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172)

벨리알이 옆에 앉은 쥬테페에게 말했다.

“쥬테페 넌 안 거슬리냐? 그러고 보니 네가 그놈을 떨어뜨려 놓겠다고 했잖아.”

“그게 안 먹혔으니 그놈이 멀쩡히 있는 거지.”

쥬테페는 칼릭스를 내쫓기 위해 여러 수작을 부렸다.

하지만 칼릭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나나와 더 단란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쥬테페가 사납게 눈빛을 빛냈다.

“보기보다 만만치 않은 놈이야. 얼마 전엔 나한테 처형이라고 했어.”

“처, 처형?! 대가리가 돈 거 아냐?”

벨리알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러자 대공이 이를 까득, 깨물며 말했다.

“……내게는 장인어른이라고까지 했다.”

“그, 그놈이 죽었다 살아 돌아오더니 정신이 나간 거 아닙니까? 도토리가 그걸 그대로 내버려 둬요?”

“결혼하고 싶은 사이라는데 나나가 말리겠어?”

쥬테페가 대공에게 물었다.

“아버지, 저번에 칼릭스 황자랑 만나 본 건 어땠습니까? 말이 통하던가요?”

“아니.”

대공은 칼릭스 황자를 은밀히 불러 나나와 멀어질 것을 요구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황제 자리까지 걸며 협박했지만,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

‘장인어른. 저와 나나는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끔찍한 패배는 맹세컨대 처음이다.

‘그놈을 쫓아내야 하는데.’

그때만 생각하면 대공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수련을 하곤 했다.

“그나저나 아벨 형은 뭐 합니까? 아벨 형이 한 얘기 때문에 우리가 대놓고 반대도 못 하고, 축하도 못 하고 이러고 있는 거 아니-”

“나 왔어.”

아벨이 불쑥 나타나 말했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형 때문에 벨리알이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왜 그렇게 귀신처럼 다니는 거야!”

“마법으로 움직이는 것뿐인데.”

아벨은 나른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벨리알이 슬라데이체 기사단장이 된 것치고 실력이 좀 모자라서 그런가?”

벨리알이 아벨을 노려봤지만, 아벨은 어깨를 으쓱이며 무시했다. 물론 대공도 마찬가지였다.

“아벨, 이번 일은 어떻게 됐느냐?”

“어머니의 마법진에서 얻은 좌표로 해결될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기운을 찾아서 가져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보다…….”

아벨이 대공에게 말했다.

“나나의 신체 일부를 구해야 합니다.”

“얼마나 필요하지?”

“양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변수가 많기 때문에 지금이 아닌 어린 시절의 머리카락 같은 것도 필요합니다.”

벨리알이 투덜거렸다.

“어린 나나의 머리카락을 어디서 구해.”

“형은 없어?”

하지만 돌아온 건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쥬테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나나 다섯 살 때부터 머리카락이 있는데. 그걸 주면 되나?”

“그거면 일이 쉽게 해결되지.”

그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대공이 큰 결심을 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에게 보여줄 게 있다.”

“보여줄 거요?”

“그래. 지금부터 너희가 보는 건 모두 1급 기밀이다.”

대공은 비장한 표정으로 세 아들을 이끌고 대공의 서재 뒤쪽에 있는 비밀의 방을 열었다.

[사랑둥이 솜털 나나 기념관.]

“……아버지?”

벨리알이 기가 막힌다는 듯 기념관 안을 들여다봤다.

[나나가 써준 첫 명찰.]

[나나가 처음으로 아빠를 그려준 그림.]

[나나의 첫 유치.]

[나나가 리본 묶다가 실수로 뽑아버린 자기 머리카락.]

정말 온갖 게 다 보관되어 있었다.

벨리알은 기념관의 규모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도 나름 모아둔 게 있지만.’

대공의 기념관은 범접불가의 수준이었다.

“언제 또 이런 걸 모아놓으셨습니까?”

“중요한 일인 만큼 빨리 시작했다. 귀중품이라 절대 외부인을 들이려 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대공이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벨리알이 기념품 하나를 보고 새로운 충격에 빠졌다.

“아버지, 이, 이건 또 뭡니까?”

[나나가 만든 찰흙인형(복제품).]

 

“여기 복제품도 있습니까?”

“여기 복제품도 있습니까?”

“귀중한 진품을 모두 한곳에 몰아넣으면 안 되지 않겠느냐?”

대공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간혹 마음이 적적할 때마다 복제품을 보곤 했지.”

“도토리는 이런 기념관이 있는 걸 압니까?”

“…….”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벨리알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도, 도토리 몰래 이런 거 모아놔도 되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허락받으시죠?”

“그러다 우리 딸이 날 멀리하면 어쩌느냐.”

벨리알은 차가운 눈으로 대공을 바라봤다. 그도 여동생 사랑으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지만, 아버지는 정말 지나쳤다.

벨리알이 아버지를 타박하기 위해 쥬테페를 막 돌아보던 찰나였다.

“야, 쥬테페. 네 생각에도 아버지가 도토리한테 이걸 말해줘야 할 것 같지 않-”

“……부럽다.”

쥬테페가 정신 나간 소리를 했다.

“뭐?”

벨리알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쥬테페 저놈이 방금 뭔 소리를 한 거지?’

쥬테페가 녹금안을 반짝이며 나나가 그린 그림 시리즈를 고르며 대공에게 말했다.

“아버지, 이 그림들 다 저한테 파십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돈은 얼마든지 내겠습니다. 아들이니만큼 적정가에 거래하시지요?”

“시끄럽다.”

쥬테페는 다시 보지 못한 열성적인 눈으로 대공과 흥정하기 시작했다.

“이거 보십시오. 이 가족 그림엔 저도 있지 않습니까?”

쥬테페가 온 가족이 삐뚤빼뚤한 색연필로 그려진 그림 하나에 집착했다.

“비슷한 그림 옆에 여러 장 있는데 하나 정도는 파시죠?”

누가 봐도 비슷해 보이는 그림이 2장이 있었다.

“무슨 소리! 비슷하다니. 쥬테페 네가 잘 자란 줄 알았더니 아직 안목은 키우지 못했구나.”

대공이 턱을 들며 오만하게 말했다.

“보이느냐? 색이 좀 다르게 칠해져 있다.”

“그야 나나 수작업이니까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나 다 다른데 도대체 어떤 그림을 줄 수 있느냐?”

“그럼 다 다른 걸로 주십시오! 어차피 유산으로 물려받을 건데.”

“무덤에 끌어안고 죽을 거니 걱정 마라.”

“아버지!”

벨리알은 점점 과도해지는 부자 논쟁에 고개를 저었다.

‘쥬테페 저놈도 가만 보면 제정신 아니야.’

나나 앞에서는 다른 가족과 다른 척하더니 뒤에서는 대놓고 팔불출이다.

‘여기서 내가 제일 정상적이라니.’

에에에에엥- 콰앙!

그 순간 굉음 같은 경계음이 울리고, 폭발음이 일었다.

“이건 또 무슨…….”

그 앞에는 아벨이 있었다.

“제법 까다로운 장치를 해두셨군요. 아버지.”

아벨은 폭발 때문에 옷자락이 다 날아가 버린 제 오른손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래도 제게는 안 됩니다.”

“아벨!”

아벨은 품에 영상구를 집어넣고 있었다. 대공이 분노한 얼굴로 칼을 뽑아 들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그 영상구를 도로 내려놔라.”

아벨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번 마법에 무리 좀 했는데 의뢰비로 주시지요?”

“안 돼!”

살벌한 마기가 비밀 서재 가득 피어올랐다. 두 사람의 마기에 반응한 수정구 하나에서 영상이 떠올랐다.

[아빠, 치카치카 끄나씀미다!]

수정구 안에는 어린 나나가 대공에게 달려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어디 한번 보자. 아아~]

앞니가 빠진 나나가 병아리처럼 입을 벌렸다.

[요기 아아, 이제 하탕 주쎄요.]

[내일 아침 일어나서 먹어야 한다.]

[당욘함미다! 하탕 주는 아빠 머시씀미다! 주신밈보다 더!]

가족들이 홀린 듯 영상을 시청했다.

‘귀여워…….’

벨리알이 퍼뜩 정신을 차리자, 쥬테페까지 참전해 세 명이 싸우고 있었다.

‘이 집에서 나만 정상인 것 같아.’

벨리알은 마기를 두른 검으로 나나 물건 쟁탈전에 끼어들며 생각했다.

‘그러니 다 내가 가져가서 보관해야지.’

물론 객관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판단이었다.

* * *

교황님께서는 내가 들어간 이후에도 진정되지 않으셨다.

“모두 잡아! 성녀님께서 다치시면 안 된다!”

두 신관이 교황님을 붙잡았다. 나는 그 틈에 교황님께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흑마법인가?’

아주 지독한 저주였다.

‘신성력으로 치료해도 소용이 없어?’

분명 내 신성력으로 정화되었지만, 어느 틈에 저주가 다시 생겨나 자라나고 있었다.

‘더 가까이 가서 봐야겠어.’

난 멀찍이 떨어져 있으란 대신관의 조언을 무시하고 가까이 다가가 교황님의 손을 붙잡았다.

“크아아악!”

교황님이 발버둥 치며 손톱으로 내 뺨에 생채기를 냈다. 내 뺨에서 피가 살짝 비치자, 대신관이 버럭 화내며 나섰다.

“그러게 떨어져 있으라니까!”

“잠깐이면 돼요!”

나는 이를 꽉 깨물며 최대한 빨리 저주를 정화시켰다.

성녀인 내 신성력과 상극인 저주는 금세 사라졌다.

“이거 어디서 자꾸 저주가 생겨나는 거야?”

“나도 모른다. 그게 문제지.”

내 신성력이 먹힌 탓인지 저주가 옅어진 교황님은 축 늘어지셨다.

신관들이 조심스럽게 교황님을 침대에 눕히는 동안, 내가 대신관에게 물었다.

“어떤 저주인지 알아냈어?”

“아니. 단서가 없어.”

“그러면 당장 나한테 도움을 청했어야지.”

“아직 찾아야 할 게 많아서 그랬다. 간간이 의식을 되찾으실 때도 있어서…….”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성녀님이신가?”

교황님이 눈을 떴다. 조금 전과 달리 맑은 눈빛이었다.

“교황님, 정신이 드시나요?”

“예. 덕분에 듭니다.”

교황님은 차분하고 고아한 미노년이셨다. 광증에서 일시적으로 해소된 덕분인지 교황다운 기품 있는 분위기가 흘렀다.

교황님이 대신관을 보며 물었다.

“헬리오스, 네가 성녀님을 모셔왔느냐?”

“이제 기억이 좀 돌아오십니까?”

대신관이 누구보다 놀란 얼굴로 교황님에게 되물었다.

‘간간이 정신이 돌아오셨다면서.’

아무래도 그건 날 돌려보내기 위한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교황이 콜록거리며 피를 토했다.

“그래, 하지만 이 저주가 끝날 것 같지 않구나.”

교황님의 금안이 어두워졌다.

“그러니 아테아 신의 품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 했거늘.”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래, 내가 괜한 소릴 했구나.”

교황님은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첫 만남에 이런 미욱한 모습을 보이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아, 아니에요. 아프셨는걸요.”

나는 손사래를 치며 교황님께 말했다.

“교황님, 정신이 드신 김에 쓰러지시기 전에 짚이는 일이 있으신가요?”

“기억이 온전치 않습니다. 그래서 확실하지는 않으나…….”

“교황님. 아무 단서가 없는 상황입니다. 어떤 얘기라도 좋으니 얘기해 주시지요.”

대신관 역시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교황이 고민하던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쓰러지기 전, 이상할 정도로 주름진 손을 봤던 게 기억난다.”

“……손이요?”

“예. 그거 외엔 이상할 정도로 아무 생각도 안 나서…….”

대신관과 내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이 증언은 처음이지?’

‘그래. 생각보다 중요할지 모른다.’

내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 손에 특이한 점은 없었나요?”

“불길하고 어두웠다는 것 외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교황님이 주름진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미안합니다. 교황으로서 성녀님께 도움이 되어드리지는 못할망정…….”

“아니에요! 전 대신관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는걸요.”

“저놈에게 말입니까?”

교황님이 대신관을 보며 미심쩍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성녀님이라도 저 불량한 놈이 순순히 말을 들었을 것 같진 않은데…….”

“왜 또 이상한 데서 트집 잡아요. 성녀가 ‘직접’ 인정하기까지 했는데.”

“어허, 성녀라니! 성녀님이라 해야지, 이놈아!”

교황님은 어디서 기력이 났는지 버럭 소리쳤다.

“내가 널 모르느냐? 기부금으로 몰래 사업 벌이다 걸렸던 주제에!”

“그게 언제적 일인데 아직까지 그러십니까?”

“대신관이라는 놈이 반성은 하지 않고 불만을 토로하다니! 네놈은 멀었다, 멀었어!”

방금 전까지의 잔잔하고 고아한 미노년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교황님이 날 보며 물었다.

“성녀님, 저놈이 말 안 들으면 제게 말하십시오. 광증이든 뭐든 대가리를 깨주러 가겠습니다.”

“아, 정말요?”

나는 무기를 찾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대신관이 저한테 좀 불손할 때가 종종 있…….”

“그럴 줄 알았다, 이놈아!”

교황님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대신관의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아니, 다 죽어가던 노친네가 힘이 왜 이리 셉니까?”

“주신님의 사랑이다, 이놈아!”

교황님은 성에 안 찬다는 듯 대신관을 마구 팼다.

“나나, 너 왜 보고만 있냐?”

“성녀님을 이름으로 불러?!”

“아니, 이건-”

나는 티격태격하는 싸움을 말렸다.

“교황님, 그만 하세요. 대신관의 잘못이라면 처음 만났을 때 비밀 상단으로 저를 등쳐먹으려던 것밖에 없어요!”

좀 혼나라고 몇 개 좀 폭로하면서.

* * *

늦은 밤.

후드를 쓴 여자가 비밀스럽게 황후궁을 찾았다.

“황후 폐하. 제가 왔습니다.”

“왔구나, 제인.”

제인은 황후가 아끼던 시녀 중 하나였다. 근신으로 인해 황후를 보는 것이 금지당해 몰래 보러 온 것이다.

“황후 폐하,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걱정 마라. 내가 고생해 봐야 황비궁으로 옮겨진 너보다 더 고생스럽겠느냐.”

담담히 말한 황후가 제인에게 말했다.

“바깥에서 이상한 일은 없느냐?”

“황제 폐하께서 에스테반 황자 전하의 재검증을 미루신 탓에, 에스테반 전하께서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계십니다.”

“무어라?”

황후의 미려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슬라데이체 측에서 그런 요구를 하진 않았을 텐데?”

“예. 전적으로 황제 폐하께서 요구하신 일입니다. 아무래도 황후 폐하의 세력을 완전히 없애려는 모양입니다. 황후 폐하를 모시던 다른 사용인들이 감옥에서 사라진 것도 그렇고…….”

세라피나 황후는 불현듯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미안하지만 네게 큰 부탁을 해야 할 것이 생겼다.”

“저는 황후 폐하의 사람입니다.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당장 내가 써주는 편지를 황제궁 시종장에게 들고 가라.”

“전해주기만 하면 됩니까?”

“그의 약점을 적어둘 터이니, 그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황후로서 오랜 기간 지내온 탓에 세라피나는 황궁에 기거하는 이들의 약점을 대체로 꿰고 있었다.

“그러면 부탁한다.”

제인이 고개를 숙이고 막 물러나려던 찰나였다.

“어머, 저 이전에 손님이 있었네요.”

그때 검은 머리의 여자가 그들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황후의 보라색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리미에.”

“황후 폐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리미에는 안타깝다는 듯 황후에게 말했다.

“어쩌다 이렇게 우리 둘의 신세가 정반대로 달라지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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