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16)
끝없는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을 때, 엘피는 자신이 어딘가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귀, 한 건가?’
그녀는 눈을 뜬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그마한 거실 안에 소박한 가구와 낡은 화분, 벌레 먹은 기둥이 보였다. 그 풍경을 인식하자마자, 엘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기는…….’
“엘.”
그립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단출한 평민복 차림을 한 트론이 엘피가 앉아 있는 소파 앞으로 걸어왔다.
“……로, 론.”
“응.”
“설마, 나…….”
아예 회귀하기 이전의, 트론과 평민으로 살던 때로 돌아온 것일까? 하지만 이미 과거로 돌아가서 그 시절은 사라진 것 아닌가?
혼란에 빠져 입을 달싹이고 있으려니, 트론이 엘피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게 아니야. 엘피는 아직 회귀하지 않았어.”
“어……?”
엘피가 입 밖에 내지 않은 생각을 읽은 것처럼, 트론이 답했다.
“제시드가 말했었지? 기억의 조각이라고.”
“아!”
엘피는 회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열여덟 살의 트론과 만났었다.
“엘피. ‘나’는 아직 어리석지만, 그래도 너를 선택했어. 그러니까…….”
어쩌면 그때 만났던 것도 지금 눈앞에 있는 청년이었을지도 모른다.
“……회귀 전, 론의 기억?”
“응. 나는 일종의 환상 같은 거니까…… 엘이 겪어 왔던 일도 알고 있어.”
트론은 엘피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간 많이 힘들었지?”
엘피는 저도 모르게 울컥하려는 것을 참았다.
“……아냐, 나보다는. 론이 고생했잖아. 그러다가…… 나보다 먼저 죽었잖아.”
그 말은 어딘지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흘러나왔다. 트론은 온화한 표정을 누그러뜨리지 않으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응. 미안해.”
“미안한 사람이 왜 그랬어…….”
“나는…… 네가 없으면 계속 살아갈 자신이 없지만. 엘피는 따스하고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니까. 혼자서도 분명히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어.”
“안 그래…….”
엘피는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쳐 내며 고개를 저었다.
“론이 없으면 조금도 행복하지 않아……. 차라리 그럴 거면 같이 죽는 게 나았어.”
“하지만 나는…… 천국에 갈 수 없는 사람이니까. 어차피 엘피랑 영원히 만날 수 없었을 거야.”
그는 엘피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있잖아, 엘피. 사실 나는 회귀 전에 네가 모르는 데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어. 왕이 되기를 포기하면서 할리케를 죽이고 웰칸 연합을 해체시켰어. 너랑 조용히 평민으로 사는 동안에도 세틱스 형님의 도구가 되어서 정적들을 제거했어.”
“…….”
“……그래도 엘피랑 조용히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세틱스 형님은 끝내 나를 믿지 못했어. 결국, 내 판단이 잘못된 거였지.”
트론은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다. 엘피는 엉엉 울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의 셔츠를 적셨다.
“내가 어리석어서 엘피를 지키지 못했어. 미안해.”
“아니, 에요. 왕자님. 저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흑, 바보 같아서…….”
그가 깊이 담아 두던 고뇌도 아픔도 무엇 하나 모른 채, 과거의 일들을 그저 행복하고 평온했던 추억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행하도록 해. 물론 힘들 때도 있을 거고, 네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가려진 진실이 있겠지만.”
언젠가 제시드가 남겼던 그 말을 다시금 실감했다.
그녀가 모르는 진실이 이토록 많았다. 그 사실이 분하고, 트론에게 미안했다.
“이제 두 번 다시, 왕자님을 외롭게 만들지 않을게요.”
“……엘피.”
“제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간다고 해도, 왕자님이 있는 지옥으로 찾아갈 거예요.”
“내가 걱정되어도 지옥까지 오지는 마.”
언젠가 들었던 그 말을 부정하는 것처럼, 엘피는 눈물을 참으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고마워.”
“전하…….”
“……‘나’와 함께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 달라고 했던 그때의 말을 끝까지 지켜 준 것도, 고마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트론은 부드럽게 웃었다.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나’는 엘피만 있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다시 만나자.”
“네……!”
안고 있던 청년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빛의 가루가 엘피의 몸을 감쌌다.
이것은 이별이 아니었다. 자신은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돌아왔다.
엘피는 두 손을 모으며 간절히 빌었다.
‘……전하가 행복해질, 미래를 위해서.’
과거에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기를.
다시 새하얀 빛이 그녀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
처음 느낀 것은 덜컹거리며 불규칙적으로 울리는 기계음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얼굴에 닿은 따뜻한 물방울이었다.
“아…….”
엘피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너머에서,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트론의 모습이었다.
“엘, 피…….”
그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눈물이 뚝뚝 흘러 연달아 엘피의 얼굴을 적셨다.
엘피는 무의식중에 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가 슬프게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트론이 눈물을 참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가 엘피를 와락 안았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와중 겨우 주변을 돌아보았다.
좁은 칸 안의 침대, 그리고 차창. 열차 내의 침대칸이었다.
서서히 머릿속이 맑아지고, 지금이 언제인지 알 수 있었다. 웰칸 연합에 납치당해 완전 예지의 힘을 쓴 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그때였다.
‘정말로…… 돌아온 거야.’
온몸에서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몸을 마주 안았다. 어깨를 적시고 있는 그의 눈물에 더욱 현재 상황이 실감 났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왕자님.”
“…….”
그는 대답 없이 그녀를 꽉 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의 포옹에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도 염려했던 것처럼 바로 모습이 사라지거나 정신을 잃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제 그에게 미래에 대한 일을 설명할 차례였다.
“전하, 실은 드릴 말이 있어요.”
엘피가 침을 삼키며 그 말을 건네자, 트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 안 해도 알아.”
“네……?”
“엘피가 회귀해서 과거로 돌아온 것도. ……그전에, 내가 죽어서 회귀한 예전 일도.”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떼었다.
“그걸 어, 떻게…….”
“지금, 내 안으로 들어왔어. 기억의 조각이…….”
엘피는 눈을 크게 뜬 채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그를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운 와중, 제시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마 엘피 양의 고유 능력은 기억의 조각에 접촉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어.”
‘어쩌면, 내 고유 능력은…….’
기억의 조각에 닿는 것뿐만 아니라, 그 기억을 본인에게 돌려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트론이 뚝뚝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손을 쥐었다.
“내가 더…… 빨리 알아줬으면 좋았을 텐데.”
“읏…….”
엘피의 몸이 떨렸다. 회귀한 후, 그녀는 때때로 이 세계의 이방인같이 붕 뜬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회귀 전의 트론과 쌓아 왔던 길고 긴 시간은 자신 안에만 있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기억이 그곳에 존재했다.
점차 그 추억이 흐려져 가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었다. 피를 흘리며 자신을 대신해서 죽은 그를 자신만 추모하는 것이 아득하게 외로울 때가 있었다.
“……론. 정말, 다 기억해?”
“응. 처음 토마토 스튜를 만들어 줬을 때 엘피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로 웃던 것도, 전부.”
“아…….”
회귀 후 트론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예전의 이야기였다.
정말로, 그가 떠올려 준 것이다.
아득하고도 그리우며, 슬프고도 달콤했던 두 사람만의 나날을.
엘피는 제 안의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트론의 품에 파고드는 것처럼 안겼다. 그는 엘피의 등을 천천히 도닥였다.
참지 못하고 그녀가 엉엉 우는 소리가 침대칸을 한참 채웠다.
***
“……이제 좀 진정됐어?”
“네……. 너무 울어서 죄송해요.”
“아냐. 나도 울었잖아.”
엘피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트론의 뺨을 쓰다듬었다.
“전하가 우는 거 싫어요.”
“나도 엘피가 슬퍼서 우는 건 싫어.”
“……아녜요. 지금은 기뻐서 운 거예요.”
“응.”
아직 눈물에 젖어 있는 엘피의 뺨에 트론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그녀는 숨을 삼키며 트론의 옷깃을 쥐었다.
“저, 저어. 그럼 왕자님. 제가 겪은 미래의 일도 전부 알고 계신 건가요?”
엘피는 회귀 전에 기억의 조각으로 만났던 트론이 자신이 겪은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엘피랑 꿈속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은 있지만.”
“아……. 그럼 설명해 드릴게요. 아, 앞으로 여러 가지 큰일이 일어날 거라…….”
“그 전에.”
그녀의 눈과 이마에 이어서 입술이 닿았다. 부드럽게 보듬는 듯한 그 감촉에 엘피는 귀까지 홧홧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엘피는 몰랐을 것 같지만.”
“……?”
“나는 엘피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회귀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아…….”
엘피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맺혀 있던 눈물이 다시 주르륵 흘러내렸다.
트론이 입술로 그녀의 눈물을 훑었다.
“하지만 엘이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다가갈 수 없었어.”
“……거리를 두자고 했던 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엘피는 자신이 지금 무척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있잖아, 론.”
“응.”
“나도 론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있어.”
언제나 침착한 트론이 드물게 놀란 얼굴을 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가족으로서?”
“아냐.”
마치 답례처럼 젖어 있는 그의 뺨에 살며시 입 맞춘 후, 엘피는 또렷하게 답했다.
“한 사람의 남자로서, 사랑해.”
트론의 얼굴이 붉어 보였다. 그 눈에는 아릿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엘. 그럼 더…… 가까이 가도 돼?”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엘피는 자신의 뺨을 감싼 트론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미소로 대답했다.
“응, 론이 바란다면 얼마든지.”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트론이 어깨를 감쌌다. 다음 순간, 그녀의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엘피는 입술에서 느껴지는 낯선 체온에 눈을 꽉 감았다.
트론의 입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지고 맞붙기를 반복했다. 마치 그곳에 있는 그녀를 확인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새가 부리를 비비는 것처럼 친애를 담은 입맞춤이 오갔다. 그것만으로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귀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돌아가기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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