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미에가 황후의 위아래를 느릿하게 훑었다.
“지금 황후 폐하를 뵙고 있으니 제 마음이 아프네요.”
황후는 과거보다 허름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근신 중에 차림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었다.
‘감히.’
모욕적인 시선에도 세라피나는 냉정하게 평정을 유지했다.
“넌 그새 황제의 편에 붙은 모양이지?”
리미에는 부정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황제 폐하께서 제 진심을 알아주셨던 거죠.”
“사특한 말재주는 여전하구나.”
“절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 간 것이지요. 어차피 황후 폐하께선 절 믿지 않으셨잖아요.”
리미에는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하네요. 저의 무엇이 그리도 거슬리셨나요?”
“그게 무슨 소리지?”
“황후 폐하를 가장 먼저 뵌 건 저였어요. 그리고 제가 황후 폐하께 더 큰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
황후는 리미에가 비교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단숨에 눈치챘다.
“나나를 말하는 것이냐?”
“왜 어리석게도 그 모자란 아이를 선택한 거죠?”
황후는 픽 웃으며 리미에 몰래 제인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어서 떠나라.’
제인이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그들의 곁에서 도망쳤다. 다행히 리미에는 세라피나만 신경 쓰고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 그때 바이칼로스와 저를 도우셨다면, 우린 많이 달랐을 거예요.”
“…….”
“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신 거지요?”
황후는 가녀리게 서 있는 리미에에게서 조바심을 느꼈다.
“우습구나. 난 지금도 너 대신 그 아이를 선택할 것을 후회하지 않거늘. 어찌 멋대로 어리석은 선택이라 단정 짓는 것이냐?”
“……후회하지 않으신다고요?”
리미에의 노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황후가 그런 리미에를 보며 큭큭 조소했다.
“어째서 그리 놀라느냐? 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다시 그 애를 선택할 거다.”
“괜한 자존심으로 거짓말하지 마시지요. 그러다 후회할 일을 더 만드실지도 모르는데.”
“네가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 못 하니까, 나나에게 밀린 거다.”
리미에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 애가 황후 폐하께 뭘 했길래요?”
“그 질문부터 너와 나나 사이의 승패는 정해져 있던 거다. 나나는…….”
나나, 오랜만에 입 밖에 내뱉은 그 이름. 그 순간 세라피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것이 내 진심이었나?’
폐위된 이후 무너져 내린 자존심과 비참함으로 복잡했던 마음이 기이할 정도로 정리됐다.
“언젠가부터 난 그 애가 뭘 해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 애라서 좋았다.”
“하!”
리미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차갑게 웃었다.
“재밌네요. 황후 폐하께서 이리 감정적인 분인지 처음 알게 되었어요. 이럴 줄 알았다면 아예 다른 수를 썼을 텐데.”
우우우웅-
황후의 귀에 선득한 소리가 들렸다. 황후가 눈가를 찡그리며 물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릴 셈이지?”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인데요?”
평온을 찾은 리미에가 입구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황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인?”
방금 전 밖으로 도망쳤던 제인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눈동자가 흐릿하다.’
리미에가 제인을 조종하는 거다.
황후의 가슴이 선득해졌다.
‘본래 리미에의 힘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이 정도까지 가능했다면, 진작 황후인 자신을 조종하려 했으리라.
‘그사이 흑마법이 늘었다는 건.’
의문스러웠던 단서가 퍼즐처럼 맞춰졌다.
“벌써 눈치채셨네.”
황후의 시선을 읽어낸 리미에가 싱긋 웃었다.
“역시 황후 폐하께선 참 영민하세요. 그럼 황후 폐하의 귀중한 편지를 열어볼까요?”
리미에는 제인이 건넨 편지를 싱긋 웃으며 받아 들었다. 그러곤 느긋하게 그 편지를 감상했다.
“참 안됐네요. 제가 너무 빨리 와버렸어요.”
리미에가 다시 곱게 접은 편지로 황후의 뺨을 툭툭 쳤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황후 폐하께서 가실 길이 외롭진 않을 거예요.”
“…….”
“그 모자란 것도 사이좋게 보내드릴 테니.”
어둠 속에서 리미에의 눈동자가 찬란하게 빛냈다. 투명하고 영롱한 그 눈동자는 과거의 노란색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완벽한 금안이었으니까.
* * *
대공은 문 앞에 선 아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준비를 마친 아벨이 대공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그리 쳐다보십니까?”
“……미안하구나.”
장난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던 아벨의 얼굴이 놀라 굳었다. 아벨이 픽 웃었다.
“또 사과십니까,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너를 믿지만, 네가 준비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안다. 특히 넌…….”
대공의 시선이 마족처럼 변해버린 아벨의 기운을 보며 말했다.
“가족을 위해 많은 위험을 감수했으니까.”
“가족이 아니라 나나를 위해서였습니다만?”
“고맙다.”
“…….”
“그리고 무사히 돌아와라.”
대공의 낯 뜨거운 진심에 더 이상 아벨도 장난스레 넘길 수 없었다.
‘나도 이런 말에 꽤 약했나.’
막상 대공에게 들으니, 아벨은 꽤 오래전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었단 사실을 실감했다.
‘슬라데이체는 많이 달라졌구나.’
그리고 그것은 아벨에게, 슬라데이체를 버리고 떠났던 과거를 새삼 떠올리게 했다.
“예, 다녀오겠습니다.”
아벨이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버지는 동생들이랑 나나를 위해 파티나 잘 준비해 두십시오. 기왕 서프라이즈 파티인 거, 완벽해야 할 거 아닙니까?”
아벨은 뒤돌아선 뒤 마법 장치에 자신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인간의 몸으로 시공간의 틈을 오갈 수 없다면, 일시적으로 마족이 되어버리면 된다.
그리고 그 실험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아마 나나에게 들은 얘기대로라면, 슬라데이체가 마족에서 유래해서일지도?’
마법 장치가 옆으로 열리며 아벨을 시공간의 틈으로 인도했다.
* * *
황태자 계승식이 열리기 전까지 나는 대신전을 드나들며 교황님의 상태를 살폈다.
“치료가 쉽지 않네.”
“쉽게 해결될 일이었으면 내가 진작 치료했겠지.”
대신관은 그런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했지만, 나는 많이 속상했다.
‘로자리오를 사용하고 싶다!’
로자리오로 시간의 틈을 열어 교황님이 겪었던 과거를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포인트가 부족했다.
“그런데 너 이렇게 대신전에 자주 와도 되냐?”
대신관이 신성력으로 치료하고 나온 나를 마차까지 배웅해 주며 물었다.
“딱 봐도 지금 황태자 계승식 때문에 정신없을 시긴데.”
“내가 누군데, 당연히 잘하고 있지!”
“리미에는?”
대신관은 바로 콕 가장 불편한 이름을 짚어냈다.
“리, 리미에는…….”
“어디 숨어 있는지 못 찾아냈어?”
대신관이 눈매를 가늘게 뜨자, 나는 한숨 쉬며 말했다.
“지금 칼릭스가 파악 중이야. 황후가 몰락한 이후엔 아예 흔적도 없대.”
특히 내가 과거에서 리미에를 막으면서 현재에 변화가 생기는 바람에 더 찾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황제 주변을 조사 중이야.”
이렇게까지 정보를 은폐할 수 있는 권력자는 많지 않다.
“황제라. 짚이는 것이라도 있느냐?”
“정보 길드장 칼릭스의 눈 밖에서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황제 정도거든.”
“그래도 쉽지 않을 텐데.”
“쉽지 않지만, 칼릭스는 잘 알아올 거야.”
나는 대신관의 염려에 한껏 으스댔다.
“칼릭스는 제국의 하나뿐인 정보 길드장이잖아.”
그러자 도란도란 얘기하던 대신관이 발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너네 사귀냐?”
“응?”
“이거 언제부터 사귀고 있던 거지?”
대신관의 질문에 나는 딸꾹질하며 놀랐다.
“어, 어떻게 알았어?”
“누가 봐도 그래 보이니까.”
“그렇게 우리 사이가 좋아 보여?”
“네가 평소보다 많이 설레발 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치, 좀 더 좋게 말해주지?”
내가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대신관은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
“왜?”
“다시 말하지만, 난 네 연애에 크게 간섭할 마음은 없다.”
“그러면 축하해 주면 되잖아.”
“축하?”
갑자기 말문을 닫은 대신관이 기가 차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 연애하기에 넌 어려.”
“뭐? 나 성인이거든?”
“나이만 먹으면 되는 줄 알아? 그더라 괜한 놈한테 걸려서 고생하는 거다.”
“그러면 언제가 연애를 해도 되는 나이인데?”
팔짱을 끼며 고민하던 대신관이 말했다.
“자고로 인간은 60살 정도는 되어야 판단 능력이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지. 60살 이후부터 해.”
“대신관도 60살은 안 됐잖아!”
“그래서 이 몸도 연애를 안 하고 있지 않느냐?”
대신관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자, 나는 대신관을 노려보다가 박수 쳤다.
“이제 알았다!”
“뭘?”
“대신관이 연애를 못 하고 있어서 그러는구나.”
대신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거든?”
“맞네, 혼자라서 질투한 거였네(. 만나주는 상대가 없구나?”
“너도 내 인기는 알 텐데, 날 좋아하는 여자들로 대신전 한 바퀴를 줄 세울 수 있을 정도라는 거.”
“대신관이 연애를 못 해서 슬프다는 건 알겠어.”
“안 하는 거다.”
“휴, 그래. 이해해 줄게.”
나는 얄밉게 고개를 흔들며 빠르게 마차에 뛰어올랐다.
대신관이 날 부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키득 웃으며 모르는 척했다.
‘대신관 놀리는 거 너무 재밌다.’
“슬라데이체로 바로 가-”
“대신관하고 사이가 아주 좋아 보이네?”
그때 옆에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칼릭스가 팔짱을 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칼릭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언제 온 거야? 아무런 기척이 없었는데.”
“내가 정보 길드장으로 활약할 수 있던 이유지.”
칼릭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림자가 있는 곳은 쉽게 이동할 수 있어.”
“아, 그래서 그동안 계속 황궁을…….”
“그보다 지금 나 질투 났는데.”
칼릭스가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뽀뽀해줘, 여기에.”
“그, 그건 너무 빠른데!”
“그러면 어떻게 풀어줄 건데?”
칼릭스는 정식으로 사귀기로 한 순간부터 애정 표현에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속도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자, 칼릭스가 픽 웃으며 나를 확 끌어안았다.
“농담이다.”
칼릭스가 내 뺨에 입을 맞췄다.
“키스는 다음에 받지 뭐. 지금은 갈 곳이 따로 있으니.”
* * *
칼릭스가 마차로 날 데려간 곳은 황궁이었다.
정확히는 폐태자궁이 있던 자리.
“이제 여긴 아무것도 없군.”
새로 궁을 짓기 시작했지만, 아직 완성되려면 멀었다. 내가 칼릭스에게 물었다.
“계승식 이후에는 황태자궁으로 들어가서 지내게 되려나?”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왜, 황태자궁이 별로야?”
“너와 떨어져야 하잖아.”
칼릭스는 잡고 있는 내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너랑 조금도 떨어져 있기 싫어.”
내 손을 쥔 칼릭스의 손에서 불안 같은 게 느껴졌다.
“그래도 좋아질 거야.”
나는 환하게 웃었다.
“우리가 옛날 폐태자궁에서 재밌게 지냈던 것처럼.”
“하긴, 네가 있는 곳이 내 집이니까.”
폐태자궁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황후가 생각났다.
‘황후 폐하는 어떻게 지내려나?’
그때 불안한 듯 걸어가고 있는 황후의 시녀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