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20)
들어가자마자 제시드가 황급히 트론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그 인사를 받아 주고, 방의 끝으로 시선을 던졌다.
꿈틀거리며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마법의 밧줄에 저항하고 있는 세틱스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형님.”
트론이 차갑게 인사를 건네자, 세틱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천출 새끼!”
“…….”
“대체 무슨 기묘한 마술을 부린 거지? 거기 있는 반푼이 놈까지 어느새 손에 쥐고 말이야. 응?”
예전이라면 움츠러들었겠지만, 회귀 전의 기억을 되찾은 제시드는 그저 딱한 눈으로 세틱스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별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하군요, 형님.”
“하!”
세틱스가 트론을 향해 침을 뱉었지만, 그에게 닿지는 않았다.
“말러 형은 어쩌고, 나만 이렇게 붙잡은 거지?”
“말러 형님과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그분께 왕세자 자리를 이양받기로 했거든요.”
그 말을 들은 세틱스가 분노한 듯 큰 소리를 냈다. 바로 몸을 일으켜 트론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제시드가 그의 몸을 묶은 밧줄을 제어하여 멋대로 움직이지 않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짓밟히면서 힘없이 울기만 하던 천출 주제에, 감히 나에게!”
“깨끗한 피 외에는 내세울 가치가 없으시다니 딱한 일이군요.”
트론은 그를 내려다보며 점차 마음이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어릴 적 자신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 고통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배다른 형이었다.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상처 자국을 깨끗이 지울 수 없는 것처럼, 끔찍했던 고통을 쉽게 잊을 수는 없었다.
완전히 우위에 서서 세틱스에게 모진 말이라도 돌려준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 기회가 돌아온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 화풀이를 하는 시간과 감정이 아까웠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엘피에 대해 떠올리고 싶었다. 분노와 복수에 함몰되어 그와 같은 나락에서 뒹굴고 싶지 않았다.
“내란 선동죄는 자국의 법에 따라 처리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겁게 다루어지는 죄니, 아마도 목숨을 부지하시기는 어렵겠지요. 모쪼록, 남은 시간을 소중히 보내시길 바랍니다. 형님.”
“네, 이놈……!”
“그래도 왕족이었던 바, 기본적인 예우는 갖추도록 지시해 두겠습니다. 그럼, 평안하시길.”
트론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맥이 풀릴 정도로 의미가 없는 시간이었다.
‘항상 만사가 유쾌해 보이더니, 자신이 우위를 점하지 못할 때는 그러지 못한 모양이군.’
세틱스의 고함을 뒤로한 채, 트론은 그저 그런 생각을 했다.
***
교단 급습을 시작으로 하여, 내란 공모와 관련된 자들은 모두 옥에 갇혔다.
헤럴드는 막판에 라블미에게 버려져서 엄밀히 말하면 사병 양성을 시작으로 한 내란 공모에는 직접 연관이 없었으나, 그간 저지른 살인 교사나 횡령 등의 죄목으로 잡아넣었다.
트론은 마지막 확인을 위해 옥에 갇힌 헤럴드를 만나러 갔다. 그는 쇠창살을 가운데 두고 헤럴드 앞에 섰다.
“오랜만입니다, 숙부님.”
“……트론.”
헤럴드는 손톱을 씹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비웃으러 온 건가.”
“그런 비효율적인 일을 할 이유는 없지요. 어차피 숙부께서 과거의 일을 반성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네 어미와 아비를 죽인 일로 나를 원망하는 것이냐.”
그의 질문에 트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세틱스와 만났을 때도 생각했지만, 그런 질문은 별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어릴 때는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제는 알겠습니다. 어차피 증오도 원망도 자신을 갉아먹는 감정입니다. 굳이 당신을 위해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럼 나를…… 용서하겠다는 거냐?”
트론의 눈빛은 차가웠다.
헤럴드 스레데니옴은 자신의 양친과 엘피의 식솔이 죽는 것을 사주한 주범이었다. 그에게 쓸데없는 감정을 쏟는 일을 피하려는 것뿐, 용서라는 번지르르한 말로 헤럴드의 죄를 가볍게 넘길 생각은 없었다.
트론은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신을 단죄하는 것은 이 나라의 국법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이제까지 죽여 온 수많은 사람의 목숨값을, 제 사적인 감정으로 처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 이놈!”
“물론 표면으로 드러난 당신의 죄는, 세틱스 형님이나 여타 공작들보다는 가볍긴 합니다. 그러니 극형까지 가진 않겠지요.”
“윽…….”
헤럴드의 얼굴이 볼품없이 구겨졌다. 라블미를 포함한 참모들이 그를 버렸기 때문에 내란 선동죄에는 해당하지 않아 극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것은 헤럴드가 왕좌 다툼에서 이용당하다가 중요한 국면에서 버려진 보잘것없는 패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 대신, 당신은 평생을 외롭고 초라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숙부께서 지은 죄에 비하면 무척 가벼운 벌이긴 하군요.”
열등감과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그릇에 맞지 않는 자리를 탐한 자에게 있어 가장 가혹한 결말이기도 했다.
“곧 재판에 회부하는 절차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후는 관리들이 친절하게 안내해 줄 겁니다. 그럼 안녕히 계시길, 숙부님. 이제 평생 다시 볼 일은 없겠지요.”
그 말은 단호하고도 일말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트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럴드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욕지거리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
헤럴드와 마지막 대화를 끝낸 후, 감옥을 나서려는 트론에게 간수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전하, 송구합니다만 잠시 말씀을 여쭈어도 될지요.”
“무슨 일이지.”
“실은…… 긴급 투옥된 수인 중 왕자님께 특별히 면담을 요청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트론은 대답하지 않고 그 인물이 누구일지 생각했다. 결론은 단 한 사람이었다.
“……라블미 백작인가.”
“짐작하신 바가 맞습니다. 규정상 안 된다고 해도 잠깐이면 된다고 어찌나 소란을 피우던지…….”
간수장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트론은 가볍게 끄덕여 그의 부탁을 받아 주었다. 간수장은 트론을 면회실로 안내했다.
이윽고 면회실 안으로 초록빛 머리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제대로 된 입옥 절차가 진행되지 않아, 그녀는 감옥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상태였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더러워진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라블미가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붙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트론 전하. 몰라보게 장성하셨습니다.”
“오랜만이군, 스승. 한가하게 덕담을 나눌 때는 아닌 듯하지만.”
트론이 건조하게 답했다. 라블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목소리를 냈다.
“전하. 아니, 이제는 폐하가 되시겠군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짧게 부탁하지.”
“이제부터 폐하의 치세가 시작되겠지요. 하지만 편치는 않을 것입니다. 스레데니옴 왕가는 혈육끼리 항쟁한 일이 많았으나, 지금처럼 체계를 흔들 만큼 큰 규모로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
“세 개나 되는 공작가가 몰락했습니다. 정치 싸움에 직접 손을 물들인 교단의 체면 역시 땅에 떨어졌죠. 백성은 이렇게까지 흔들린 나라에 대한 불신을 드러낼 겁니다. 혼란을 틈타 제 몫을 챙기려는 자들이 고개를 들지도 모릅니다.”
“그대는 저주를 하기 위해 나를 일부러 불렀는가?”
“아닙니다, 폐하. 그런 혼란한 시대에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라블미는 감옥과 어울리지 않게 화사하게 웃었다.
“당신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일하겠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하는지, 어떤 자들을 처단해야 하는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폐하를 위한 일을 할 것입니다. 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 스승의 수완은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지.”
“그렇다면……!”
트론은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스승이 말했었지? 어느 한쪽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날까지 끝나지 않을 전쟁에 발을 들인 거라고.”
“…….”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깨닫고 라블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대가 짓밟아 온 것을 잊지는 마. 지금 이 상황은 그 결과일 뿐이야. 그대는 동정도, 아량도, 나에게 바랄 권리가 없다.”
“당신은!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뭐가 그렇게 고고하다고……!”
“전쟁에서 살아남는 건 승자뿐이라지. 스승으로서 그대가 남긴 마지막 가르침은 잊지 않고 있어.”
“……너도 나랑 동류야! 어차피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절규를 남기는 중년의 여성을 향해 쓴웃음을 던진 후, 트론은 몸을 돌렸다.
“제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간다고 해도, 왕자님이 있는 지옥으로 찾아갈 거예요.”
언젠가 그의 라이샤가 남겼던 그 말을 떠올리면서.
***
세 공작가와 교단이 연루된 엄청난 규모의 내란 사건이 진정된 후, 예정대로 데니옴 회의가 진행되었다.
“트론 스레데니옴 전하 납시옵니다!”
호명에 맞춰 트론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망토가 나풀거리며 그의 몸을 감쌌다.
회의실 안에는 밀리엔 르터바이스 변경령 백작과 딜 마그달리사 소공작이 착석해 있었다.
현재 사건에 연루되어 피의자로 붙잡혀 있는 공작들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트론은 자리에 앉기 전에 묵묵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5년 전, 처음으로 데니옴 회의에 참석했던 일이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에 발을 내디디는 기분이었다. 그가 걸어가는 모든 길은 전쟁터였다.
평화롭게 이 자리에 다시 앉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기적과 같았다.
아니, 기적 그 자체였다.
그에게 빛을 선사한 이, 그의 라이샤. 엘피가 없었다면 이룩하지 못했을 결과였다.
“복잡한 사정 때문에 부재자가 많은 점, 유감으로 생각한다.”
“전하께서도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딜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
“인원이 적은 관계로 회의가 약식이 된 것은 아쉽지만, 기쁜 소식이 있다.”
“어떤 것이지요?”
“나의 큰 형님이자 왕세자이신 말러 스레데니옴 전하가 이 자리에 함께할 것이다.”
“아아, 왕세자 전하께서!”
밀리엔이 눈가에 주름이 잡히도록 밝게 웃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나, 그와 별개로 순수하게 기쁜 모양이었다.
이윽고 시종장이 다시 크게 호명했다.
“말러 스레데니옴 왕세자 전하 드십니다!”
선량하게 생긴 주홍빛 머리의 청년이 왕세자 정복을 갖추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트론과 영주 두 명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화기애애한 환담이 오가고,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회의의 주제는, ‘현재 비어 있는 차기 왕좌를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그 의제가 올라오자마자, 말러가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회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한 가지를 선언하고자 한다.”
“어떤 것일까요, 말러 전하?”
후에 역사적으로 트론 스레데니옴의 정통성에 가장 무게를 실어 주는 사건이었다 평하게 되는, 그런 선언이었다.
“나는 현재의 왕세자 지위를, 나의 아우 트론 스레데니옴에게 이양할 것이다.”
트론의 왕좌를 향한 길고 긴 여정의 끝이기도 했다.
돌아가기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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