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릭스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내가 아는 미소다.’
칼릭스는 평소 잘 웃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기분 좋을 때는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미미한 미소를 보여주고는 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나도 안심이 됐다.
“……화 안 났어요?”
솔직히 나 역시 칼릭스가 내 희생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나를 많이 원망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칼릭스는 예상외로 차분했다.
“화 같은 거 안 났어.”
칼릭스가 조각 같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내가 너한테 화낼 주제가 되나.”
“…….”
“널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됐어.”
하지만 어쩐지 칼릭스의 푸른 눈동자에선 광기가 느껴졌다.
콰앙!
그 순간 마왕이 있던 자리에서 폭음이 터졌다.
칼릭스가 재빨리 나를 휙 안아 들고 폭발이 일어난 자리를 피했다.
“무의미한 발버둥이다.”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마왕의 기운이 점점 퍼지며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고작 인간 하나 더 해진 것으로 마왕인 이 몸을 막을 수 있다 생각하느냐?”
마왕의 검은 기운이 날카로운 창칼로 변해서 칼릭스와 내 근처로 날아왔다.
“꽉 붙잡아.”
칼릭스는 나를 붙잡은 채 민첩하게 마왕의 공격을 피해갔다.
‘쉽지 않겠어.’
아직은 마왕의 공격이 닿지 않지만, 계속 이렇게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문제는 마왕을 공격할 방법이 없어.’
신성력이 아니고서는 마왕에게 타격을 주기 어렵다.
‘나는 지금 신성력을 사용하기 힘들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자리오를 붙잡고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보석이 깨진 로자리오가 진동하며 알 수 없는 기운이 내 몸에 침범하는 게 느껴졌다.
“큽.”
가슴이 뜨거워지며 고통이 찾아왔다.
“괜찮아?”
칼릭스가 푸른 눈으로 집요하게 나를 훑었다.
“설마 내가 피하지 못한 공격이-”
“그런 거 아니에요. 신성력을 쓰려고 했는데 제 마음대로 안 움직여서 그래요. 신성력을 너무 써서 그런가?”
푸욱!
마왕이 날린 검은 칼날이 마구 날아와 꽂혔다.
“이런.”
칼릭스가 기민하게 뒤로 물러나며 칼날을 피했다.
나를 걱정하느라 조금 늦어서인지 팔 부근이 베이며, 얕은 상처가 생겼다.
“칼릭스-”
“별거 아니야.”
“과연 그럴까?”
마왕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겠지만, 점점 상처가 늘어갈수록 그렇지 않게 될 거다.”
마왕의 시선이 칼릭스의 품 안에 있는 나를 향했다.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네게 잡혀 지옥 같은 고통을 맛보는 것뿐이다.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는 너는 더 큰 짐이 되겠지.”
마왕의 발이 닿은 자리는 오염되는 것처럼 더욱 어둠이 짙어졌다.
‘저 위치에 가기만 해도 중독될 거야.’
하지만 마왕의 말대로 신성력을 쓸 수 없는 이상 마왕에게 타격을 줄 수 없다.
‘왜 신성력을 쓸 수 없는 거지?’
그런 내 표정을 읽은 듯, 마왕이 친절히 몇 마디를 덧붙여줬다.
“참고로 이 공간은 이미 내가 지배하고 있다. 마왕의 영역에서 감히 더러운 주신의 힘 따위를 쓸 수는 없을 거다.”
“…….”
“성녀여, 너는 내 제안을 거절한 걸 끝없이 후회하게 될 거다.”
마왕의 갈라진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
칼릭스가 내 귓가에 말했다.
“저딴 놈 내가 바로 치워줄 테니까.”
“연인 앞이라고 허세를 부리는 것이냐?”
“허세일지 아닐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우습구나.”
마왕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과 함께 주위를 오염시키는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다행히 아기인 내가 들어 있는 빛뭉치는 아직 마왕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고 잘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러다간 저 빛뭉치도 마왕에게 잡아먹힐 것 같은데…….’
어째 과거의 나도, 지금의 나도 멀쩡하긴 어려워 보였다.
“칼릭스, 괜찮겠어요?”
칼릭스는 평소의 무심한 얼굴로 나를 내려줬다.
“상대는 마왕이에요. 신성력이 아니고서는…….”
“알아, 평범한 힘으로는 안 되지.”
칼릭스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흔들림 없는 눈빛.’
바다처럼 깊은 눈동자가 심연처럼 고요했다. 칼릭스가 내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나, 내가 네 저주를 받은 이유가 뭔지 알아?”
“내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그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 대공비님께서는 그것보다 더 먼 미래를 보셨던 것 같거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처음엔 단순히 네 목숨만을 위해서 필요한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마왕의 어둠이 해일처럼 몰아쳐 온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어.”
칼릭스가 나를 뒤에 둔 채 어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검을 집어 들었다.
“잘 봐.”
검날에 무형의 기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