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14)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엘피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그녀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제시드가 말을 이었다.
“……엘피 양도 나랑 같을 거야. 전생에서 ‘이 세계’에 대한 책을 읽었지?”
“마…… 맞아요.”
“그 책의 제목과 장르는 어떤 거였어?”
“제목은 <금빛 날개와 은빛 검>……. 그리고 장르는 로맨스 판타지였어요.”
“그랬구나. 내가 읽은 책은 <마그달리사 연대기>였어. 로맨스 요소가 없는 가상 역사물에 가까웠지.”
“……어, 어라?”
엘피는 그가 읽은 책의 제목이 자신이 아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제시드에 대한 경계심이나 공포는 점차 가라앉았지만, 그 대신 의구심과 혼란스러움이 머리 가득 자리 잡았다.
“정확히는 그건 실제로 존재하는 소설이 아니라, 자신이 환생할 미래를 책의 형태로 우연히 엿보는 것에 가까워. 말 그대로 ‘가능성의 기억’을 읽는 거지. 미래에 그렇게 될 가능성 말이야. 그래서 보는 사람마다 책의 이름이나 서술 형식, 내용이 다른 거야.”
“……생각지도 못했어요.”
“보통은 그럴 거라고 생각해. 나도 깜짝 놀랐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전생을 엿본 사람들이 모두 라이샤가 되는 건 아니야. 전생을 떠올린 자만이, 라이샤가 될 자격을 얻게 돼.”
생각지도 못한 정보가 머리에 넘쳐 혼란스러웠지만, 엘피는 간신히 그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럼 저는 혹시, 제시드 님이 라이샤였을 때 전생을 떠올리지 못한 상태였던 걸까요?”
“응. 내가 라이샤였을 때 너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트론의 시녀, 엘피 이나드로서 존재했어.”
엘피는 꿈으로 보았던 ‘원작’을 다시 떠올렸다. 아무 힘도 없어 자책하던 어린 시녀 엘피 이나드와 폭군이 된 트론…….
역시 그 두 사람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과 트론이었다.
“엘피 양의 경우에는 라이샤로서 각성한 상황이 특수해서 몰랐겠지만……. 나는 라이샤로서 이 세계에서 각성했을 때 신의 목소리를 들었어. 신이라기보다, 내가 느끼기에는 감정이 없는 시스템 같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시스템이요?”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튜토리얼이라고 할까? 지금 내가 설명한 것들을 쭉 훑어 주었거든. 라이샤가 전생을 각성한 자라거나, 전생에서 읽었던 책의 내용이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거나. 라이샤가 쓸 수 있는 힘이나…… 페널티도.”
엘피는 자신이 힘을 쓰면서 정신을 한동안 잃었던 것, 그리고 제시드가 완전 예지를 쓰고 존재가 사라졌던 것들을 떠올렸다.
잠시 엘피를 바라보던 제시드는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내고 손가락을 휘저었다. 그러자 새하얀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였다. 서서 이야기하기에는 길어질 것 같아서 배려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제시드의 권유를 받고 잠시 망설이다가 의자에 앉았다. 제시드는 조용히 그 건너편에 마주 앉았다.
“내가 알고 있는 책에서 나는 초반에 죽는 평민 엑스트라였어. 영웅담에 흔히 있잖아. 악당에게 희생당하는 엑스트라, 그 죽음에 분노하여 정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는 주인공. 내 역할이 바로 그 희생양이었던 거지.”
“……저랑 비슷하네요.”
“응. 나는 그때만 해도 라이샤로서 왕을 세우는 것보다는, 내 목숨을 보전하는 게 중요했어. 그래서 내가 죽는 그 사건만 모면하고 도망쳤지. 어차피 내가 손대지 않아도 루베인은 트론을 물리치고 영웅왕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내가 봤던 책에서 그랬으니까. 하지만…….”
제시드는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죽는 사건이 사라지고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타임라인이 꼬여서 루베인은 불의의 사고로 죽고 말았어. 트론으로서도 본의는 아니었겠지. 그의 계획으로는 자신은 루베인의 손에 죽고, 그녀가 왕이 되는 게 가장 깔끔한 마무리였을 테니까.”
“……그럴 수가.”
“여기서 그냥 눈을 피하고 모르는 척해도 됐을지도 몰라. 미래 예지를 통해서 적당히 모아 놓은 재산도 있고, 정세가 당분간 뒤숭숭하지만 숨어 있다가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내가 운명을 비튼 것 때문에 죽어 버린 루베인에 대한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었어.”
엘피는 어렴풋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가장 처음 트론과 마주했을 때 그가 폭군이 될 악당이 아닌, 그저 어린 소년일 뿐이라는 걸 알고 동요했었다. 그래서 트론이 불행하게 죽는 미래를 방조하지 못하고 함께 도망치자고 권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하게 된 거야. 회귀하기로.”
“회귀를 결심하다니……. 라이샤는 본인의 의지로 회귀를 할 수 있는 건가요?”
“응, 맞아.”
그녀는 무의식중에 치맛자락을 쥐었다.
이전에 꿈에서 ‘원작’의 트론과 엘피를 보았을 때, 어렴풋이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역시 그 짐작은 맞았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했던 자신과 트론은 비극을 맞이했고, 라이샤인 제시드에 의해 과거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라이샤인 나도?’
그녀의 눈빛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것인지, 제시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완전 예지’와 마찬가지로 회귀에는 큰 페널티가 존재했어. 본인의 존재를 담보한다는 것이었지.”
“존재요……?”
“응. 엘피 양은 지금…… 회귀할 생각인 거지?”
엘피는 굳게 끄덕였다. 지금 현실의 자신은 유전 폭발에 휩쓸려 죽기 바로 직전인 상태였다. 과거로 돌아가 지금의 상황을 좋게 바꿀 수 있다면, 회귀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이야기는 전부 듣고 실행하도록 해. 무엇을 각오하고 회귀해야 하는지. 또…… 제시드 율페이든을 멈출 방도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겠어요.”
엘피가 자세를 바로 하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처음 회귀한 후에는,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어. 지금 엘피 양도 그렇지?”
“……네.”
“그래도 행동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나는 곧바로 라이샤라는 걸 밝히고 루베인이 왕이 되는 걸 돕자고 생각했어.”
“그게 제가 읽은 ‘원작’에 나와 있던, 그때의 일인가요?”
“그것보다 미숙하고 루베인이랑 충돌도 많았어. 그녀는 나를 신뢰하지 못했고, 나 역시 그때는 루베인에 대해서 잘 아는 게 아니었으니까. 정말 시행착오가 많았지. 결국에는 미래 예지의 힘을 활용하고도 비극을 막지 못했어. 우리 둘은 트론의 부하가 지른 불에 타서 죽었지.”
“읏…….”
“아, 딱히 트론을 원망하는 건 아니니까 너무 그렇게 괴로운 얼굴 할 거 없어. 아무튼…… 그렇게 죽어 가면서 나는 다시 회귀의 힘을 썼어. 이미 내 몸 상태는 좋지 않았으니까, 다시 회귀하게 되면 이번에는 정말 끝이겠구나…… 짐작하면서 힘을 사용했지.”
“존재가 소멸한다는 페널티는, 몸이 축나는 걸 말하나요?”
“아니. 몸이 피로해지는 건 그냥 전조 현상 같은 거고……. 정확히는 ‘이 세계에서 내 존재가 사라진다’는 거야.”
“……?”
엘피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네가 읽은 원작의 내용을 기억해? 내가 루베인과 처음 만나는 장면.”
“북부 귀족 교류 파티 전야제 날, 떨어진 옥새를 주운 루베인과 마주하죠. 제시드 님은 유령처럼 반투명한 상태로…….”
“응. 그리고 루베인에게 내가 라이샤고, 미래를 쥐고 싶다면 그 옥새를 간직하라고 말하지. 그 뒤는?”
그녀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깨닫고 침을 삼켰다.
“6년간…… 사라지셨어요.”
“응, 그런 거야. 이 세계에서 나는 빵집을 하는 평민 집안의 차남인 제시드라는 존재였어. 하지만 내가 사라진 그 6년간, 아무도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어. 그 빵집에 처음부터 차남 제시드는 없었던 것처럼. 그러다가 6년이 지나고, 나는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어.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계속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어.”
“세상에…….”
“그제야 나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페널티를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 거야. 말 그대로 이 세계에서 존재를 지워 버린다는 의미였던 거지.”
엘피는 그 설명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정말로 신이 만든 인위적인 장치처럼 그 내용이 오싹했다.
“내가 두 번째로 회귀했던 이때가 바로, 엘피 양이 기억하는 ‘원작’의 내용이야.”
“그렇지만…… 제가 읽었던 ‘원작’은 루베인이 왕이 되고 해피엔딩으로 끝났어요. 그런데 왜 다시 한번 회귀하게 된 건가요? 물론…… 제시드 님이 힘을 써서 자신을 희생하긴 했지만, 그 시점에서 바로 회귀한 것도 아니잖아요.”
제시드는 조금 서글픈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알다시피, 나는 마지막으로 트론을 쓰러뜨리기 전에 남은 힘을 짜내서 완전 예지를 썼어. 내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더라도 그녀만 행복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으니까.”
“…….”
엘피 역시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지 못했던 원작의 엘피도, 또한 지금의 자신도. 목숨이 사라진다고 한들 트론이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렇게 해서 내 존재는 사라졌지. 정확히는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잔류 사념만 남았어. 유령 같은 상태였던 셈이야.”
“네…….”
“그래도 루베인만 행복하다면 이대로 어느 순간 영혼조차 사라진다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루베인이 행복하지 않았어.”
“아…….”
“애초에 루베인은 왕이 어울리는 성격도 아니고, 적성에도 맞지 않아. 엘피 양도 직접 겪으면서 느꼈겠지?”
엘피는 눈을 내리뜨며 침묵으로 그에 동의했다. 위정자는 어느 정도 냉정할 필요도 있고, 정에 치우치지 않고 결단할 필요도 있다. 마음씨 곱고 불같은 성정은 루베인의 장점이지만, 그것이 왕에 어울린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래서 루베인은, 어울리지도 않는 자리에 앉아서 고생만 하다가…… 요절하고 말았어.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니까 본인하고 맞지 않는 일인데도 무리했던 거겠지.”
“너무, 가슴 아파요…….”
제시드는 옅게 웃었다. 그는 루베인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는 듯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이런 결말을 보기 위해서 삶을 반복했던 건 아니었어. 울부짖으며 신에게 빌었지. 제발 어떻게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미래를 바꿀 수 있게 해 달라고.”
“…….”
“신은 조건부로, 내 소원을 들어주었어. ……그게 바로 엘피 양에 대한 일이었고.”
“저에 대한 것이요……?”
엘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엘피 양은 라이샤로 각성할 조건은 갖추고 있었어. 지금의 세계를 책으로 접했지만 기억은 못 하는 상태였지.”
“네…….”
“신은, 나에게 그런 엘피 양의 존재를 가르쳐 주었어. 그리고 내 남은 힘을 모두 엘피 양에게 주고 내 존재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대신, 회귀 후의 엘피 양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했어.”
“그 말은…….”
“말 그대로야. 내가 라이샤로 각성했던 때처럼 친절하게 안내도 해 주지 않고, 전후 상황도 알 수 없는…… 엘피 양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거야.”
엘피는 침을 삼켰다. 그게 바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회귀 전’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저는 지난 회귀 때 전생에 대해서만 기억하고, 라이샤라는 자각이 없었던 거군요.”
“짐작하는 바가 맞아.”
엘피는 라이샤였으나 그 힘을 자각하지 못하여 불우했던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트론을 왕으로 만들 포부도 무엇도 없이, 그저 평민으로 위장하여 숨죽이며 지냈던 일들을.
떠올리면 평화롭고도 행복한 추억들이었지만, 마지막에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 슬픈 여정이었다.
“엘피 양은 나와 반대로 기초적인 안내도 못 받은 채로 이 세계의 고난을 헤쳐 나가야 했던 셈이니 많이 불공평했지.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엘피는 입술을 깨물어 눈물을 참았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돌아가기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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