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172)

쿠르르릉-

천장의 돌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정보 길드장, 칼릭스는 이를 꽉 깨물며 나를 안고 달렸다.

“미안해.”

칼릭스가 나직이 말했다.

‘진짜구나.’

칼릭스의 입으로 확인까지 받으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진짜 칼릭스였어.’

나는 새삼스럽게 칼릭스를 살폈다.

급하게 달리느라 흐트러지는 흑발, 찬란한 푸른 눈동자, 소년보다는 남자가 된 얼굴과 이제는 날 안고 달려도 흔들림 하나 없는 체구.

그동안 상상했던 칼릭스의 자란 모습 위로 지금 이 모습이 겹쳐졌다.

온갖 생각이 다 나는 와중에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난 정말 칼릭스인 줄 몰랐나?’

생각해 보면 눈치챌 만한 구석은 정말 많았다.

칼릭스와 동시에 사라진 정보 길드장.

칼릭스만큼 익숙하게 나를 대하던 모습.

가면 아래로 보이던 푸른 눈동자 색과 다정한 눈빛.

‘정보 길드장보다는 칼릭스와 더 익숙했던 행동들.’

굳이 분수대 앞에서 만나 데이트했던 것까지 생각이 닿았다.

‘어쩌면 나는 알고 있었나 봐.’

한참 앞으로 달리던 칼릭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 숙여.”

내가 지시대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순간, 칼릭스가 검을 휘둘렀다.

콰앙-!

우리 앞을 가로막던 큰 돌문이 칼릭스의 일격에 한 번에 스러졌다.

디트리히가 휘파람을 불었다.

“인간 같지 않은 힘인데?”

“나나, 돌조각 안 튀게 조심해.”

칼릭스는 디트리히의 말을 무시하고, 나를 감싸주며 밖으로 나갔다.

환한 햇살이 쏟아졌다.

“밖이다!”

방금 전 지하에 그대로 묻힐 뻔해서인지 안도감이 확 들었다.

나는 디트리히를 보며 물었다.

“다친 데는 없죠?”

“마족에게 이 정도야 가뿐하지.”

디트리히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막 봉인에서 풀린 것만 아니었으면 달릴 필요도 없이 다 부숴 버렸을 텐데.”

신전을 바라보는 디트리히의 적안이 무시무시했다.

‘나, 잘 풀어준 거 맞겠지?’

그때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칼릭스가 나를 내려주지 않은 채 물었다.

“나는?”

“응?”

“나는 안 걱정해 줘?”

가만히 칼릭스를 보다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드려 그가 나를 내려주게 했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주위를 둘러봤다.

‘당장 주위에 위험한 건 없군.’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칼릭스에게 물었다.

“그보다 저한테 할 말이 있지 않아요?”

“전처럼 편하게 반말해.”

“전하?”

“……미안하다.”

칼릭스의 길고 날렵한 눈매가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화가 나야 하는데 벌써부터 입꼬리가 올라가려 했다.

‘안 돼, 제대로 따져야지.’

“전하도 제가 전하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알고 계셨을 거 아니에요.”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가. 정보 길드장인 척 행동한 건 그렇다 쳐도, 나중엔 본인 행세를 하겠다고까지 했다.

“저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을 기회가 많았잖아요. 그런데도 전하는 저를 속이신 거예요.”

“그래, 용서받기 힘든 죄다.”

그, 그렇게까지는…….

“네가 나를 원망해도 이해해. 내가 저지른 짓이 있으니.”

나는 열심히 눈을 부릅뜨며 팔짱을 끼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그걸 알면서 그런 행동을 했어요?”

“하지만 난. 너를 속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낮게 깔린 목소리에서 절절한 진심이 느껴졌다.

“어떻게 해서든 네 곁에 있고 싶었어. 그거면 충분한 거라 생각해서.”

“그렇게 티를 많이 내셔놓고요?”

“어리석지만.”

칼릭스의 푸른 눈동자가 복잡해졌다. 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런 와중에도 네가 나를 알아봐 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척 보기에도 사연이 절절 흐르는 태도였다.

“미안해. 네게 사죄할 길이 없다.”

“전하, 제가 전하 미워한다고 했던 거 기억나죠?”

칼릭스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기억해.”

“제가 전하를 원망해서 버려도 어쩔 수 없는 거 맞죠?”

칼릭스의 짙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비 맞은 늑대처럼 불쌍한 표정을 지은 그가 입술을 씹었다.

“전하.”

“그건…….”

칼릭스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왜요, 전하가 그때 절 두고 가면서 했던 게 그런 의미 아니에요?”

내 얼굴을 애타게 바라보던 칼릭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 순간 나는 그에게 다가가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푸하, 힘들었다.”

“……나나?”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칼릭스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제가 어떻게 전하를 버려요.”

“나한테 화난 거 아니었나?”

“화났죠.”

나는 바짝 긴장한 칼릭스의 몸을 다정하게 토닥여줬다.

“하지만 그런 건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 기쁜걸요.”

“…….”

“잘 돌아왔어요.”

칼릭스가 겨우 숨을 들이켰다. 어쩐지 그런 것조차도 안쓰러웠다.

‘바보.’

사정이 있어서 말 못 해도 돌려서 말해주면 되잖아. 그렇게 사과만 하다가 내가 오해하면 어쩌려고.

‘하여간 요령이 없다니까.’

하지만 그런 모습마저도 내가 알고 있던 칼릭스가 맞았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무도 없던 폐태자 궁,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던 외로운 황자.

무엇도 필요 없다면서 소년은 나를 적극적으로 밀어내지도 않았다.

누구보다 따듯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서일까.

괜히 아닌 척 나를 챙기고 배려해 주던 그 행동이 좋아서일까.

‘칼릭스는 그대로네.’

칼릭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

“왜 전하가 고마우세요? 제가 고마워야죠.”

“아니.”

칼릭스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네가 없었으면 난 돌아오지 못했을 테니까. 애초에 그럴 이유가 없었을 거고.”

그 순간.

“저기, 미안한데.”

디트리히가 끼어들었다.

“감동적인 재회를 방해해서 미안한데 나 여전히 이 자리에 있거든?”

“나나 너는 모르겠지만.”

칼릭스는 디트리히의 말을 못 들은 척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말했다.

“너는 내 삶이야.”

“뜬금없이 형의 후손이 연애하는 광경을 지켜보게 된 내 처지도 생각해 주지?”

더 이상은 안 돼!

“아, 알았어요, 전하! 다른 사람도 있으니까 그만해요!”

얼굴이 새빨개진 나는 칼릭스를 밀어내고 떨어졌다. 그러고는 디트리히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눈치 주는 게 어딨어요.”

“그러다 내가 있는지도 모르고 더 진도를 나갈까 봐 그랬지.”

“지, 진도라니요!”

이거 마족 아니랄까 봐 말 가릴 줄을 모르네!

“저희 아직 안 사귀거든요?”

“누가 봐도 사귀는 사이처럼 보이는데?”

디트리히가 황당하다는 듯 우리를 번갈아 보다가 나한테 물었다.

“후손아, 혹시 저 남자한테 문제가 있느냐?”

“어…… 그건 저도 잘-”

내가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리며 칼릭스를 봤다.

칼릭스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아무 문제 없어.”

칼릭스는 이를 아득 갈며, 검을 빼 들었다.

“저 마족 놈이.”

칼릭스는 말릴 틈도 없이 디트리히에게 검을 휘둘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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