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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23화 (123/132)

123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13)

“윽, 하아, 크윽…….”

엘피는 포털을 빠져나오자마자 주저앉으며 울음을 토해 냈다. 참으려고 해도 숨을 방해하는 것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머리로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알고 지냈던 청년과, 마찬가지로 친구나 다름없는 이의 부친이 목숨을 잃었다는 현실이 몸을 옥죄는 듯했다.

루베인은 엘피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대신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뿐, 울고 싶은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것은 명확했다. 죄책감에 토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 마음을 누르려 노력하며 주변을 살폈다.

“여기는…….”

마법 유전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 근처의 언덕이었다. 언덕 아래에 마을 입구가 보였다. 그녀가 종종 봉사 활동을 가는 고아원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언니. 얼른 마을로 가자. 힘들겠지만, 우선 마차에 탄 다음에 쉬어.”

“……미, 안해. 루베인. 내가, 더 정신 차려야 하는데.”

엘피가 쉰 목소리를 내며 거칠게 눈을 비볐다. 그녀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이제 괜찮아. 빨리 왕궁으로 연락을 넣을 수 있는 데까지 이동하자.”

이곳은 작은 마을이기에 열차는 이어져 있지 않고, 마차를 구해야 했다.

해가 뜨고 꽤 시간이 지났으니, 삯마차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면 될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일란을 이용하여 트론에게 연락을 넣고 싶었지만, 제시드의 능력이라면 추적당할 위험이 컸다.

그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남은 바실리를 생각하면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르터바이스 부군……. 사먼…….’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것을 입술을 깨물어 참으며, 엘피는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마을의 반대편에 있는 숲 쪽이었다.

마치 한낮에 벼락이 치는 듯, 빛의 창 같은 것이 하늘에서 숲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정체를 모르고 봤다면, 아름답다고 생각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엘피는 직감했다. 저 빛의 창이 내리꽂히는 곳에 바실리가 있으리라는 것을.

이제 여유가 없었다.

“루베인, 가자!”

엘피는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심경을 삼키며 루베인의 손을 잡고 마을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솔직히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이대로는 왕자님이 위험해.’

일방적인 폭력과도 같은 힘을 휘두르는 저 마법사는, 트론의 적인 세틱스의 수하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시드는 사람이 변한 것처럼 세틱스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이미 아까운 두 사람을 잃었다. 그 사람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은 살아남아서 지금의 위험을 트론에게 전해야 했다.

마을까지 달려가던 두 사람이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갑자기 공중에서 날카롭게 매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엘피는 그 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옆에 있던 루베인도 심각한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창공을 가르던 커다란 매가 고도를 낮추었다. 그 위에 있던 청년이 훌쩍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매가 공중에 녹아드는 것처럼 사라졌다.

“……제시드!”

루베인이 씹어 삼키는 듯한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렀다.

그의 추적이 너무나 빨랐다. 최소한의 발버둥조차 소용이 없었다. 엘피는 절망감에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표적, 추적 완료.”

마법을 발동하려는 듯 그가 손을 올렸다.

“제시드! 대체 왜야……! 너, 왜 그러는 거야!”

“……?”

루베인의 비통한 질문에 그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는 루베인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다 답했다.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머리가 맛이 가기라도 한 거냐고! 세틱스가 뭔가 한 거야?”

“표적…….”

어째서인지 제시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입술을 떼었다 붙였다 하며 몸을 떨었다.

“제시드 님, 대체 어쩌시려는 거예요!”

엘피도 그를 향해 외쳤다. 제시드의 떨리던 몸이 멈췄다.

“표적, 제거……. 마법 유전, 폭파. 마지막으로…… 트론 스레데니옴의 제거.”

“읏……!”

제시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대로 된 문장이 아니었다.

그의 팔은 공격을 하려는 듯 공중에서 이상한 방향으로 허우적거렸으나, 루베인을 볼 때마다 불안정하게 떨렸다.

“표적, 표적 제거……. 제거, 어려운…….”

“제시드!”

“……다음 명령을 수행합니다.”

제시드는 몸을 틀어 다시 매를 불러내 그 위에 탔다.

그러고는 다시 커다란 불의 소용돌이를 소환했다.

불덩어리는 미끄러지는 것처럼 마을에 꽂혔다.

“안 돼!”

“그만해요!”

엘피와 루베인의 목소리는 굉음에 묻혔다.

그는 불안정한 사격을 맞추는 것처럼, 마을 너머로 반복하여 불덩어리를 날렸다. 마을 사람들의 비명이 울렸다. 불덩어리가 떨어질 때마다 건물들이 무너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을 옆의 정유 시설에 불벼락이 내렸다.

‘아…….’

마치 느리게 재생해 놓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엘피는 비현실적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푸른빛의 불덩어리가 정유 시설에 부딪히자마자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 기세는 잠깐이고, 이윽고 몇십 배의 불덩어리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귀를 꿰뚫는 듯 날카로운 폭발음이 울렸다.

단 수 초 안에, 불덩어리는 제 덩치를 불리며 주변을 삼키려는 양 크게 퍼졌다.

엘피는 바로 직감했다. 이것은 죽음의 순간이었다.

마법 유전이 터지며 발생한 대규모의 폭발에 휩쓸려, 자신은 곧 죽을 것이다.

‘왕자, 님…….’

이후에 근심이 없다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트론이 행복하다면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곳이 불타 사라지면, 제시드는 지금처럼 폭력적인 마법을 트론에게 휘두르기 위해 이동할 것이다.

간신히 그것을 막는다고 해도, 전쟁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

‘싫어, 안 돼……!’

미래를 보는 힘밖에 없는 자신은 무력했다. 지금 상황에서 완전 예지의 힘을 쓴다고 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트론의 명령을 무시하더라도 떠나기 전에 미래를 보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꼬리를 잇는 후회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더 현명했더라면. 더 힘이 있었더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제발, 신님. 존재한다면, 제발……이 비극을 바꿀 수 있게 해 주세요.’

왕자님의 행복을 바라며 지금까지 달려온 모든 시간을 의미 없는 것으로 끝나게 하지 말아 주세요.

그 간절한 바람을 떠올리는 동시에, 엘피는 불길이 자신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새하얀 빛이 그녀에게 쏟아져 내렸다.

***

잠깐 정신을 잃은 듯했다. 하지만 이윽고 그녀는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자각했다.

“여기는…….”

새하얀 공간이었다. 그림자도 무엇도 없이 새하얘서 오히려 섬뜩한 기분이 들 정도로 청결한 하얀색이 시야를 채우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망설이는 것처럼 이름을 불렀다.

“……엘피 양.”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자신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을 보자마자 그녀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붉은 머리의 청년, 제시드가 서 있었다.

“하, 으윽…….”

엘피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제시드 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공격이 날아올 거라 생각해서 몸을 움츠렸던 엘피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제시드가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와중, 지금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실감했다. 이 감각은 무척 익숙했다.

엘피는 얼마 전에 이것과 정반대로 새카만 공간을 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제시드의 꿈속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었다.

이곳은 마치 그때의 공간을 뒤집어 놓은 듯한, 하얀 공간이었다.

‘……제시드의, 꿈이나 정신의 안쪽?’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다. 라이샤로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 아닐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죽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까 자신들을 공격했던 제시드는 멀쩡한 정신 상태가 아닌 것처럼도 보였다. 꿈속에 있는 제시드는 그와 달리 제대로 대화가 될지도 모른다.

엘피는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시드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미안, 해. 미안…….”

가장 먼저 그가 입에 담은 것은 사과의 말이었다. 엘피는 그를 자세히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의 제시드는 그녀가 알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어딘지 소년티가 남아 있는 제시드 율페이든과 달리 성숙한 외견이었다.

“……제시드 님?”

반신반의하며 묻자 그가 끄덕였다.

“응……. 오랜만…… 이라고, 한가하게 인사를 나눌 때는 아니지만.”

엘피는 입을 크게 벌렸다. 역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라이샤 ‘제시드’인 모양이었다.

“여, 역시! 제시드 율페이든이라는 사람은 가짜인 건가요? 그런 거죠!”

그녀의 질문에 제시드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그는 다시 울 것처럼 눈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시드 율페이든은 가짜가 아니야.”

“무, 슨…….”

“뻔뻔하게 설명을 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엘피 양은 모든 것을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읏…….”

제시드는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을 훔쳐 내며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엘피 양 이전에 라이샤였던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어?”

그녀는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씹으며 생각했다.

머릿속은 혼잡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헤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를 지탱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걸…… 들으면, 왕자님을 위해 제가 무언가 할 수 있을까요?”

제시드의 얼굴이 조금 서글프게 흐려졌다.

“응, 아마도.”

“그럼 듣겠어요. 솔직히 혼란스럽고, 당신이 무섭지만…… 들을래요.”

어차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몸이었다. 트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너의 각오는 알겠어. 라이샤 엘피 양.”

“…….”

“그럼…… 먼저, 라이샤가 무엇인지부터 시작할까.”

“……‘가능성의 미래를 읽는 자’ 아닌가요?”

“그것도 맞긴 해. 하지만 정확하게는…….”

그는 울음의 흔적이 남아 떨리는 목소리로 엘피에게 고했다.

“전생을 떠올리게 된 자를 말해.”

돌아가기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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