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9화 (149/172)

황후는 많은 시녀를 뒀다.

하지만 그중 자기 곁에 두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제인이잖아.’

황후를 보러 갈 때마다 차를 주던 따듯한 시녀다.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보이지?’

제인은 나를 보지 못한 것인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급히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한번…….’

“쫓아가자.”

내가 아니라 칼릭스가 말한 거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고개를 돌리자마자 바다처럼 고요한 칼릭스의 눈과 마주쳤다.

칼릭스가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쫓아가고 싶은 거 아니었어?”

“어, 어?”

“지금 따라가지 않으면 놓칠 텐데.”

“그, 그렇죠.”

나는 칼릭스의 말을 따라 제인을 쫓았다.

모퉁이를 돌아가니, 어디로 갔는지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뒤쪽이야.”

칼릭스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한쪽으로 이끌었다.

“그건 어떻게 알아요?”

“이 정도쯤이야.”

칼릭스 아래의 그림자가 쭉 뻗어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게 그 그림자! 대단해요!”

“마차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어.”

마차 보관소 근처였다.

제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마차 뒤쪽에 쓰러지듯이 누워 있었다.

“……공녀님?”

제인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야, 제인.”

가까이서 보니 제인의 몸에서 강력한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역시 리미에는 황궁에 있었어.’

이 정도로 강한 흑마법의 기운은, 리미에만 할 수 있다.

그때 제인이 내 손을 다짜고짜 잡았다.

“공녀님,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하게 되어 무척 염치없을 거란 걸 알지만.”

그 순간, 제인이 쿨럭 피를 토했다.

“진정해. 일단 몸부터 치료하고-”

나는 신성력으로 제인을 치료하려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신성력이 듣지 않아?’

흑마법이 내 신성력 자체에 면역이 생긴 것처럼 튕겨냈다.

“공녀님, 황후 폐하를 구해주세요.”

“황후 폐하를?”

“네. 그분께선 지금…….”

고통이 밀려오는지 제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황후궁이 아니라 폐궁에 갇혀 계세요.”

저주가 요동쳤다.

파삭-

제인이 다시 한번 피를 왈칵 토했다. 하지만 제인은 또렷한 시선으로 내게 간청했다.

“황후 폐하께서 공녀님께 몹쓸 짓을 했다는 걸 알아요. 그래도 한 번만,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제인,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을 할수록 저주가 심해져.”

“전 이미 틀렸어요.”

제인이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황후 폐하가 계신 위치를 말하는 순간, 끝이라고 했거든요. 더한 걸 말할 수 없는 게 슬프네요.”

저주가 발끝에서부터 제인의 온몸을 삼키기 시작했다.

“다른 방법으로 전해도 됐잖아.”

“그럴 시간이 없어서요. 그리고 제게는 황후 폐하를 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왜 이렇게까지 해?”

황후가 자기 사람한텐 잘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한테는 내 목숨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저는 황후 폐하를 모시는 시녀니까요.”

제인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분명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일 텐데.’

“착한 공녀님께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것 같아서 죄송해요. 그래도 부디 한 번-”

제인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이렇게 쉽게, 사람이.’

내가 허망한 얼굴로 재를 만지려는 순간, 칼릭스가 나를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괜찮아, 내가 있어.”

* * *

황후는 폐궁의 감옥에 갇혔다.

‘아무도 없군.’

원래 세라피나가 근신할 곳은 황후궁이다. 본래 이렇게 갑자기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리 조용하다니.’

황후는 새삼 제 처지가 우스웠다.

‘이제 황실은 리미에의 손에 들어간 건가?’

그 리미에를 막을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 진짜 성녀인 나나뿐이다.

‘그 애가 잘 해내야 할 텐데.’

어느 쪽이 이기든 황후와 상관없겠지만, 세라피나는 나나가 리미에를 꺾고 승리했으면 했다.

‘리미에를 이길 수 있을지.’

나나를 걱정하던 황후가 픽 웃었다.

‘내 처지에 누굴 걱정한다고.’

또각또각.

선명한 발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황비가 세라피나를 구경하러 왔다.

황비는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초라한 몰골의 세라피나를 보고 비웃었다.

“황후 폐하, 새 처소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그럭저럭.”

황후는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

“자네도 내 상황에 대해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

“황실의 새 안주인인 제가 알지, 누가 알겠습니까?”

“새 안주인이라…… 그리 착각하고 있었나?”

황비가 빽 소리쳤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그러면 이 황실에 저 말고 어떤 사람이 있단 겁니까?”

“자네도 알 텐데.”

황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황후는 차분한 말투로 일갈했다.

“어차피 자네가 진짜 주인이 될 수는 없으리란 것을.”

“무, 무슨-!”

“리미에가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던가?”

“시끄러워!”

황비가 체통을 잊고 소리쳤다.

“감옥에 갇힌 주제에 누구한테 지적질이야!”

“그렇게 들렸나?”

“여전히 당신이 그 대단한 세라피나 황후인 것 같아? 그 자리는 이제 내 거야!”

황후는 무덤덤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제 보니 나나 자네나 남의 자리에 앉으려 발버둥 치는 건 똑같군.”

황비의 눈이 시퍼런 분노에 휩싸였다.

‘저 아무렇지 않은 태도는 뭐지?’

세라피나는 황후 자리에 집착하던 여자였다.

자기가 목매던 황후 자리를 빼앗기게 되어 발악하고 분노해야 마땅한데.

모든 것을 잃기 직전의 세라피나는 평소와 같아 보였다. 황비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황후를 꺼내!”

“예?”

황비의 기사가 의문을 표했다.

“황후 폐하를 지금 꺼내란 말입니까?”

“그래, 저 여자를 꺼내 정신 교육을 시켜줘야겠다.”

황비가 표독스럽게 이를 까득 갈았다.

“기사에게 두들겨 맞고도 고고한 황후 노릇을 할 수 있을지 기대되네요.”

기사가 난처한 기색을 보이자, 황비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너도 내 말이 말 같지 않니?”

“아, 아닙니다.”

기사는 열쇠를 꺼내 감옥 문을 열었다. 황비의 눈에 끔찍한 기대가 차오르던 순간이었다.

“어서 저 독한 여자의 뺨부터-”

퍼억!

“끼엑!”

누군가 황비의 목 뒤를 내려쳤다.

“황비 전-”

기사가 검을 빼 들려는 순간, 기사 역시 단번에 제압당했다.

고요하던 황후의 보라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네가 왜 여기에…….”

“오랜만이네요, 황후 폐하.”

나나와 눈이 마주친 황후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날 비웃으러 왔나?”

“그런 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 순간, 황후의 표정이 또다시 미미하게 무너졌다.

“……그러면 무엇하러 왔느냐?”

“황후 폐하를 구하러요.”

“왜?”

황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는 너와 그럴 만한 관계가 아닐 텐데?”

“어떤 사이인데요?”

“네가 기절시킨 황비보다 더한 사이지 않느냐?”

“아무리 그래도 황비와 비교하기에는 좀…….”

황후는 한때 나나 앞에서 사고치고 다니는 천박한 황비를 종종 욕하곤 했다.

물론 나나도 황비를 싫어했다.

황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황비를 비교하기엔 이상-”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쵸?”

나나가 두 눈을 반달처럼 빙그레 웃었다. 황후는 그 미소에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구하겠다는 뜻이냐?”

“솔직히는 제 적인 리미에를 공격하기 위해서예요. 그러니 황후 폐하는 제게 아는 걸 다 말씀해 주셔야겠어요.”

세라피나는 협박조로 말하는 나나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나의 눈빛이 슬퍼졌다.

“황후 폐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황후는 단번에 그 사람이 누군지 눈치챘다.

“……제인인가?”

“맞아요. 그래서 다시 한번 황후 폐하께 기회를 드리려 해요.”

황후는 나나의 옆에 있는 칼릭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몰라도 폐태자의 생각은 다를 텐데.”

“똑같다.”

칼릭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나가 하고 싶은 게 내가 바라는 거니까.”

* * *

솔직히 황후를 슬라데이체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래야 리미에가 허튼짓을 못 할 테니까.

무엇보다 황후한테도 슬라데이체가 가장 안전할 거고.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하지만 황후는 처음 보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슬라데이체로 갈 수는 없어. 내 행동이 거슬린다면, 억지로 데려가라.”

그렇게 할 생각까진 없었기 때문에 나는 황후를 밖으로 보내고 헤어졌다.

‘황후 폐하가 그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봤어.’

잠시 생각에 잠기다 칼릭스에게 물었다.

“칼릭스, 너는 황후 폐하가 밉지 않아요?”

“갑자기 그건 왜?”

“저였다면 황후를 그렇게 쉽게 내버려 두지 못했을 것 같아서요.”

솔직한 심정으로, 황후를 풀어주는 것 자체가 칼릭스에게 못 할 짓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난 별생각 없어.”

그러자 칼릭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해.”

“왜요?”

“그게 내가 가장 바라는 거니까.”

그 순간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지만 나는 속을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칼릭스는 황제가 되고 싶어요?”

“난 너만 있으면 돼.”

칼릭스는 내 질문과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그거면 뭐든지 상관없어. 황제든, 아니든.”

“…….”

“나는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주고 싶어. 네가 원하는 걸 다 들어주고 싶고.”

“그게 뭐예요.”

내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칼릭스를 노려보자, 칼릭스는 오히려 의문스러운 듯했다.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나?”

“당연하죠! 왜 전하가 바라는 게 그거밖에 없어요!”

칼릭스가 이렇게 나를 많이 생각해 주는 건 좋다.

‘하지만…….’

칼릭스의 시선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굉장히 큰 소망 아닌가. 크게 욕심낸 거라 생각했는데.”

“뭐, 큰 소망이라면 소망이죠.”

다른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고, 그 사람이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전 전하만을 위한 소망이 있었으면 하는걸요?”

“같은 말일 텐데.”

“그러니까! 저한테 모든 게 달린 게 아니라 진정으로 전하 자신에게 달린 거요. 전하 자신의 행복을 위한 길이요!”

“…….”

“저한테는 제 인생이 있고, 저한테는 전하 인생이 있잖아요. 서로 모든 걸 아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전.”

칼릭스는 내가 그의 곁에 머물러진 유일한 사람이라서인지, 자기 자신보다 나를 더 생각하곤 했다.

“전 전하가 조금 더 전하를 위해 이기적이었으면 좋겠어요.”

“충분히 이기적이라 생각했는데.”

“지금보다 훨씬 더요!”

나도 슬라데이체에 와서 사랑받으며 알게 됐다.

‘사람은 내가 진짜 바라는 걸 생각해 둬야 해.’

“전 자기 자신을 잘 보살피지 않는 사람이랑은 결혼 안 할 거니까요.”

“……뭐?”

칼릭스가 황망한 눈으로 노려봤다.

“설마 나 말고 다른 놈이랑 결혼하겠다는 건 아니지?”

“음. 그건 모르죠.”

그때 내 로자리오가 오랜만에 반응했다.

[퀘스트 발동!]

[근처에서 강한 마족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성녀로서 인간을 해치려는 마족을 없애십시오.]

[보상: 신앙심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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