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혹독한 밤이 되었다.
밤하늘은 마왕의 위협적인 마기에 물들어 별조차 뜨지 못했다.
유일한 별처럼 반짝이던 나나마저 마왕의 봉인구를 향해 날아가자, 세상 전체가 어둠으로 덮인 것 같았다.
마왕의 기운에 영향을 받은 마물은 더 광폭해졌다.
쥬테페는 검으로 다가오는 마물을 베어낸 뒤 발로 재생하려는 몸뚱이를 짓밟았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전황은 나쁘지 않다.
마물의 수가 증가하고 있지만, 슬라데이체와 성기사들은 마물에게 밀리지 않고 있었다.
“성녀님께서 마왕을 봉인하실 때까지 지켜야 한다!”
“성기사로서 더 이상 신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을 유일한 기회다! 목숨을 걸고 지켜내!”
이대로라면 나나가 봉인할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다.
‘나나의 눈빛이…….’
어쩐지 영영 이별하는 것처럼 슬퍼 보였다.
‘아무리 성녀라도 마왕을 봉인하는 걸 확신할 수 없어서 그런가?’
하지만 쥬테페는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짜 미소 짓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었는데.’
세상 사는 데 필요하다고 가르쳐 줬더니 쥬테페 본인조차 나나를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하여튼 멍청할 정도로 순진하던 애가 언제 그렇게 다 컸다고…….’
그 순간 쥬테페는 숨이 막히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그러고 보니 나, 요새 나나가 뭐 하는지 다 알고 있었던가?’
최근 나나는 매우 바빴다.
황태자 계승식에, 상단 일, 성녀로서 하는 일들이 몰려서 아주 정신없어했다.
‘일정은 다 파악하고 있었어.’
하지만 쥬테페도 나나 못지않게 바쁜 사람이었다.
집착과 집념의 슬라데이체답게 매의 눈을 켜고 나나의 안전을 확보했지만 항상 따라다니지는 못했다.
‘그래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나나는 거짓말을 잘못하는 아이니까.
굳이 나나가 슬라데이체 전체를 속일 이유가 없으니까.
‘오히려 우리가 나나를 속이느라 애썼지.’
특히 공범 중 하나인 벨리알은 거짓말을 잘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쥬테페는 벨리알이 실수로라도 친딸에 대한 얘기를 흘릴까 봐 촉각을 기울였다.
다행히 나나도 바쁘던 상황이라 잘 숨길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나 역시 우리처럼 우리에게 뭔가를 속이려 했었다면?’
그 순간 평소의 나나답지 않았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가족들이 자신에게 비밀로 하는 게 있는 것 같다면, 바로 달려와 벨리알을 꼬드겨 진실을 털어가던 나나.
쥬테페를 붙잡고 협박하든, 아빠에게 달려가 어리광을 부리든 해서 아무것도 못 숨기게 만들곤 했는데.
‘정말 나나가 아무것도 몰랐을까?’
쥬테페는 방금 전 나타난 디트리히라는 마족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
“정신 차려!”
그 순간 벨리알의 검이 쥬테페 근처에 있는 벌레 마물을 꿰뚫었다.
“똑똑한 놈이 갑자기 왜 그러고 있냐. 빨리 검 들어.”
쥬테페의 녹금안에 재가 되어 부스러지는 벌레 마물이 담겼다.
까딱 잘못했으면, 큰 부상을 입을 뻔했다.
“뭐 하냐. 너, 뭐 잘못 먹었냐?”
평소라면 자존심 상해서라도 잘난척했을 쥬테페가 가만히 있자, 벨리알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 힘들면 이 형님 뒤에 숨어라도 있-”
“형.”
쥬테페가 고운 입술을 깨물었다.
“나나가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해?”
벨리알이 별 불쾌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말이 씨가 되는 수가 있다.”
“그냥 하는 소리 아니야. 나나가, 우리한테 숨기는 게 있었어. 형도 방금 전 마족 처음 보잖아.”
“그건.”
“생각해 보면 나, 최근 나나가 뭘 준비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쥬테페의 녹금안이 어두워졌다.
“형은 성녀가 마왕을 어떻게 봉인할 수 있는지 알아?”
“……야, 너.”
“아무리 급해도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 아니다, 그 녀석이 뭘 생각하는지 억지로라도 캐묻고 안전하게 집에 가둬-”
벨리알이 쥬테페의 양어깨를 강하게 붙잡고 흔들었다.
“쥬테페! 너 지금 제정신 아닌 거 아냐?”
“내가 방심했어. 나나를 잃게 되면 나는…….”
쥬테페는 영리하다.
그래서 언제나 최악의 가정을 두고 움직였다.
주변에 사람을 두지 않던 것도 반쯤은 그래서였다.
사람은 언제나 변하고, 불안정한 것에 믿음을 줄 만큼 쥬테페는 멍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나는 예외였어.’
쥬테페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랑스러운 여동생에게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랬다면 더 철저했어야 했는데.’
어느새 나나한테 너무 물들여버린 모양이다.
대책 없이 그 애를 믿고, 그 애의 마음을 더 우선시하게 되어버렸다.
-네 방심이 나나를 죽인 거야.
머릿속에서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불안한 생각이 커졌다.
-나나가 죽고 나면, 너는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너를 너로 봐주는 사람이 세상에 남아 있을까?
‘닥쳐.’
-그 똑똑한 머리로 한번 생각해 봐.
-그 착한 나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진 게 너무 이상해서, 영영 돌아올 것 같지 않아서 이렇게 불안한 거잖아. 아니야?
키에에에엑!
마물의 처절한 비명이 머리 위쪽에서 들리는 듯싶었다.
촤아악-
벨리알이 쥬테페를 끌어안고 마물을 베어 죽였다.
마물의 피가 벨리알의 온몸에 후두둑 떨어졌다.
“아씨. 또 묻었네.”
벨리알은 기분 나쁘다는 듯 피를 최대한 털어냈다. 반대로 쥬테페는 거의 피가 묻지 않았다.
‘벨리알이 신경 써줘서.’
쥬테페가 눈을 끔뻑이자, 벨리알이 쥬테페의 등을 퍽퍽 쳤다.
“야, 넌 가서 쉬어, 이 형이 알아서 다 할 테니까.”
“형이 뭘 어떻게 다 해.”
“어허, 이게 형님을 우습게 아네. 형님이 알아서 할 수 있다니까?”
벨리알은 너스레를 떨며 마물을 향해 뒤돌았다. 벨리알이 검을 들려는 순간, 쥬테페가 그에게 물었다.
“형은 안 무서워?”
쥬테페는 벨리알이 호기롭게 다 때려 부수겠다며 소리 지를 거라 여겼다.
그게 단순무식한 벨리알이니까.
“무섭다, 인마.”
쥬테페의 두 눈이 커졌다.
‘형이 힘든 걸 인정했다고?’
벨리알이 아무렇지 않게 씩 웃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냐, 돌아올 때까지 믿고 모두를 지키는 수밖에.”
“형은…….”
“그러니까 너도 무리하지 말고 있어. 그러다 다치면 내 손에 죽는다. 알겠냐?”
벨리알은 쥬테페한테 어깃장을 놓으며 눈앞의 마물을 다시 학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쥬테페의 눈에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형이 강해졌어.’
패도적으로 마물을 없애기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벨리알은 단순히 마물만 없애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군을 공격하려는 마물을 최우선적으로 처리하고, 적을 없애는 것보다 아군을 지키는 데 애쓰고 있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