉하면, 약물 효과가 취소되지 않겠습니까?”

“의원님!”

즉, 무한대로 생체실험이 가능하다.

“......한 번만 해봅시다.”

우리는 그 날 처음으로 이 방법이 통한다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반년동안 231회 진행했다.

결국 완성시켰다.

*

[영웅을 이루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저는, 차재균의 음모를 저지했고, 그가 완성시킨 괴수화 물약을 손에 넣었습니다. 비록 그 잔당들의 테러에 시달렸지만, 저는 비밀리에 괴수화 물약을 개조해 각성자를 만드는 약품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업적]

“저는 제 몸으로 생체실험을 231회 진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말단 소립자가 마모되어 수명이 대폭 줄어들긴 했지만, 개선된 약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희생]

“물론, 표본이 오직 저 하나 뿐이었기에 약품이 온전하다고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안정되었다고는 하나 부작용이 완벽히 제거된 것은 아니며, 최소한 수명이 줄어든다는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이게 대한민국의 최선입니다.”

[비전]

“여러분, 이 약을 맞아주십시오.”

[고개를 숙여 시청자들에게 간절함을 보인다. 내가 하고 있는 건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모병募兵광고다.]

“526만명이 죽었습니다. 이들은 숫자가 아닙니다.”

[위기를 인식시키고]

“이 나라의 정치가들은, 야합과, 분열 속에서, 국민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분노를 유발시키고]

“전 세계가 멸망의 기로에 있습니다.”

[피를 인식시킨다.]

“국군 장병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 또한 괴수에게 우리의 시체를 내어주고 있었을 겁니다.”

[이는 단순히 지금의 말 몇 마디로 이끌어낸 감정이 아니다.]

“약속된 멸망이 있습니다. 해로가 봉쇄되었고, 우리의 자원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모략이, 지금 이 순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우리는 게이트를 닫을 방법을 모릅니다.”

[나는]

“탄약과 기름, 둘 중 하나가 떨어지는 순간 대한민국은 패망합니다.”

[차재균의 예언을 전한다.]

“국가방위체제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공포를 자극해 변화를 촉구한다]

“오직, 초능력자들로 괴수를 막아내야 합니다.”

[무한한 적, 한정된 자원.]

“우리는 더 많은 초인이 필요하고, 수명을 깎아 초인으로 각성하는 약물이 있습니다.”

[물적자원이 아니라 인적자원을 써야 한다]

“......이에, 국민의, 피와, 눈물과, 고통을 요구합니다.”

[오직 나만이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다.]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저, 그저, 나라를 위해 희생해달라는 말씀 뿐입니다.”

[지금 얽혀있는 모든 상황이 내 주장에 설득력을 실어준다.] “이게 바로, 이 나라의 정치가들이, 지지율이 떨어지는 게 무서워서, 차마 지금껏 드리지 못한 말씀입니다.”

[일단 그럴듯한 명분은 깔았다. 새로운 패를 꺼낸다.]

“......여러분, 이걸 봐주십시오.”

[지금껏 숨겨왔던 마석기술을 전부 풀어버린다.]

“재단 연구소에서 비밀리에 연구한 결과물들입니다.”

[경제 살린다.]

“그리고 이 부분은 마력 치료제를 만드는 기본적인 공법입니다.”

[기업들에게 미끼를 던진다.]

“이건 마력으로 인간의 신체 회복력을 극단적으로 촉진하는 물약입니다.”

[자, 이거 봐라.]

“병과 상처는 회복되지만, 인간의 자연 회복력이 소모되고, 그만큼 수명이 감소합니다.”

[돈 될 것 같지 않냐?]

“지금의 상황이 이러합니다.”

[마석의 수요가 폭등한다.]

“우리는 우리의 수명을 깎아 생존을 거머쥐어야 합니다.”

[마석이 돈이 된다.]

“국민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집도 없고, 가족도 없는 사람들, 수도권의 피난민들과, 수많은 고아, 무연고자들은, 각성자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날 것이다.]

“부디, 국가를 위해 희생해주십시오.”

[그럴듯한 명분까지 있는데 뭘 망설이나.]

“기업과, 정부에도 요청합니다. 하나 되어 국난을 해쳐 나가야 합니다.”

[원래 개발은 자유시장경제로 하는 거다.]

“......부탁드립니다.”

[지금쯤이면 홍선아가 데이비드 김한테 사표를 쓰고 나왔겠지. 천금순의 도움을 받아 민간 PMC를 설립할 거다. 헌터 협회를 만들든, 뭐든.]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과,”

[한승문 재단이 검찰조사를 받기 직전에 GS그룹과 마석사업을 채결했다. 마석은 모두 그녀에게 있다. 반년간 모아온 수많은 마석을 시장에 풀어버릴 것이다. 비교적 안정된 가격의 영양가 있는 시장이 형성된다. 금순이도 독점질했다간 총맞을 걸 모르는 사람은 아니

다. 적당히 해처먹겠지.]

“그 국민의 무궁한 영광을 소망하며.”

[삼권분립의 부활을 통해 굳어버린 나라를 흐르게 하고.]

“부끄러운 말을 마치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혼란과 공포를 국가 개혁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이상입니다.”

[결국 헌터들의 시대가 열린다.]

“......질문, 받겠습니다.”

[편히 가십쇼. 차관님.]

한승문은 순식간에 기자들로 둘러싸였다. 그는 지금껏 말한 연설과, 그가 구상한 대한민국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며 촉촉한 눈시울에 손수건을 두드렸다.

“......”

다만,

피채원은 먼발치 구석에서 남들과는 조금 다른 연설을 들었다.

소녀는 묵묵히 정치가를 바라보았다.

공포, 죽음, 혼란.

그리고 안정과 개혁.

소녀는 땅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해냈고, 소녀는 해내지 못했다.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은 소녀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해내지 못했다.

문득, 동고동락했던 실험체의 검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고통을 이겨내고자 노력하던 처연한 미소와, 노란 호박색 눈물, 그리고 흩뿌려지던 뇌수.

세상이 참 차가웠다. 그래서 소녀는 울었다.

저격당해 죽은 실험체에게 미안했고, 실험체를 저격한 요원의 자살이 불쌍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뤄지는 세상이 싫었고,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자신이 싫었다.

차마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없어서.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싫은 걸 싫다고 말할 수 없어서.

소녀는 텅 비어버린 의자들 사이에 외롭게 앉아, 서럽게 울었다.

*

검사는 내게 내란죄를 씌웠다. 나라가 뒤집어졌지만, 법을 다루는 건 그들이었다.

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그러니까,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4인 앞에 서서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판결! 포기합니다!”

대법원장이 오함마(의사봉)를 집어던졌다. 쓰지도 않는 걸 굳이 가져와서 카메라 앞에다 대고 집어던지는 걸 보니, 정치인해도 참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법관들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법파동司法波動이다.

대한민국 역사에 채 10번도 없었던 그걸 눈앞에서 보다니.

사실 감옥갈 거 각오하고 한 짓이었다. 어차피 피선거권만 박탈당하고서 3.1절 특사로 풀려날 게 뻔했기도 하고.

내가 정치판에서 튕겨난다고 해도, 국민당이 망하지는 않는다. 나는 정신적 상징이자, 정치적 무기로 거론되며 정치판의 분열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족했다.

이제 내가 없어도 나라는 잘 돌아갈테니까.

근데.

“사법부는 거수기가 아닙니다.”

“어떻게 국회의원이 대법원장을 불러서 형량을 결정합니까!”

“법원은 정치범 탄압의 수단으로 쓰일 수 없습니다.”

양판석이 동아줄을 던져줬다.

무죄가 선고되었다.

너구리가 씨익 웃었다.

*

의정부 교도소 앞.

생체실험 혐의로 붙잡혔던 천화란은 두부를 사온 남편에게 꿀밤을 쥐어박고서는 사랑스런 딸내미를 품에 안았다.

“엄마!”

“지윤아...!”

“콩밥 맛있었어?”

“......” 천화란이 사근사근 웃으며 감기자의 귀에 속삭였다.

“내가 애 앞에서 이상한 소리하지 말랬죠.”

“아, 내가 안 그랬어...!”

“하여튼, 두부가 뭐야, 두부가......”

그걸 구경하던 나는 슬며시 검은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괜히 사왔네.

“천 박사님!”

“어머, 의원님!”

“저 때문에 고생 정말 많으셨습니다... 홑몸도 아니신데 괜한 옥살이를...”

“옥살이라뇨. 잠깐 취조 좀 받고 온거지...”

천화란은 따뜻하게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부부가 쌍으로 내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나저나 의원님은 이제 어떡하실 거에요? 완전 스타됐잖아.”

“어제 저녁에 대법원 실시간으로 봤는데. 장난 아니던데요?”

나는 쓰게 웃었다.

“일단 내려가서 가족들 얼굴부터 봐야죠.”

“아......”

“도연이는 통영 내려갔었는데. 저 보러 다시 올라오는 길이랍니다.”

“저런......”

미래가 훤히 보인다. 울면서 때리겠지 뭐. 나는 처연히 웃으며 설렁설렁 손을 흔들었다.

“날씨도 찬데, 어디 들어가시죠?”

“아, 예.”

“지윤아, 뭐 먹으러 갈까?”

감지윤은 대답이 없다.

“지윤아?”

그러고 보니 처음 봤을 때도 이랬다. 파아란 게 둥둥 떠다닌다며, 주변에는 신경도 안 쓰고 마력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윤-”

“파아-래.”

“으응...?”

감지윤이 먹구름 낀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늘이 파아래.”

EP 9

진인사대천명 盡人事待天命

제갈량諸葛亮의 고사故事

: 사람이 할 일을 마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

: 아무리 뭐 빠지게 노력해봐야, 운이 안 좋으면 다 말아먹는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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