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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28화 (128/132)

128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18)

엘피는 휘영청 달이 떠오른 회랑을 지나갔다. 몸 상태가 완전하지 않아 힘이 빠진 다리가 떨려 왔지만 쓰러지지 않도록 힘을 주어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

트론의 집무실에 도착하여 노크를 하자 건조한 목소리로 “들어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 예상대로 늦은 시각까지 일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의 건강이 걱정되어 가슴 아팠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 엘피!”

트론은 책상에서 고개를 들다가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얼른 엘피에게 달려가 몸을 부축했다.

“어떻게 된 거야, 방에서 쉬지 않고.”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런 거면 차라리 아나이테를 통해서 날 부르지 그랬어. 내가 엘피의 방으로 가면 그만인데.”

엘피의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트론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그녀에게 향했다.

“괜찮아요, 걷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닌걸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저녁은 챙겨 먹었고?”

“네. 전하야말로 끼니 거르신 건 아니죠?”

“…….”

트론이 침묵으로 답하자 엘피는 그를 살짝 흘기며 뺨을 꼬집었다.

“이러니까 걱정되잖아요.”

“……미안.”

“제가 챙기지 않아도…… 꼬박꼬박 드시기예요?”

“응.”

“약속이에요?”

“알았어, 약속할게.”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미소 지었다.

트론은 그녀를 달래듯 이마와 뺨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간지럽고도 기분 좋은 감촉에, 엘피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옷깃을 쥐었다. 그 동작이 신호가 된 것처럼 둘의 입술이 겹쳐졌다.

엘피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버티지 못하고 그에게 몸을 기댔다.

트론은 그녀를 안아 올렸다. 금방이라도 삼킬 것처럼 거칠게 혀를 머금으면서도 그녀를 감싸는 팔은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그는 그대로 엘피를 책상 위에 앉혔다. 떨어지기 아쉬운 것처럼 몇 번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나서야 키스가 끝났다.

키스를 할 때마다 으레 그렇듯이 엘피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숨을 고르며 남아 있는 타액을 삼켰다. 그와 입을 맞추는 경험은 항상 강렬하고 정신없었다.

그녀의 반응으로 학습해 가는 것처럼 트론은 몰아붙이는 것에 능숙해졌다. 정작 엘피는 익숙해지기는커녕 매번 부끄러웠다.

마치 그 마음을 읽은 듯 트론이 그녀를 꼭 안았다.

엘피는 그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점차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는 양 안심시키는 것도 모두 트론뿐이었다.

‘……왕자님도 나랑 같은 마음일까.’

그가 사라진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두려웠다. 함께하는 이 시간이 달콤하고 애틋할수록 더욱 그랬다.

하지만 자신은 이제 곧 그와 함께 있어 주지 못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해도, 그 사실이 미안하고 슬펐다.

“오늘 달이 예쁘네.”

“아, 그랬죠. 회랑을 지나오면서 봤어요.”

엘피가 그의 품에서 몸을 떼며 말하자, 트론은 끄덕이며 집무실의 불을 껐다. 방 안의 불 때문에 가려져 있던 달빛이 집무실 안에 퍼졌다.

테라스 밖 후원에 있는 느티나무 위로 커다란 달이 걸려 있었다. 그림자 위에 은색의 가루를 가득 뿌려놓은 듯, 어딘지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예전에 같이 오로라를 봤던 일, 기억해?”

“르터바이스 본저에서 전하를 간호할 때 말씀이시죠.”

“응. 그때는 무언가를 봐도 아름답다거나, 좋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이제는 정말로 달이 예쁘다거나, 달빛이 쏟아지는 정원이 아름답다고 느껴.”

엘피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건조하고 날이 서 있던 과거의 그가, 세월이 흐르며 바뀌어 갔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뻤다.

“전부 엘피 덕분일 거야.”

“그, 그건 과분한 말씀이세요…….”

“전혀.”

그는 엘피를 안고 목덜미에 몇 번 입을 맞추었다. 눈을 꽉 감고 얼굴을 붉히던 엘피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저어, 왕자님.”

“응.”

“제가 알려 드린 미래의 이야기들로…… 보위에 오르실 때까지 문제는 없을까요?”

트론은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어려운 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만, 그래도 회귀 전보다는 상황이 많이 낫겠지. 가장 큰 문제는 남아 있지만.”

“가장 큰 문제요?”

“제시드 율페이든에 관한 것.”

엘피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제시드에 대한 일을 떠올리니 답답해졌다.

제시드는 자신을 죽이거나, 혹은 접촉하지 말고 자살하는 것을 방조하라고 했다. 그 사실 역시 트론에게 전하기는 했으나, 제시드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엘피는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걸 가슴 아파할 테니까.”

제시드가 무엇을 희생해 왔는지 들었다. 그가 한 행동이 루베인을 위한 것이었을지언정, 결과적으로 자신과 트론의 은인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의 죽음을 외면하는 것은 어려웠다.

“……전하께서 원하는 대로 하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건 트론이었다. 괴롭더라도 트론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면 평생 제시드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더라도, 그 사실을 감내할 생각이었다.

그때, 트론이 엘피의 뺨을 쓰다듬었다.

“있잖아, 엘피.”

“네…….”

“나는 엘피가 나 때문에 무언가를 참거나, 불행해지는 게 싫어.”

살며시 그녀에게서 몸을 떼며 트론이 엘피를 내려다보았다.

“제시드 율페이든이 폭주하게 된 건 마법과 주술이 결합한 장치 때문이라고 했지. 물론 죽이는 게 가장 간단하겠지만……. 그의 장치를 푸는 방법이 있을 거야.”

“저, 정말요?”

“아마도. 주술에 관한 건 할리케에게 조언을 구해야 할 것 같지만. 마법 쪽은 소백작과도 이야기를 해 봤는데, 아무래도 르터바이스 부군이 더 그쪽으로는 해박할 것 같더군.”

엘피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눈물을 참는 듯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그의 장치를 발동시키지 않으면서 접근할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느라, 그게 문제라고 한 거야. 처음부터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어.”

“왕, 자님…….”

“그러니까 그렇게 울지 마.”

트론이 엄지로 그녀의 눈물을 훑었다. 엘피는 어느샌가 흘러내린 눈물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쉽고 그릇된 길을 택하지 않고 올곧게 걸어 주는 것이 기뻤다. 그 누구도 아닌 트론만이, 유일무이한 자신의 왕이었다.

“죄송, 해요. 울지 않을게요.”

“응.”

옅게 미소 지으며 그는 몇 번이고 그녀의 뺨과 콧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엘피.”

“네, 네에.”

“더 시간을 두고 준비했다가 말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만……. 내 마음이 급해서.”

“어떤 말씀을……?”

그는 한 걸음 물러나 무릎을 굽혀 그녀 앞에 앉았다. 자신보다 낮아진 위치에 있는 트론의 모습에 엘피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엘피의 얼굴을 보고 생긋 웃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엘피. 나의 반려가 되어 줘.”

엘피는 깜짝 놀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당장은 여유가 없겠지만. 상황이 진정되면, 나와 혼인해 주었으면 해.”

“그, 그건…….”

“물론, 한 나라의 비가 되는 거니까 편한 자리가 아닌 건 알아. 그래도…… 엘피가 유일한 자리에서 내 옆에 있어 주면 좋겠어.”

심장이 쿵쾅거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런 욕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이었다.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그의 반려로서 힘껏 노력할 각오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엘피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트론의 집무실까지 왔는지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도 간신히 몸을 지탱할 정도로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용기가 부족하여 계속 미루고 있었지만, 이제 정말로 말해야 할 때였다.

“……싫은, 걸까?”

그녀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다른 뜻으로 오해한 것인지, 트론이 풀 죽은 얼굴을 했다.

엘피는 당황하여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전하와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

“그럼…….”

“하지만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녀는 책상에서 내려와 트론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달빛을 받은 그녀의 연인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홀리듯 바라보다가, 엘피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실은 저, 꽤 오랫동안 사라지거나 정신을 잃을지도 몰라요.”

엘피의 고백에 트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미안함을 느끼며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이미 두 번째가 된 회귀와, 그에 따른 페널티. 실제로 존재가 지워졌던 제시드의 이야기까지.

“몇 년이 될지, 몇십 년이 될지 저도 장담할 수가 없어요. 그런 제가 전하의 비가 되겠다고 약속하는 건 너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트론이 엘피를 와락 껴안았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 숨이 막힐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심정을 알기에, 엘피는 별말 없이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만약 반대 입장이었다면, 그녀 역시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이 세상에 트론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어, 째서.”

“죄송해요……. 하지만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전하가 힘들어지는 것보다는, 그런 페널티가 있더라도 과거로 돌아오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엘피는 자신의 어깨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트론이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를 따라서 울고 싶어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울 자격도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과거에 더, 라이샤의 힘을 잘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라이샤에 관해 알고 있는 지식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왔다. 그 덕에 이곳까지 간신히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기적 같았다.

엘피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론.”

“…….”

“그래도…… 꼭 론한테 돌아올 거야. 약속할게.”

“엘…….”

그의 팔을 풀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단정한 그의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트론은 어린 시절부터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언제나 의연했다.

그랬던 그가 눈물을 보이는 것은 항상 엘피 때문이었다.

마음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눈물을 참고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그러니까 론도 약속해 줘.”

손가락을 얽으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자신보다 훨씬 크고 딱딱한 손이 단단하게 잡혔다.

그가 한참 어린 시절에 항상 손을 잡고 다니던 일이 떠올랐다. 자그마한 소년은 성장했고, 오누이 같던 두 사람의 관계도 변했다.

그래도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던 그 마음만은 변하지 않았다.

“오래오래 살아서……. 꼭 행복한 성군이 되어야 해.”

그 소망을 담은 마음만은, 언제나.

돌아가기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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