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
바이칼로스 공작이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무작정 찾아와 뵙게 해달라는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녀님.”
오랜만에 만난 바이칼로스 공작은 여전히 젊고 근사했다.
깔끔하게 넘겨 올린 붉은 머리카락. 늑대처럼 선명한 회색 눈동자.
‘하지만 느낌이 변했어.’
자긍심으로 가득했던 얼굴은 피로로 초췌하게 질려 있고, 급히 달려왔는지 옷도 조금 구겨져 있었다.
‘언제나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라던 사람인데.’
그래서 바이칼로스 공작을 보는 게 조금 어색했다. 나에게 너무 깎듯이 굴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바이칼로스 공작이 제법 고생했다고 했지.’
리미에가 떠난 이후.
제국 최고의 명문가였던 바이칼로스 공작가의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뿐만 아니라 알짜배기 영지를 잃고, 리미에의 이름을 벌인 사고를 수습하느라 다른 귀족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다른 가문도 아닌 바이칼로스가.’
바이칼로스 공작가는 어찌 보면 슬라데이체보다 더 콧대가 높은 가문이었다.
바이칼로스 공작가는 슬라데이체와 달리 스스럼없이 귀족들 사이에서 군림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를 급히 찾으신 연유가 무엇인가요?”
“……한때 바이칼로스의 양녀였던 리미에 때문입니다.”
“리미에에 대한 건 저번에 다 얘기하지 않았던가요?”
저번에 피아르와 에이든이 나한테 잘 보이겠다면서 리미에에 대한 정보를 모두 긁어서 가져온 적 있었다.
물론 직접 만난 적은 없다.
‘이깟 걸로 우리 도토리한테 용서받을 셈이야? 턱도 없어.’
‘지금 이렇게 슬라데이체에 올 정신이 있나? 내가 알기로 바이칼로스가 아직 해결 못 한 게 제법 되는 걸로 아는데.’
쥬테페랑 벨리알한테 다 가로막혀서.
그렇게 쌍둥이는 매번 뇌물을 줄줄이 가지고 오면서도 내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리미에에 대해 새로운 정보 같은 것도 없었고.’
바이칼로스 공작이 절도 있는 자세로 말했다.
“예, 제 부족한 아들을 통하여 종종 리미에에 대한 소식을 전해드리곤 했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워낙 급한 소식이라 제가 직접 왔습니다.”
“무엇인가요?”
“외람되지만 성녀님, 혹시 리미에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바이칼로스 공작의 표정이 너무 비장했다.
“리미에의 정체는 전대 성녀였습니다.”
“그것도 마왕에게 붙은?”
“예, 맞습니다. 마왕에게 붙은- 아니. 알고 계셨습니까?”
“대충은요?”
바이칼로스 공작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바이칼로스 공작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공작님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되신 건가요?”
“그건.”
바이칼로스 공작의 회색 눈동자가 흐려졌다.
“리미에가 다시 저희에게 접근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