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15)
어쩌다 보니 발동한 힘을 사용하기만 했을 뿐, 신의 목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전생에서 지금 세계의 일을 책으로 읽었다거나, 전혀 다른 세계로 환생을 했다거나 하는 것도 자신의 망상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때로 우울한 마음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다.
그것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확인받은 것이 안심되고도,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트론이 죽었고……. 너는 그때 비로소 라이샤의 힘을 썼지. 울면서 신에게 그를 죽게 하지 않겠다고 간절히 빌었기 때문에.”
“……네, 맞아요. 회귀 또한 라이샤의 힘이라는 건 몰랐지만요.”
“그러다가 처음에 라이샤로서 미래를 볼 때, 트론이 아니라 루베인에 대한 걸 주로 봤었지?”
“그랬어요. 루베인이 독에 당해 쓰러져 있는 모습이라거나, 르터바이스 협곡에서 위험했던 거라거나.”
“남은 내 힘을 엘피 양에게 밀어 넣었기 때문에 그래. 그 여파였던 거지.”
엘피는 제시드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만큼 눈앞의 청년은 루베인을 걱정하고 아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원작의 내용대로라면, 무척이나 사랑했을 것이다.
이제 명확히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고 있는 그녀는, 제시드의 마음 역시 헤아릴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짜내어, 사랑하는 이가 불행한 미래를 맞이하지 않도록 발버둥 쳐 온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랬던 제시드가, 지금은 돌연 적이 되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마치 개인의 의지를 잃은 것처럼 세틱스의 꼭두각시가 되어 행동하고 있다.
엘피는 그가 가짜가 아닌지 의심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제시드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
“……그럼, 제시드 율페이든은 누구인가요? 지금의 제시드 님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데요.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나이가 어리고, 평민도 아니고요.”
“응. 아까 말했던 것처럼…… 나는 라이샤로서 힘을 남발하면서 ‘존재가 소멸한다’는 페널티를 짊어지게 되었지. 그래서 내가 엘피 양에게 힘을 맡기고 다시 회귀했을 때…… 이 세계에 ‘평민이며, 빵집 둘째 아들이었던 제시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어.”
“…….”
엘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각오했다고 해도, 그게 쉬웠을 리는 없을 것이다.
라이샤로서 루베인을 위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했다고 한들,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회귀 전에 그들과 쌓아 왔던 인연이나 추억들이 이 세계에서 말끔하게 사라진 것이다.
그 고통을, 과연 누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렇게 혼이랄까…… 잔류 사념은 남아 있었거든. 마음대로 떠돌아다니지 못해서 엘피 양에게 접촉할 수는 없었지만. 그 부작용 때문인지, 이 세계에서 ‘제시드’가 사라졌지만 ‘제시드’의 혼을 담을 육체는 필요하다는, 그런 오류가 발생했던 것 아닌가 싶어.”
“아…….”
“그래서 이 세계에 내 혼을 담을 새로운 그릇이 추가된 거야. 율페이든 후작가의 삼남, 제시드 율페이든이라는 존재가 새롭게 생겨난 거지.”
이 세계의 ‘시스템’이라는 것은 기이하고도 절대적이었다. 또한, 교단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을 굽어살피는 자비로운 것하고도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잔류 사념이 따로 몸 밖에 빠져나와 있는 기이한 형태라서, 제시드 율페이든은 태어날 때부터 혼이 없는 백치 같은 상태였어. 회귀 전에는 내내 그랬고, 이번 삶에서는…… 그날 연회장에서 엘피 양을 만나고 난 후에야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거지.”
“그리고 원래 몸으로 돌아가신 다음에는, 기억을 잃으신 건가요?”
“응. 내가 이전에 라이샤였던 것 같고, 누군가를 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어렴풋한 강박관념만 남은 상태로 말이지.”
“…….”
“그게 바로, 지금의 제시드 율페이든이야. 지금 엘피 양과 이야기를 나누는 나는…… 그의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는 기억의 조각이라고 해야 할까.”
“기억의 조각이요……?”
“응. 라이샤는 공통적으로 미래를 읽는 힘과 회귀하는 힘이 있지만, 그 외에 개인의 고유 능력이 있어. 내 경우에는 그게 ‘완전 예지’였지.”
“제시드 님의 고유 능력인데 제가 쓸 수 있었던 건, 힘을 물려받아서인가요?”
“맞아. 여기서부터는 나도 신에게 듣지 못한 추측의 영역인데…… 아마 엘피 양의 고유 능력은 기억의 조각에 접촉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어.”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전에 ‘원작’이라고 생각했던, 폭군이 된 트론을 꿈에서 만났던 일이 생각났다.
라이샤로서 본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과거의 일인 것이 이질적이었다.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꿈에서 회귀 전의 론과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여러 번 있었어. 그냥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기억의 조각이었던 걸까.’
엘피는 입술을 깨물었다. 예전 일들을 알고 나니 납득이 가는 점도 있었고, 가슴이 아픈 부분도 있었다.
제시드는 존재를 희생하여 회귀하고, 남은 힘을 자신에게 주었다. 그 덕분에 자신은 죽지 않고 과거로 돌아왔고, 트론이 죽지 않는 현재까지 올 수 있었다.
그가 루베인을 생각해서 한 일이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그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제시드 님의 기억이 사라져서, 저희와 적대하게 된 건 알겠어요. 솔피시언의 방계였던 율페이든 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되었으니, 세틱스 전하의 가신으로 일하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겠죠.”
“…….”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공격적으로 변한 건가요?”
제시드의 얼굴이 고통을 참는 것처럼 죄책감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겨우 떴다.
“……미안해. 나 때문에 아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어.”
“…….”
“변명하려는 건 아니야. 그 죄가 사라지지 않는 것도 알아……. 다만, 그건 제시드 개인의 의지는 아니었어.”
엘피는 어렴풋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틱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그는 인간적인 느낌이 없이 마치 기계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세틱스 스레데니옴의 명령으로 제시드가 자신의 몸에 장치를 해 놨기 때문에, 그 장치가 발동되어서 그런 거였어.”
“장치……?”
“응. 마법이랑 주술을 복합적으로 얽어 놓은 복잡한 장치야. 제시드 본인은 풀 수 없는 그 장치는…… 제시드의 양심이, 자신이 세틱스를 배신했다고 판단할 때 발동해.”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장치가 발동하는 순간, 그는 이성을 잃게 돼. 그리고 세틱스의 명령에 따라 적이라고 판단하는 모든 인간을 말살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지. ……세틱스만을 위한 살육 병기라고 해야 할까.”
“……어, 째서. 그런 끔찍한 짓을!”
“제시드가 5년 전에 깨어나, 세틱스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이야. 그때 제시드는 실수로 마법의 불을 일으켜 세틱스를 죽게 할 뻔한 적이 있어.”
“…….”
“의도한 건 아니더라도, 그건 세틱스에 대한 일종의 배신이잖아? 그래서 세틱스가 제안했어.”
“알겠냐, 제시드? 네가 뭔 머저리 같은 짓을 벌이든 상관없어. 배신하지만 않으면 돼.”
“배신…….”
“그러니까 너는 이제부터, 그 잘난 마법과 주술을 이용해서 나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조건의 장치를 만들도록 해.”
“……배신한 순간, 살육 병기가 되는 설계는 세틱스의 취향이 반영된 거였지. 제시드의 성격이 심약하니까, 절대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으리라는 걸 노리기도 한 거고.”
“윽…….”
엘피가 세틱스의 처사에 분노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제시드는 서글프게 웃었다.
“……이제, 대략 전할 이야기는 다 전한 것 같아.”
“제시드 님…….”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할 건, 네가 회귀하고 나서 몸 상태를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야. 이미 엘피 양은 회귀의 힘을 한 번 썼으니까.”
“……저도, 제시드 님처럼 사라지게 될까요?”
“글쎄, 엘피 양은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하는 페널티를 받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클 것 같아. 다만……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계속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르지.”
“…….”
엘피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의 엘피 양은 나처럼 무리해서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회귀할 필요는 없으니까. 최대한 짧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페널티가 경감될 수는 있을 것 같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제시드 율페이든에 대한 것이려나.”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시드에게 걸려 있는 장치를 생각하면, 그를 트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제시드의 몸에 장치가 걸리기 전으로 회귀하기에는, 페널티 때문에 얼마만큼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제시드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딱 한 가지야.”
“딱 한 가지……?”
“그가 자살하려는 걸 막지 마.”
엘피는 저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처음 대면했을 때 제시드가 필요 이상으로 도발적인 태도를 취한 걸 기억하지?”
“서, 설마…….”
“응. 그는 처음부터 곱게 죽을 생각이었어. 마그달리사 공작은 현재 중립이니까, 루베인을 데려다주는 것 자체는 세틱스를 배신하는 게 아니잖아. 그래서 루베인만 그쪽으로 보낸 다음, 혼자가 되면 자살할 생각이었던 거야.”
“읏…….”
“하지만 의도치 않게 너희 일행과 만나게 되어서 꼬였지. 티가 나게 허술한 태도를 보여서 포로로 잡히거나 루베인을 너희 쪽에 보내면, 세틱스를 배신하는 결과가 되니까.”
“그래서…… 죽여 달라고 했던 거군요.”
엘피는 그가 바실리의 마법에 붙들렸을 때 비통하게 외쳤던 말을 떠올리며 숨을 삼켰다.
“맞아. 원래는 자기를 죽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도록 상대를 몰아세울 생각이었던 거야. 루베인을 보호하느라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
“그러니까 회귀하게 되면…… 제시드와 마주치지 말고 혼자 자살하게 놔두든지, 아니면…… 그의 목숨을 끊어 버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해.”
“하, 지만……. 그래서는…… 당신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엘피는 글썽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먼이나 바실리의 죽음을 생각하면 그는 원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남은 라이샤의 힘을 넘겨주어 자신과 트론이 새로운 삶을 얻게 한 은인이기도 했다.
너무도 참담한 심정이었다.
“……엘피 양은 참, 착하구나. 그렇게 마음 써 줄 것 없는데. 미안해, 괜히 길게 사정을 설명해서 마음의 짐만 얹어 줬구나. 그래도 설명하지 않으면, 엘피 양이 회귀해서도 같은 실패를 반복할지 모르니까.”
“흑…….”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부예진 시야 속에 제시드의 모습이 점차 투명해져 갔다.
“……슬슬 끝인 것 같아. 모쪼록 빛이 엘피 양을 이끌기를 빌게.”
“제시드, 님…….”
그가 입에 담은 말은 언젠가 테라스에서 남긴 것과 같았다.
“내 이야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엘피 양은 해낼 수 있을 거야.”
“저는…….”
“그리고 가능하면…… 루베인을…….”
부탁한다는 그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엘피는 오열을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같은 사람에게 다시 똑같은 유언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모르겠어. 무엇이 정답인지.’
그래도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엘피는 무의식중에 귓가를 어루만졌다.
트론이 생일 선물로 준 루비 귀걸이가 손에 닿아 잘그락거렸다.
되돌아간 곳에 트론이 있었다. 자신의 주군이자, 사랑하는 이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모든 고민도, 고통도, 나아갈 길도 그와 함께 나누었다.
‘다시 한번, 전하와 새로운 미래를 쥘 수 있도록……. 제게 힘을 주세요!’
몸이 붕 뜨는 감각, 또한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엘피의 몸을 감쌌다.
이윽고 새카만 어둠이 그녀를 가두었다.
돌아가기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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