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151/172)

황태자 계승식.

그동안 에스테반이 황태자로서 오랜 시간 공고히 자리 잡고 있었기에, 이번 황태자 계승식이 의미하는 바는 굉장히 컸다.

그래서 계승식은 많은 시선을 끌었다.

짧은 일정 동안 제국의 전 귀족들은 물론이고, 멀리 떨어진 왕국 귀족들마저 모두 모였다.

“그나저나 이제 황태자가 되실 칼릭스 황자는 어떤 분인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간 저주로 인해 계속 지워진 황족이었던 탓에…….”

“하긴, 연결 고리라고는 정말 슬라데이체 공녀뿐이고.”

“에스테반 황자는 정말 가망이 없어진 건가? 그 세라피나 황후가 불참할 걸 보면 어련히 그러겠냐만은.”

계승식의 가장 위에 위치한 황족의 자리, 그리고 그 근처로 슬라데이체 대공가 사람들이 보였다.

“칼릭스 황자가 슬라데이체 공녀와 아주 깊은 관계라던데요.”

“안 그래도 슬라데이체 대공가의 권세를 이기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정확히 정오가 되었다.

황궁에서 대기 중이던 칼릭스가 황태자의 정복을 입고 모두의 앞에 나타났다.

와아아아아-!

고결한 황태자의 등장에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그동안 칼릭스는 몇몇 파티에 참석하긴 했지만, 이렇게 공식적인 행사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히 황태자 계승식은 제국 전체의 일이기에 전 제국에 수정구를 통해 생중계된다.

‘저분이 폐태자셨다는 새 황태자 전하?’

‘세기의 미남이라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어. 정말 빛이 나도록 근사한 미남이야.’

‘황족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실종되었다길래 만만하게 봤는데, 분위기를 봐선 에스테반보다 더 어려워 보이는걸.’

칼릭스는 주위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우아하게 황제의 앞까지 걸어가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태양인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칼릭스 황자, 고개를 들라.”

황제는 칼릭스의 뒤에 모인 사람들에게 천천히 시선을 두며 말했다.

“그간 칼릭스 황자는 저주로 인해 지워진 황족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하나 신의 은총으로 저주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검증된바.”

이오카르 황제가 칼릭스 어깨 위에 황제의 검을 가까이 대었다.

“칼릭스 황자의 황족 직위를 복위시키고, 그 지위에 걸맞은 황태자 위를 내리려 한다.”

황제가 황태자에게 검을 내렸다.

“황자 칼릭스, 황태자가 되어 이 제국을 수호할 것을 맹세하겠나?”

“예, 폐하.”

칼릭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황태자의 검을 받아들었다.

“이제부터 황자 칼릭스는 제국의 황태자가 되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장차 제국의 주인이 될 자로서 제국에 인사하라.”

이오카르 황제는 옥좌로 돌아갔다. 칼릭스가 황태자가 된 소감을 밝히기 위해 제국민 앞에 섰다.

하지만 황제가 주시하고 있는 곳은 칼릭스가 아닌 슬라데이체였다.

중앙에 앉은 슬라데이체 공녀를 필두로, 아벨 슬라데이체만 제외하고 모두가 참석한 상태였다.

‘아주 정신이 팔렸군.’

첫째인 아벨이 계승식에 오지 않은 게 거슬리기는 하나, 가장 중요한 나나와 대공이 이 자리에 있으니 상관없었다.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슬라데이체 대공가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단시간에 처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파악하지 못하게 일을 주면 되겠군.’

 

칼릭스는 에스테반과 가장 비교당할 자리에 올라서 있다.

그런 만큼 이 계승식에서 실수하는 모습을 보여줘선 안 된다. 그러면 에스테반에 비해 무능하단 이미지를 얻게 될 터이니.

‘칼릭스를 황태자로 밀고 있는 슬라데이체도 계승식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 증거로, 어제까지만 해도 의식을 치르는 황족의 무덤에는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고 있었다.

‘이제 와서 뭔가를 한다 해도 늦었다.’

칼릭스가 제국민들 앞에 섰다.

이오카르 황제는 계승식에 붙잡혀 있는 지금 이 순간마저 족쇄처럼 느껴졌다.

‘레일라가 돌아온다.’

이오카르가 잃어버린 제 사랑을 떠올리며 그리움에 잠기던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황태자가 된 자로서, 제국을 위해 이오카르 황제의 죄를 고발하려 한다.”

칼릭스가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오카르 황제는 제국민과 전 황태자를 이용해 금지된 의식을 치르고 있다.”

* * *

단 한 문장이었지만, 그 문장이 주는 파급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귀족 중 하나가 칼릭스에게 소리쳤다.

“그러면 황제 폐하께서, 제국에서 금지한 흑마법을 사용하고 계신단 겁니까?”

“그렇다.”

당연히 이 모든 반응은 계획된 대로였다.

“제국의 가뭄과 계승식으로 제국이 소란해진 틈을 타 금지된 의식을 치르는 중이다.”

“그 입 다물라!”

이오카르 황제가 노성을 지르며 일어났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그런 망발을 지껄이느냐?”

“어째서 망발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말이 진실이란 말이냐?”

이오카르 황제는 잠시도 참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짐의 판단이 잘못되었다. 그간 저주받은 황자로 유폐되어 있었다고 이 황실 자체를 무너뜨리려 하다니!”

모두가 술렁거렸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요?”

“돌아온 칼릭스 황자가 황실에 앙심을 품고 명예를 더럽힌 것이라 하지 않나?”

“하나 칼릭스 황자의 뒤에는 성녀인 공녀님도 계시지 않나? 성녀님께서 함께하고 계신 칼릭스 황자가 왜 그런 경솔한 일을 하겠소?”

“내 생각도 그렇네. 지금 황제 폐하의 반응도 단순히 모함이라기엔 너무 평소와 다른데…….”

“어허! 지금 칼릭스 황자의 발언이 어디 평소 같은 일인가.”

스르릉-

눈이 뒤집힌 황제는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당장 짐의 손으로 너 같은 오물을 처단하여 황실의 명예를 바로잡겠다!”

“폐, 폐하! 고정하십시오!”

“제국민들이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검을 놓기는 했어도, 이오카르 황제는 검술에 일가견이 있는 몸이었다.

캉!

칼릭스의 검과 황제의 검이 부딪쳤다. 하지만 칼릭스가 받은 황태자의 검은 의례용이기에 내구도가 부족했다.

몇 번의 공방만으로도 조금씩 검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참사가 벌어지기 직전.

“폐, 폐하를 막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마법사는 무엇을 하는 게냐? 상황이 이 모양이면 알아서 마법을 중단하라!”

주변의 귀족들이 수습을 위해 나섰지만, 황제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칼릭스뿐이다.

‘칼릭스를 바로 죽여야 한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황태자가 임명되자마자 처형당했다는 소식 정도면, 적당히 눈 가릴 시간은 벌 수 있다.

‘그런데 왜…….’

처음 검을 부딪쳤을 때, 칼릭스는 분명 겨우 황제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전투는 마무리되지 않고 있었다.

칼릭스는 갈라진 검으로 황제의 공격을 계속 막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점점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나보다 검술이 뛰어나다고?’

황제는 칼릭스가 얼마나 방치되어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칼릭스가 받은 대우는 모두 황제가 레일라에 대한 분노로 저지른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후가 칼릭스를 죽일 수 없도록 막은 것도, 그가 방치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숨만 붙이고 살 게 한 것도.

모든 것이 황제의 허락 없이 죽어버린 레일라의 죗값이었다.

그래서 도리어 황제는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 것인지 실감하게 되었다.

“이건-”

“이 정도가 다입니까?”

챙!

칼릭스는 무심히 검날로 황제의 검을 흘려보냈다.

검과 검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무시무시한 선을 그려냈다. 멀쩡한 황제의 검과 달리 칼릭스의 검에 새겨진 균열은 점점 커져만 갔다.

하지만 황제는 이 상황이 그리 쉽게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겨우 이 정도였습니까?”

황제와 칼릭스의 눈이 마주쳤다.

‘저놈이!’

평생 누군가에게 천대받은 적 없는 황제의 자존심을 짓밟는 듯한, 비웃음조차 없는 고요한 눈동자.

“시끄럽다!”

다시 한번 서로의 검이 부딪쳤다. 두 손으로 검을 쥔 황제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무엇하느냐!”

수세에 몰린 황제가 이를 아득 깨물었다.

“계획이 실패하자 짐의 목숨을 노리는 반역도다! 기사들은 서둘러 짐의 목숨을 구명하라!”

기사들이 황제의 외침에 따라 검을 뽑아 들었을 때였다.

공중에서 전송되고 있던 영상이 바뀌었다. 기사들은 기세 좋게 뽑아 들었던 검도 멈춘 채 멍하니 영상을 바라보았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흑마법의 제물로 바치는 일만은……!

영상의 배경은 아주 어두웠지만, 내부를 짐작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바닥에 새겨진 심상치 않은 마법진, 제물처럼 제단에 묶인 채 쓰러져 있는 제국민들.

근처엔 이미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들이 화면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폐, 폐하. 정녕 칼릭스 황자의 말대로 제국민을 제물로 바쳤습니까?”

“그렇다면 저 중에 전 황태자였던 에스테반 황자도…….”

화면 속에서 비장한 외침이 들렸다. 거친 발걸음과 함께 등장한 기사단이 흑마법 제단에 장식되어 있는 비석들을 부서뜨렸다.

-신호가 왔다! 살아 있는 자를 구출해라!

-시간이 없다! 흑마법이 작동하기 전 모두 구해내야 한다!

슬라데이체의 인장을 단 기사들이었다. 사람들이 호흡을 삼켰다.

“스, 슬라데이체에서 저들을 구하기 위해 기사단을 파견했나 봐요.”

“저기 보세요, 신성력이-!”

희게 빛나는 신성력이 흑마법 제단에 몰아쳤다. 화면 위로 경건하게 두 손을 모은 헬리오스 대신관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 흑마법 의식을 파괴하고 생존자를 구출하는 데 집중해 주십시오. 제가 뒤에서 여러분을 지키겠습니다.

대신관의 등장에 구출 장면을 보고 있던 제국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세상에, 대신관님이시다!”

“역시 대신관님께서 나서실 줄 알았어.”

이오카르 황제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뭔가 잘못됐다.’

적들에게 장소가 노출될 수 있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황제의 계산대로라면, 황태자 계승식이 지속된 지금 이미 부활 의식은 모두 끝난 상태여야 했다.

‘생각해 보니 갑자기 영상이 바뀐 것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황제의 시선이 중계를 맡은 마법사들을 향했다. 황궁 마법사들은 이미 기진맥진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 순간 황제의 눈이 가만히 있는 슬라데이체 공녀를 향했다.

슬라데이체 대공가는 소란 속에서 황가의 기사단이 상황에 개입하지 못하게 철저히 막고 있었고, 공녀는 가만히 서서 황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너였구나.”

챙캉-!

그 순간 칼릭스의 검이 황제의 검을 강타했다.

황태자의 검이 부서졌다.

검날이 파편이 되어 튀자, 황제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크윽!”

고통 속에서 눈을 뜬 순간, 어느새 들고 있던 황제의 검은 칼릭스의 손에 들려 있었다.

황제의 검이, 황제를 목을 겨누고 있다. 칼릭스가 황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 끝났다.”

황제는 허망한 눈으로 나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안 거지?”

“이제 와서 그게 중요한가요?”

나나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며 걸어왔다.

“당신이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모두에게 알려졌다는 게 중요하죠.”

* * *

부활 의식은 막았다.

황제의 잘못도 모두 까발리고, 신병을 사로잡았다.

‘이제 리미에만 잡으면 돼.’

그때 나를 바라보던 황제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황제가 광기에 차 폭소했다.

“크하하하! 그런 거였나?!”

누가 미친놈 아니랄까 봐 갑자기 자기 혼자 웃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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