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172)

리리카가 에스테반의 팔짱을 낀 채 턱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날 보고 있어.’

구불구불한 다홍색 머리카락에, 보라색 드레스로 예쁘게 차려입은 리리카는 단연 돋보였다.

“지금 마실리 영애가 입고 있는 저 볼레르제 드레스…….”

“자수정 귀걸이와 다이아몬드 목걸이 좀 보세요. 이오테아의 눈물이잖아요.”

“생각해 보면 공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사교계에서 가장 기대되는 꽃 중 하나였죠.”

사교계에서 차기 황태자비는 슬라데이체 공녀라는 게 암암리에 확실시되고 있던 상태였다.

“저렇게 잘 어울리는데 황태자비가 곧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이라도 가서 다시 친분을 쌓아두는 게…….”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리리카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이제야 내 자리를 되찾았어.’

슬라데이체 공녀에게 밀려 억울하게 잃어버려던 모든 것을 이제야 전부 되찾은 거다.

리리카가 에스테반에게 애교스럽게 속삭였다.

“전하, 사람들이 하는 얘기 들으셨어요? 저희가 잘 어울린대요.”

“예, 들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럴듯한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에스테반은 눈은 전혀 웃지 않은 표정으로 차갑게 대꾸했다.

‘치, 쌀쌀맞긴.’

파트너로서 예의를 지키긴 하지만, 에스테반은 리리카에게 계속 선을 긋고 있었다.

‘역시 아무리 황태자 전하여도 우리 쥬테페 님만 못해.’

리리카는 쥬테페에게 첫눈에 반했다.

천사처럼 환한 미소와 신사다운 분위기.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투자 감각으로 재산을 불린 것도 모자라 벌써 가주 대리직까지 수행하고 있다는 천재 중의 천재.

‘쥬테페 님이었다면, 나를 이렇게 서운하게 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 슬라데이체의 천박한 입양아 때문에 쥬테페와의 인연은 계속 멀어져만 갔다.

그래도 이렇게 슬라데이체 공녀의 파트너가 될 뻔했던 황태자를 데려올 수 있어서 다행이긴 했다.

리리카가 황태자를 대동한 이상, 슬라데이체 공녀가 그 잘난 가족을 데려와 봐야 우스운 꼴이 될 테니까.

이번 데뷔탕트는 사람들의 짐작대로 황후가 리리카를 밀어주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정확히는 황비님과 손을 잡으신 거겠지만.’

이대로 황태자비가 되어 제국의 가장 큰 권력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특히 그 재수 없는 슬라데이체 공녀의 것을 빼앗는 것이니까.

“에이, 전하. 그래도 조금만 더 웃어주세요. 이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걸요?”

에스테반은 리리카를 정중하게 에스코트하며 다시 선을 그었다.

“마실리 영애, 거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지금 영애에게 허락된 건 인사까지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도 그 이상 하셨다간 크게 실망하실 거고요. 알았습니까?”

은근히 에스테반에게 몸을 붙이던 리리카의 볼이 창피함을 이기지 못하고 살짝 붉어졌다.

‘뭐야, 황후 폐하께서도 다 허락하셨는데!’

황태자도 어느 정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으니까 파트너를 한 것 아닌가.

하지만 어느새 황제와 황후 앞에 섰기에 더 투정부릴 수는 없었다.

리리카가 예쁘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제국의 영광을 뵙습니다. 이번에 사교계에서 데뷔하게 된 리리카 마실리입니다.”

“그래, 리리카 마실리 영애. 황비의 조카라지?”

그동안 어떤 영애가 인사와도 반응조차 하지 않던 황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황태자와 사이가 썩 괜찮아 보이는군.”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감탄했다.

‘벌써 리리카 영애가 황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가?’

‘어쩌다 슬라데이체 공녀가 한순간에 밀려버리게 된 거지? 설마 그 소문대로 평민 남자를 만나서……?’

‘하긴. 황실만큼 명예를 따지는 곳이 없으니.’

황후 역시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카 마실리 영애, 데뷔탕트를 치른 순간부터 영애의 행동은 성인과 같은 무게의 권리와 책임을 갖네. 제국에 영광을 드높일 인재가 되길 빌겠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마지막으로 환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던 황비가 살갑게 박수를 쳤다.

“어쩜, 리리카. 내 조카지만, 데뷔탕트에서 너만큼 아름다운 숙녀는 보이지 않는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황비님.”

“나한테까지 너무 예의 차릴 필요 없단다. 편히 모두에게 네 매력을 보여주련.”

그때 황궁 시녀장이 나타나 황후에게 속닥거렸다.

“황후 폐하, 슬라데이체 공녀가 앞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원 미상의 남자를 파트너로 대동했다고 합니다.”

“신원 미상의 남자?”

“예. 슬라데이체 대공가에서 남자의 신원을 보증한다며 연회장에 입장한다고 합니다. 무례하게도 남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도 없게 하여…….”

슬라데이체 대공가는 일반적인 대귀족 가문보다 더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다른 귀족과 달리 신원 미상의 사람도 연회장에 데리고 올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행동은 연회의 개최자인 황후, 더 나아가 황실에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도대체 슬라데이체는 제국의 황실을 어떻게 아는 건지.”

세라피나 황후가 불쾌한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신원 보증을 한다 하여도 무도한 자를 끌고 들어왔을지 어찌 안단 말이냐. 어찌 최소한의 수색도 하지 못하게 굴 수 있어.”

“들라 하시지요, 황후 폐하.”

방금 전보다 환한 인상의 황비가 황후에게 속삭였다.

“슬라데이체에서 보증한다지 않았습니까? 신원을 보증하면서까지 데려온다면, 응당 그 이유를 증명해야 하지 않겠어요?”

“황비, 엄연히 절차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황후는 살살 기어오르는 황비에게 차갑게 대꾸했다.

“경거망동하다 황실의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어찌할 것입니까?”

“그, 그건 그렇지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그 아이를 많이 반가워하실 것 같아…….”

황비가 황후의 눈치를 살피며 바로 사죄했다. 황후는 신중하게 생각에 잠긴 듯 입매를 비틀었다.

그때 황제가 먼저 나섰다.

“그냥 들라 하지? 슬라데이체 공녀가 이 이상 늦게 들어오면 일정이 더 지체될 것 아닌가.”

“그 또한 그렇군요.”

슬슬 황제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걸 느낀 황후가 시녀장에게 명령했다.

“들어오도록 하게. 다만, 신분을 보증한 만큼 공녀에게 책임이 따를 것이라 경고하고.”

시녀장은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연회장을 나갔다.

‘슬라데이체 공녀가 신원 미상의 남자와 입장한다고?’

‘진짜 그 소문 속의 평민 남자?’

귀족들은 자연스럽게 연회를 즐기는 척 모두가 슬라데이체 공녀의 입장을 기다렸다.

물론 그건 리리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리카가 신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에스테반에게 말했다.

“전하, 공녀가 진짜 그 평민 남자를 파트너로 삼고 데려오려나 봐요. 어쩜, 그래도 귀족의 품위가 있지.”

“마실리 영애. 신원 미상의 남자라 했습니다. 어디에도 평민이란 이야기는 없었어요.”

“상대와 떳떳한 사이라면, 여기서까지 신원을 감출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틀림없어요.”

에스테반은 리리카에게 물었다.

“그 말 확신하시는 거지요?”

리리카는 에스테반의 날카로운 질문에 살짝 움찔했다.

“저, 전하. 무섭게 왜 그러세요?”

“영애께서 너무 확신하시는 듯해서 물었습니다. 안 그래도 온 곳에 소문을 냈던데, 잘못되면 영애께서 책임을 피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순간 끔찍한 상상을 한 리리카가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리리카는 눈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저도 말실수로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충분히 배웠거든요. 그러니 걱정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슬라데이체 공녀가 정말 밤마다 평민 남자와 같이 있는 걸 보았다는 이야기도 사실인 거고요?”

“당연하죠. 제가 보지도 않고 그런 소리를 하겠어요?”

어차피 황후와 황비가 모두 자신의 편인 이상 슬라데이체 공녀가 아무리 대단해도 설 자리가 없어질 거다.

‘원래 사교계는 음모가 오가는 것 아니겠어?’

애초부터 신분을 떳떳이 드러내지도 못하는 남자와 몰래 만나는 광경을 들킨 슬라데이체 공녀의 잘못이다.

“슬라데이체 공녀와 그 파트너분께서 입장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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