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19)
잠시 집무실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흘러나온 트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돌아올 거야?”
“응, 꼭.”
“……알았어. 약속할게.”
그녀는 대답을 듣자마자 트론의 목을 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에게 돌아오겠다는 각오를 담아서.
‘아, 몸이 무겁다…….’
슬슬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더 길게 함께 있고 싶었다. 더 오래 사랑받고 싶었다.
‘……빨리, 이 마음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회귀 전에 바실리에게 들었던 말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사랑만 하기에도 시간은 짧아요.”
정말로 맞는 말이었다. 쓸데없는 자격지심이나, 염려를 내려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어쩌면, 길고 긴 시행착오를 겪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넘어설 장벽은 얼마 남지 않았다. 미래의 일은 그에게 모두 전했으니, 트론이라면 분명히 슬기롭게 헤쳐 나갈 것이다.
“엘피!”
트론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달빛보다 밝게 엘피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빛이 스며드는 듯했다.
그녀는 점차 흐릿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사랑해요, 왕자님.”
트론이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저 멀리 먹먹하게 울렸다. 엘피는 끝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감았다.
깊은 어둠이 그녀를 감쌌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자신이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의 곁으로, 반드시 돌아갈 것이기에.
그저, 긴 시간을 홀로 지내야 하는 트론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 생각을 끝으로, 그녀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
세오미의 여관에서 자던 루베인은,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김에 물이라도 마실까 하고 거실로 나간 그녀는 흠칫 놀랐다.
창밖에서 어스름한 달빛이 거실로 비추고 있었다. 그 달빛 아래에, 제시드가 서 있었다. 하지만 루베인이 놀란 이유는 그가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창가에 기댄 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제, 제시드?”
“루베인…….”
항상 자신을 ‘루베인 님’이라고 꼬박꼬박 경칭으로 부르던 그가, 처음으로 자신을 이름만으로 불렀다.
“무슨 일이야. 그사이에 세틱스가 괴롭혔어?”
그 외에 그가 울 만한 일을 짐작할 수 없어서, 루베인은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제시드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미안, 지금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요. 신경 쓰지 말…… 아요.”
마치 덧붙인 것처럼 그의 존댓말이 어색했다.
“말하기 싫은 거면 말 안 해도 돼. 그렇지만 사람이 그렇게 우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루베인…… 님.”
“응.”
“……저는 내일, 일주일간 잠들어 있는 주술을 제게 쓸 거예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이게 한계예요.”
“무, 무슨 소리야?”
“미안해요, 더 설명할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영리하니까…….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해요.”
루베인은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시드는 소심한 구석이 있었지만, 엉뚱한 일로 고집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어쩌면 세틱스에게 협력하지 않기로 결심한 걸까?’
제시드가 명확하게 세틱스를 배신하는 행동을 못 하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부친에 의해 속박당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자신도 마법 장치를 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제시드도 그와 비슷한 일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알았어, 더 안 물을게.”
“고마워…… 요.”
그는 눈물을 닦아 내고 루베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응, 뭔데?”
“잠깐만, 안아 주실 수 있나요?”
루베인은 눈을 깜빡였다. 가족도 아닌 남자와 포옹이라니 평소라면 질색이지만, 이전에 그를 달랬을 때도 별로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세틱스를 배신하며 마지막으로 마음의 정리라도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위로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응, 알았어.”
그녀는 제시드에게 다가가 살며시 그를 안았다. 키가 큰 그가 루베인을 감싸듯이 그녀의 등에 팔을 둘렀다.
그 감각이 싫지도 않았고, 오히려 어딘지 그리웠다.
루베인은 자신의 그런 생각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달빛은 두 사람의 그림자를 오래오래 비추었다.
***
트론은 왕궁으로 옮겨져 온 제시드를 무표정하게 내려 보았다. 루베인이 바로 가이에게 연락을 취하여 잠들어 있는 제시드를 이곳까지 데려올 수 있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트론의 눈치를 살피며 어딘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기, 전하. 가이 님한테 대충 이야기는 다 들었는데.”
“…….”
“죽일, 거야?”
그는 대답 없이 공중에 주술식을 그렸다. 연초록색의 고대 문자가 허공을 수놓았다. 꼼꼼하게 제시드의 몸을 관찰하던 트론이 간결하게 답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주술 쪽도 문제는 없다. 르터바이스 부군이 먼저 마법 방면의 처치를 해 주었으니, 바로 장치를 해제하면 될 거다.”
“……아니, 그게 아니라.”
루베인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럽게 트론을 올려다보았다.
“엘피 언니 일 때문에. 회귀 전의 제시드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잖아. 용서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고.”
“…….”
엘피의 이름을 듣자마자 무표정했던 트론의 표정이 잠시 무너졌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트론과 이야기를 나눈 후 쓰러져 버렸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온몸이 투명하게 빛났으나, 빛이 흩어진 후에는 그저 고요히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트론은 처음에 그녀가 바로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었다.
그러나 그 희망이 헛되게도, 엘피는 그 이후 계속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고통 속에서도 트론은 어떻게든 할 일을 처리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소대로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를 죽이면 그녀가 지금 바로 돌아오나?”
“…….”
“그리고, 엘피와 약속했으니까. 살려서 장치를 풀 수 있다면, 무고한 희생을 굳이 늘릴 필요가 없다.”
“전하…….”
트론은 머리칼을 쓸며 루베인 쪽을 돌아보았다.
“기억에 없지만, 그대와 나는 원수였다고 하지. 그럼 그대는 나를 죽일 텐가?”
“아, 아니. 설마.”
“나 역시 과거에 피로 손을 물들였던 자다. 회귀 전에 제시드 율페이든이 저지른 일을 단죄할 자격 따위는 어디에도 없어.”
“…….”
“그것보다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지.”
트론은 시종에게 제시드의 간호를 명하고 객실에서 나갔다. 루베인은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이미 들었겠지만, 그대의 부친은 솔피시언과 틀어진 이후로 동맹이 끊긴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다만, 나를 지지해 주지는 않겠지.”
“응, 아마도.”
“하지만 소공작은 다르다. 마그달리사 영애. 그대는 내 뜻을 딜 마그달리사에게 전하도록 해. 이번 데니옴 회의에 부친 대신 그가 출석하라고.”
“……각하가 그냥 넘어가실까?”
“넘어가게 만들어야지. 가능한 한 온화한 방향이 되기를 나도 바라지만, 글쎄. 그대의 부친은 딸인 그대에게도 온화하지 않은 방식을 썼던 자 아닌가.”
루베인은 그제야 트론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가 부친에게 감금당했던 것처럼, 대외적으로는 병환 등으로 위장하고 마그달리사 공작의 움직임을 제압하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소 동정심이 일었지만, 그가 멋대로 폭주하여 트론과 대립하다가 처단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아, 그리고 들었겠지만 제시드는 며칠 있으면 일어날 거야.”
“응. 유능한 자니까 나도 여러 가지로 신세를 질까 한다.”
“……아마 제시드 본인도 그게 마음 편할 거야. 마음껏 부려먹어 줘.”
트론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세틱스와 손을 잡은 세 공작가를 사냥할 시간이었다.
엘피가 남기고 간 정보를 남김없이 사용해서 왕위에 오를 것이다.
그녀의 희생을 절대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 각오를 새기며 트론은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
교단 건물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교단으로 들어온 위병들을 몰아내기 위한 사제들의 마지막 발악이었으나, 훈련된 병사들에게 저항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트론은 금세 상황이 정리된 것을 확인하고 대주교실로 들어갔다.
“이런…… 이런 짓을 하고 신에게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대주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일갈했다. 트론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글쎄. 완전 중립을 표방해야 하는 교단에서 차기 왕권 싸움에 간섭한 걸 신께서 기뻐하실 것 같지는 않군.”
“읏…….”
갑작스러운 교단 침입의 이유를 깨달은 대주교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간 세틱스와 말러를 숨기며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 트론에게 전달된 모양이었다.
“그대가 믿는 솔피시언은 사병 조직 및 내란 선동죄 혐의로 처필, 데하스와 함께 재판에 회부될 예정이다.”
“저, 저희는 그저 순수하게 목숨이 위험한 왕자들을 보호하려고…….”
“교단 역시 내란 협조죄, 공금 횡령과 뇌물 기탁으로 회부될 예정이고. 재판에서 솔피시언 공과 사이좋게 마주할 예정이니, 인사는 그때 하면 되겠군.”
“……감히 이런 일을 하고 무사할 것 같습니까!”
“250년 전 교단을 통하지 않은 가짜 라이샤의 등장 이후 세력이 쇠퇴하고, 계속 재기할 기회를 노렸다는 건 모르는 바가 아니다.”
“…….”
“하지만 방식이 잘못되었군. 신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이런 방식은 옳지 않다. 종교로서의 선을 넘은 그대들의 행동에 깊은 유감을 표하도록 하지.”
트론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대주교는 이를 갈며 기도문을 외쳤다.
“주여, 이 비극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고…….”
“안타깝게도 이 세계의 신은 개인의 비극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라서 말이야. 끌고 가라.”
위병장에게 명령한 후 트론은 몸을 돌렸다. 붙잡혀 가며 대주교가 외쳤다.
“이 악마! 신이 너를 벌하실 것이다!”
“닥쳐라!”
위병이 그의 입을 막으며 끌고 나갔다. 트론은 그쪽을 일별했다가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글쎄, 신은 이미 벌을 주시려고 그녀를 빼앗아간 것 아닐까.”
그의 표정이 잠시 흐려졌으나, 이윽고 다시 냉정하게 돌아왔다.
트론은 바로 몸을 돌려 사제실로 향했다. 그간 지긋지긋하게 자신을 괴롭힌 장본인이 그곳에 포박당해 있었다.
세틱스 스레데니옴.
모친이 다른 형이자, 오래도록 정적이었던 자.
또한 회귀 전에 주군이었으나, 자신을 믿지 못하고 죽였던 자.
트론은 사제실로 통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세틱스에 대한 감정은 복잡하여, 딱 잘라 설명할 수 없었다.
‘……어차피, 정리할 수도 없겠지.’
그는 각오하고 문을 열었다.
돌아가기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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