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솔깃한 제안이다.
물론 신관으로서 그런 일을 저질러도 되는지 조금 뜨끔했다.
‘신이시여, 저를 용서해 주세요.’
주신님께서 미리 저를 통해서 신벌을 내린 셈 치시면 안 될까요.
‘어차피 마족도 구했는데.’
그때 칼릭스가 딱 잘라서 말했다.
“그럴 순 없어.”
“왜?”
“과거를 마음대로 바꿨다간 대상자가 대가를 치른다. 특히 누군가를 죽이는 건 가장 큰 문제야.”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칼릭스가 디트리히를 날카롭게 바라봤다.
“마족인 당신은 알고 있었을 텐데.”
그때 디트리히가 배시시 웃었다.
“쳇.”
일부러 그런 거다.
“쳇, 지금 쳇이라고 했죠?”
나는 디트리히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조상님. 주신님의 은혜가 가득한 봉인구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죄송합니다, 후손님. 악의는 없었습니다. 다만 귀여워서…….”
그때 칼릭스가 무심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잘못하면 네 존재도 지워져.”
“그게 어디 귀여워서 할 수 있는 행동이에요!”
“그것이 마족식 애정…….”
“이래서 주신님께서 모든 마족을 처리하셨구나.”
나는 상황 파악 못 하고 장난스럽게 웃는 디트리히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칼릭스, 과거를 바꿔서 여기 있는 사람들을 구해주는 건 괜찮아?”
“아마 거기까진 괜찮을 거다.”
“좋아, 그러면…….”
쿠르르릉-
방금 전 지하에서 있었던 것과 몹시 흡사한 진동이 바닥 전체에 울렸다.
바닥에 퍼진 진동은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땅바닥 속을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디트리히, 신전 지하가 무너졌던 것도 리미에가 한 거라곤 했죠?”
“그래. 이 신전은 그 여자의 영역이야. 아마 저 신전 속에서 무슨 행동을 취하고 있겠지.”
헤실헤실 웃고 있던 디트리히는 리미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노골적으로 불쾌한 티를 냈다.
“아마 신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더 어려운 수를 써야 할 거다.”
“디트리히를 봉인구로 가둬두었던 것처럼?”
“그래, 그런 것…… 후손아,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디트리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그 여자에게 사로잡힌 것은 실수라고 실수. 원래라면 결코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네, 그러셨죠.”
“어허, 전혀 안 믿는구나.”
“에이, 아니에요. 그건 아니고 사람들을 가둔 방법은 디트리히를 가둔 방법과 전혀 다를 거 같아서요.”
마족인 디트리히는 신성력 봉인구로 억제되었지만, 신성력을 가진 신전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몽땅 금제하기는 어렵다.
“맞아, 칼릭스는 오는 길에 봤다고 했지. 어떻게 갇혀 있었어?”
칼릭스는 곤란한 듯 대답을 얼버무렸다.
“글쎄,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아, 진짜?”
“하지만 성녀인 네 눈으로는 구출할 방법이 보일지 모르지. 네 말대로 마족을 가두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어야 할 테니까.”
그 순간 마수들의 기척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마수들이 이 신전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조심해.”
살기를 느낀 칼릭스가 검을 손에 쥐었다.
“이번 마수는 방금 상대했던 마수들보다 더 강한 것 같아. 마기가 더 강해.”
나는 힐끔 신전 안을 바라봤다.
‘우릴 다시 신전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것 같은데.’
마수 한두 마리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마수들은 여러 동물을 섞어놓은 듯한 괴물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마수놈들이네.”
디트리히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위협하는 마수를 보며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감히 마수 따위가 고위 마족 앞에서 살기를 드러내고.”
디트리히의 주변에서 검은 오오라가 퍼지며 긴 은발이 흩날렸다.
‘마수들이 물러나지 않네.’
디트리히의 붉은 눈이 살벌해졌다.
“이거, 내 마기를 가져다 쓴 놈들이군. 아주 재밌네.”
방금 전 가볍게 웃던 모습은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살벌한 모습이었다.
“리미에가 디트리히에게서 뽑아갔다고 했던 그 마기요?”
“그래, 그래서인지 저놈들이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 같군.”
불현듯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리미에는 내 성력도 자주 빼가곤 했는데.’
마왕과 접선하기 위해서 마족의 기운도 빼가기도 할 줄이야.
‘그걸 이용할 수는 없을까?’
“그러고 보니 디트리히,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
“리미에가 디트리히를 신전으로 유인해서 봉인했다고 했지요?”
디트리히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어떻게 알았는지 슬라데이체 형님의 거취를 안다는 핑계를 들어서.”
“그 과정을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