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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27화 (127/132)

127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17)

그녀의 뺨을 감싸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목에 닿았다.

트론이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결코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입술부터 시작하여 그와 닿아 있는 팔도, 몸도, 모두 뜨거워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 아.”

다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엘피는 무의식중에 숨을 갈구하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그러자 트론이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것으로 지그시 물었다.

엘피가 몸을 움찔하자, 그가 등을 어루만지며 그녀를 달랬다. 트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천천히 입을 벌렸다.

마치 뜨거운 셔벗이 입 안에 닿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녹아드는 것 같은 감촉이 자신의 혀를 간질였다.

낯선 감각에 몸이 떨렸다. 질척이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들려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트론은 확인하는 것처럼 천천히 혀와 치열을 건드리다가, 그녀가 익숙해지는 타이밍을 노린 것처럼 적극적으로 혀를 얽어 왔다.

엘피는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끼면서도 도망치지 못했다.

때때로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고, 유일한 생명줄인 양 그를 꽉 붙들 수밖에 없었다.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마치 누군가가 머릿속을 휘젓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머리부터 완전히 녹아 버려서, 온몸이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았다.

“으, 읏……. 하아, 하아…….”

간신히 입술이 떨어지고 난 후에도 흥분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트론이 그녀의 입술에 흘러내린 타액을 정성껏 핥아 올리자, 그 감촉에도 몸이 반응했다. 엘피가 어깨를 떠는 것을 보고 트론이 나지막하게 사과했다.

“……미안, 너무 심했나?”

“…….”

“싫었어?”

“시, 싫은 건 아닌데…….”

“아닌데?”

“……부끄러워요.”

엘피는 트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대로 가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트론은 작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엘피, 귀여워.”

“노, 놀리지 마세요.”

“하지만 정말 귀여운걸.”

“…….”

그녀는 대답 대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트론은 간지럽다고 키득대면서도 그녀의 행동을 막지는 않았다.

엘피는 이전에 종종 트론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가슴에 귀를 대던 일을 떠올렸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것, 또한 자신이 그의 옆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아득한 시간을 반복하여 손에 쥘 수 있는 기적이었다.

“엘피, 좋아해.”

“……저도요.”

트론이 진심으로 기쁜 듯 웃음을 흘리며 입술을 겹쳐 왔다. 농밀하게 깊어지는 키스를 받아들이며 엘피는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 미래에 대한 불안은 있었다. 회귀를 한 페널티가 어떻게 발동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또한 마음을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온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트론은 왕궁으로 복귀하자마자 엘피에게 들은 미래의 정보를 바탕으로 이후 대책을 세우기 위해 분주했다. 다시 그의 얼굴을 보기 어려워졌지만, 그녀는 트론과 마음이 통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엘피는 안정을 취하라는 트론의 엄명을 받고 방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실제로 회귀한 이후 스스로도 느낄 정도로 몸 상태가 무척 나빠졌기에 그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욕실에서 씻고 나왔다.

그 후 몸단장을 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몸을 봤다가 흠칫했다. 순간적으로 몸이 반투명하게 얼비쳤다. 하지만 그러기를 잠깐,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라이샤의 힘을 쓴 페널티.’

두려움에 심장이 뛰었다. 제시드는 6년이라는 긴 세월을 존재가 지워진 채 유령처럼 지냈다.

자신도 제시드처럼 그렇게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혹은,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식물인간처럼 잠드는 건 아닐지. 끔찍하게 무서웠다.

하지만 각오한 바였다. 트론에게 행복한 미래를 안겨 주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생각이었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무사히 회귀한 것만 해도 행운이었던 것 아닌가. 그녀는 마음을 추슬렀다.

‘왕자님한테 내가 아는 정보는 다 전했지만, 그전에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 두자.’

회귀하고 나서 혼란스러웠던 것도 있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거의 잠만 자느라 사먼과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녀는 얼른 테라스 창문을 열었다.

“사먼. 거기 있죠?”

엘피의 부름에 사먼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엘피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회귀 전에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미끼가 되었던 기억이 선명했기 때문이었다.

“네, 엘피 님. 뭔가 필요하신 것 있으신가요?”

“……아뇨. 있잖아요, 사먼.”

“넵!”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저는 외동이지만…… 사먼이 있어 주어서 항상 오빠가 있는 것처럼 든든했어요.”

그 말을 듣고 사먼이 동요한 듯 눈을 굴렸다.

“그…… 그건, 너무 과분한 말씀, 같은데요…….”

“전혀 안 그래요. ……물론 여동생분의 대신은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친구처럼, 동생처럼……. 앞으로도 저를 그렇게 여겨 주시면 기쁠 것 같아요.”

“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저, 저는 이번에 엘피 님을 위험에 빠뜨렸고…….”

안절부절못하는 사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미래에서 온 엘피의 입장에서는 웰칸 연합의 납치 사건이 꽤 이전 일처럼 느껴지지만, 사먼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괜찮아요. 이제는 안 그러실 거잖아요?”

“다,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함께 미래만 생각해요. 그래 주실 거죠?”

사먼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간신히 끄덕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닥으로 뚝뚝 눈물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엘피는 언젠가 웰칸 연합에 모여 있던 유골들을 땅으로 옮기게 되는 날이 오면, 트론과 함께 볕이 따뜻한 날 사먼의 여동생을 만나러 가자고 생각했다.

그런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지금으로 돌아오게 되어 다행이었다.

***

“말러 왕세자 전하의 안전은 최우선으로 확보했습니다. 지시하신 처필 쪽의 사병 양성 정황도 증거를 수집하고 있고요. 처필과 솔피시언, 데하스의 연결 고리까지 함께 묶어서 고발하는 걸 목표로 하겠습니다.”

트론의 명을 받아 처리하느라 세상에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온 가이가 간단하게 보고했다. 전후 상황을 확인한 트론은 가볍게 끄덕였다.

“응, 부탁한다.”

“하여간 우리 전하께서는 사람 부려먹는 게 심하세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한다.”

“……뭐 잘못 드셨어요?”

가이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트론은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잘못 먹은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인생의 큰 전환기를 맞이한 건 맞으니까.”

“흠…….”

가이는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짓궂은 얼굴을 했다. 그간 명령을 처리하느라 심각하게 바빠서 트론을 놀려먹을 여유도 없었지만, 좋은 기회인 것 같았다.

“역시 엘피 님이랑 무슨 일 있으셨던 거죠?”

“응.”

트론이 담백하게 긍정해서, 역으로 허가 찔린 기분이었다.

가이는 눈을 크게 뜨고 몇 번 깜빡였다가 안경을 고쳐 썼다.

“……무슨 일 있으셨는데요?”

“고백했어.”

“세상에!”

이렇게까지 빠른 속도로 결말이 났을 줄은 가이로서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서류를 쥔 상태로 손뼉을 쳤다.

“와, 세상에. 그런데 섭섭하네요! 한 마디라도 미리 말씀 좀 해 주시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히잉. 진짜 저한테 너무 차가우셔. 저와 전하의 길고도 깊은 우정이 겨우 그 정도였나요.”

가이는 서류를 팽개치며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우는 시늉을 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트론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격의 없는 형제끼리는 살갑게 굴지 않는 법이라던데.”

“네?”

“됐다. 가서 일이나 봐.”

“어, 형제! 형제라고 하셨죠? 맞죠?”

“환청이겠지.”

“그러지 마시고 형이라고 불러 주세요! 자, 어서!”

“나가.”

결국 가이의 오랜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

“……끝까지 형이라고 안 불러 주신 거 있죠. 저희 전하 진짜 너무하지 않나요?”

궁을 나가기 전에 병문안 겸 엘피의 방에 들른 가이가 아까 있었던 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엘피는 후후 웃으며 답했다.

“전하께서도 쑥스러워서 그러시는 거예요. 두 분 정말 사이좋으시잖아요. 부러울 정도인걸요.”

“저랑 전하 사이를 부러워하실 게 뭐가 있나요. 두 분은 이제 연인 사이잖아요.”

가이가 직설적으로 놀리자 엘피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트론을 놀리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걸 만회하는 듯 가이의 눈이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제가 두 분을 보면서 어찌나 마음 졸였던지.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안 가서 다행입니다.”

“아하하……. 제가 미래를 겪고 회귀했던 것까지 따지면 꽤 오랜 시간 헛돌았지만요.”

“저런. 그 미래의 저는 복장 터져서 죽기 일보 직전이었겠군요.”

“……항상 마음 써 주셔서 감사했어요.”

“오히려 저야말로 두 분 덕분에 즐거운 구경을 했으니 감사할 일이죠.”

말투는 놀리는 것 같았지만, 엘피는 그것이 가이 나름대로의 축복의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 밖으로 친구라는 말을 직접 하지 않았어도, 그와는 오랜 친구나 다름없었다. 전혀 불쾌할 일이 아니었다.

“실은 그렇잖아도 가이 님을 만나려고 했는데, 와 주셔서 감사해요.”

“왕자님하고 연애담 자랑하시려고요? 환영합니다, 어서 해 주세요. 고백은 누가 먼저 했나요?”

“읏……. 그, 그런 거 아니고요!”

엘피의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화제를 바꿨다.

“미, 미래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가이 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음……? 왕자님한테 말씀드린 미래 예지 말고, 다른 것이요?”

“네. 가이 님한테 개인적으로 드릴 이야기라서.”

그녀는 손을 가지런히 모은 후 하늘처럼 맑은 눈으로 가이를 응시했다.

제시드를 포획하는 일 때문에 바실리가 움직였고, 목숨을 바쳤던 것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가 자신과 루베인을 포털로 보냈던 마지막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엘피의 목소리가 약간 젖어 있었다.

“……그때, 부군께서 가이 님께 전해 달라고 한 말씀이 있었어요.”

“…….”

“물론, 지금은 르터바이스 부군께서 건강히 잘 계시니…….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을 전하는 건 조금 불경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아뇨.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가이가 차분하게 허락하자, 엘피는 두 손을 모아 꾹 쥐며 말했다.

“밀리엔 다음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건 정말이랍니다.”

“…….”

“……이상입니다.”

가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엘피는 그때의 간절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그에게 전해졌기를 바라며 가이의 반응을 기다렸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가이가 길게 한숨을 뱉었다. 무언가 크게 안도한 것 같기도 하고,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여간, 그 사람은…….”

“……지, 진심이셨을 거예요.”

“압니다. 그 사람이 빈말을 할 리는 없죠.”

그는 머리를 흐트러뜨리듯 긁적였다가 깔깔 웃었다.

“아, 정말이지. 이 나이 먹어서 무슨 사춘기 일기 쓰는 것도 아니고.”

“…….”

“엘피 님이 기대할 만한 대단한 화해는 못 할 것 같지만. 그래도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이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엘피는 슬쩍 덧붙였다.

“……당분간은 바쁘시겠지만, 나중에라도 연락 꼭 드리세요.”

“뭐, 봐서요.”

가이는 트론에게 받은 일을 처리해야 한다며 얼른 일어나 그녀에게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물론 바쁜 것도 맞겠지만, 아마도 생각 이상으로 쑥스러워서 자신의 얼굴을 보기 민망했던 것 아닐까. 가이의 마음을 짐작하며 엘피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미래에 있었던 그 비극이, 그대로 비극으로 끝나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아.”

그때, 손바닥이 투명하게 흔들렸다가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본격적인 페널티까지,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엘피는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트론에게 말해야 했다.

돌아가기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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