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150/172)

나는 멍하니 칼릭스를 바라봤다.

“……거짓말.”

칼릭스의 흑발에 오싹한 자주색과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다.

“거짓말이죠?”

“아니, 사실이야.”

칼릭스는 조금도 부정하지 않았다. 분명 내가 알던 칼릭스 그대로였지만,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바다처럼 푸르렀던 눈동자는 피처럼 붉게 변했다. 슬라데이체의 붉은 눈동자와도 다른 더 깊고 진득해진 눈동자.

‘인간이 마족이 될 수도 있단 말이야?’

하지만 칼릭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그 사실을 되새겨주었다.

“칼릭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나는 울먹거리며 칼릭스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칼릭스가 묵묵히 입을 열었다.

“네가 본 그대로다.”

“제가 본 게 뭔데요!”

“난 성녀인 네가 해치워야 할 마족이다.”

“하, 하지만 칼릭스는 원래 인간이었잖아요. 그런데 왜 마족이-”

사실 짚이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굳이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미안해.”

자신의 저주에 갇혀서 죽을 뻔했던 칼릭스가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는지.

“한 번만이라도 네 얼굴을 보고 싶었다.”

굳이 칼릭스가 정보 길드장의 신분으로 나를 만났던 이유.

“내게 남은 방법이 이거밖에 없었어.”

저주에 갇힌 뒤 벌어진 일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던 이유.

‘나도 칼릭스가 쉽게 돌아왔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어찌 보면 마족이 된 것과 상관없이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했다.

“칼릭스가 마족이 되면 우리가 갑자기 적이 되어서 싸워야 하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눈앞에 뜬 상태창을 부정했다.

‘에비, 지지다! 지지!’

“내가 성녀라서 마족과 싸워야 한다 해도, 난 칼릭스를 없애지 않을 거예요. 마족이든 인간이든 칼릭스는 여전히 칼릭스니까요.”

“……그러면 안 돼.”

“왜 안 되는데요?”

일부러 말이 삐딱하게 나왔다.

칼릭스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말했다.

“지상에 마족이 남아 있는 한, 마왕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니까.”

목소리만 들으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처우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네 안전을 위해서라도 내가 반드시 사라져야 해.”

“…….”

“걱정 마. 당장 사라지는 건 아니야. 성녀인 네 곁에서 더 이상 정체를 숨길 순 없으니, 좀 떨어져서 지내야겠지만.”

“지금까지는 일부러 힘을 누르면서 위장했던 거예요?”

“그렇지. 제국에서 마족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니까.”

“성녀인 제 곁에서는 유난히 힘이 소모돼서 곁에 있기 힘들다고요?”

“네 잘못 아니야.”

그때랑 똑같은 얼굴이다.

“내가 너를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욕심낸 거다.”

저주 속에서 나를 보낼 때 짓고 있던 그 얼굴.

나는 칼릭스를 꽉 끌어안았다.

“시끄러워요!”

눈가에서 눈물이 울컥 솟아 줄줄 흘렀다.

“제가 뭐라고 했어요? 이런 식으로 희생한다고 제가 기뻐할 것 같아요?”

삐죽삐죽 화가 솟았다.

“이러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저랑 한 약속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렇지 않다.”

“그러면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이번엔 절대 안 넘어갈 거니까요.”

칼릭스의 마기와 내 신성력이 반발하는 게 느껴졌다.

“슬라데이체는 마족이 인간이 되었다는 얘기가 있는 가문이에요.”

내 귀로 직접 들은 이야기니 확실하다.

“칼릭스도 돌아올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나는 반발하는 기운들을 억지로 무시하며 칼릭스를 올려다봤다.

“그러니 그렇게 쉽게 칼릭스를 포기하지 말아요.”

그러자 칼릭스는 엄지로 붉어진 내 눈가를 문질러주었다.

“웃게 해주고 싶었는데, 계속 울리기만 하네.”

“칼릭스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너는 항상 그랬지.”

칼릭스가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내 눈가와 콧등, 입술까지 내려왔다.

“언제나 아무것도 나를 비춰주려고 애써주는 햇살이었어.”

촉,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조금 더 짙어졌다. 내 허리를 감은 칼릭스의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그 역시도 이제 나를 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 * *

어두운 밤.

세라피나 황후는 누구보다 당당하게 황제의 처소를 찾았다.

황궁에서는 중간부터 그녀를 발견한 듯했으나, 황제의 명이 있었는지 황후의 앞을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끼이익-

고요히 황제의 방문이 열렸다.

이오카르 황제는 턱을 괸 채 우아하게 서 있는 황후를 보고 물었다.

“도망칠 줄 알았더니, 제 발로 돌아왔군.”

“저는 이 제국의 황후입니다. 어찌 황궁을 두고 다른 곳에 가겠습니까.”

황제의 코앞까지 다가간 황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일라를 살리려 하십니까?”

“그래.”

“무고한 제국민과 제 아들의 목숨을 죄 바쳐서요?”

“문제가 있나?”

황제의 얼굴에선 일말의 가책도 느껴지지 않았다.

“짐의 것을 짐이 원하는 데 사용하려 할 뿐이다.”

오히려 황제는 그런 황후의 질문이 무가치하다는 듯 물었다.

“고작 그런 것을 물어보려고 이 자리에 온 것이냐? 그럴 거면 애초에 돌아오지 말지 그랬느냐.”

“…….”

“너 역시 짐의 대답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

황후는 황제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리운 것을 보듯 황제의 처소를 쭉 둘러봤다.

화려한 처소 곳곳에 제국의 영광을 드높이는 그림과 상징들이 놓여 있었다.

“맹세컨대 폐하께 어떤 것도 부탁한 적 없습니다.”

황후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 깊은 곳에선 내내 억누른 감정이 천천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폐하께 사랑해 달라 애원한 적도, 무엇을 요구하거나 매달린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오카르 황제는 비인간적일 정도로 무심한 얼굴로 되물었다.

“짐이 그리하라 했던가?”

“제가 알아서 한 일일 뿐입니다. 황후로서 해야 할 당연한 일이었으니. 하나!”

세라피나의 목에 핏줄이 섰다.

“함부로 무고한 제국민의 목숨을 제물로 바친 데다가 에스테반을 바치시다니요.”

그녀가 형형한 보라색 눈동자로 황제를 노려봤다.

“그것은 황제로서 결단코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인간으로서도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황제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황태자가, 에스테반이 제 아이기만 합니까?”

황후는 그런 황제를 증오스럽게 노려보며 일갈했다.

“에스테반은 폐하의 자식입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어떻게 자신의 피를 이은 아들을…….”

이오카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격분한 황후를 내려다봤다.

“짐이 황후에게서 들을 말은 아닌 듯한데.”

“뭐라고요?”

“황후도 짐과 마찬가지로 황태자를 도구 취급하지 않았나?”

그 순간 황후의 얼굴이 백지처럼 하얗게 질렸다.

“저, 저는…….”

“짐은 오히려 지금 황후의 반응이 더 이해가 되지 않는군. 갑자기 왜 황후답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거지?”

황제는 파리하게 질려 부들부들 떠는 황후를 비웃었다.

“이대로 황후 자리라도 잃을 것 같아 새삼 없던 모정이라도 들먹여야 할 것 같았나?”

황후는 말문이 막힌 것처럼 황제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황제도 딱히 황후에게 어떤 대답을 듣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황후의 의견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말거라. 돌아올 레일라를 위해 황후도 멀쩡히 살아있어야 할 테니까.”

“…….”

“레일라가 돌아왔는데 죽음의 원인이었던 황후가 죽어 있다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레일라는 강제로 황후가 된 뒤 가족들뿐만 아니라 전 약혼녀인 세라피나에게도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레일라의 죄책감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황후는 멀쩡히 잘 살려둘 거다. 말을 잘 듣는다면 그토록 원하던 자리에 둘 수도 있고.”

“-크흡!”

그 순간 악에 차 화를 억누르던 황후가 두 손으로 얼굴을 묻으며 기괴한 웃음소리를 냈다.

“레일라가 살아 돌아온다고요?”

“뭐가 우습지?”

“그녀가 돌아오면 이번엔 뭐가 달라질 것 같습니까? 그것참 폐하답군요.”

세라피나의 보라색 눈동자가 광기에 차 번뜩였다.

“폐하, 레일라는 폐하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 입 다물라.”

“살려봐야 무엇하겠습니까? 시체를 끌어안고 사는 지금과 달라질 것 하나 없을-”

짜악!

황제가 황후의 뺨을 후려쳤다.

얼마나 힘이 셌던지 황후는 벽까지 날아가 부딪쳤다. 뺨이 퉁퉁 부풀어 오르고,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곱게 말해줬더니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떠드는구나.”

황제가 이를 아득 갈며 황후를 노려봤다.

“하나 너 같은 게 할 수 있는 게 고작 그런 것뿐이겠지. 어디 한번 혼자 남은 방에서 독사 같은 말을 마음껏 지켜보라.”

황제는 성큼성큼 방을 빠져나갔다. 황제가 사라진 방에 소름 끼치는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황후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따가운 제 뺨에 가만히 손을 댔다.

“……뜨겁구나.”

세라피나는 일평생 감정이 그리 깊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세간에서 흔히 조롱하듯 평하는 얼음 인형이나 독화 같은 별명에 내심 동의하곤 했다.

세라피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제법 인간 같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아이를 낳고도 그 냉정함은 여전했다. 황태자를 품에 안고도 아무 감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를 황태자로 삼아 황제로 만들어야겠다. 그리하여 절대 최고의 권력을 쥔 황태후가 되겠다.

딱 그 정도였다.

‘그 정도였을 뿐인데.’

그런데 참 이상했다.

“어찌 이리 뜨거울까.”

세라피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리 뜨거워도 되는 것인가?”

입가에서 피가 흐를지언정 여전히 눈에선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은 평소 같지 않았다. 불타는 무언가가 세라피나를 뒤엎었다. 일평생 막아두었던 것이 한순간에 터져 나와 휘몰아쳤다.

어쩌면, 황태자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제물로 바쳐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그 순간부터 그랬을지 모른다.

“저 같은 게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셨습니까?”

세라피나는 붉은 입꼬리를 비틀며 정신 나간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황후는 아무 생각 없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한번 기다려 보세요.”

하지만 그럴 거였다면 애초에 감옥을 나와 탈출하지도, 나나와 헤어지지도 않았으리라.

“실권도 다 잃은 제가…….”

어떻게 당신의 소망을 산산조각 내는지. 어떻게 당신이 절망하게 될지.

어디 한번 지켜보세요.

* * *

슬라데이체에 돌아가자마자 슬라데이체의 역사에 대해 잔뜩 뒤졌다.

하지만 나도 저번에 마족을 만나 처음 알았던 만큼 새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없었다.

[마족은 악 그 자체인 마왕에서 파생되었으며, 신의 뜻과 축복을 부정하기 위해 존재한다.]

 

‘마족에 대한 얘기라 그런가, 쉽게 찾을 수가 없네.’

그때 슬라데이체에 황후의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황제가 제국민을 제물로 바치고 있는 장소다.]

[리미에는 이 장소를 통해 전 황후 레일라를 되살리고, 제힘을 되찾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제물 의식부터 막아야 한다.]

 

황태자 계승식까지 하루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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