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12)
“자살 희망 젊은이라니, 패기가 없군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여상하게 말을 나누면서도 살벌한 마법 공격이 오갔다. 그 와중에도 제시드는 사먼의 움직임까지 견제하고 있었다.
혀를 내두를 만한 솜씨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넋 놓고 감탄할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는…… 정말로 제시드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거야.’
전투에 말려든 바실리나 사먼, 루베인이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자신 역시.
제시드가 이런 식으로 공격적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가 입 밖에 내뱉는 말은 마치 이쪽을 도발하는 것 같았다.
원작에서 보고, 꿈속에서 나누었던 짧은 대화를 통해서 느꼈던 그의 성격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굴었다.
“제시드 님, 그만해요! 같이 방법을 찾아봐요…….”
“…….”
엘피는 비통하게 그를 향해 외쳤다. 하지만 제시드는 대답 없이 번개를 소환했다. 바실리가 간발의 차이로 피했지만, 번개가 내리친 땅은 마치 거대한 마수가 발톱으로 할퀸 것처럼 땅에 팬 자국이 남았다.
만약 바실리가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 공격을 맞았다면 즉사였을 것이다.
‘진심으로 공격할 생각인 거야…….’
엘피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실리 역시 그의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채고 이전까지의 여유로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살기를 드러냈다.
소리 없이 사먼의 낫이 공중을 갈랐다. 제시드가 아슬아슬하게 그걸 피하면서, 루베인을 안전한 곳으로 밀었다.
루베인의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이 풀렸다.
“제시드, 정신 차려! 지금 뭐 하는 거야!”
루베인은 속박이 풀리자마자 제시드를 향해 일갈했다. 그가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가 다시 루베인을 붙들려 했다.
그 순간, 바실리의 손이 지휘하듯 곡선을 그었다.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넝쿨이 제시드를 향해 촉수처럼 뻗어 갔다.
제시드는 눈을 찌푸리며 루베인을 안고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루베인!”
엘피가 필사적으로 루베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루베인이 반응했다.
그녀는 제시드가 자신을 붙들기 전에 넝쿨이 뻗어 오는 쪽으로 몸을 던졌다. 다른 이들이 미처 마법으로 대처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 순간, 제시드는 본능적으로 루베인을 감싸 안았다. 넝쿨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가시가 그의 몸을 찔러 피가 흘러내렸다.
그의 움직임을 속박하자마자, 바실리는 그의 눈을 마법으로 가려 버렸다.
“아프게 붙잡아서 미안하지만, 그쪽의 젊은이. 이제 말로 하죠.”
“……안, 돼.”
마치 신음과 같은 소리가 제시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발, 지금 저를 죽여요! 부탁이니까!”
제시드가 외쳤지만,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변을 먼저 발견한 것은 사먼이었다. 그는 제시드의 몸에서 고대 문자로 만들어진 주술식이 반짝이기 시작한 것을 보고 당황했다.
“잠깐, 저 사람 몸에서 주술이…….”
“싫어, 제발, 다들 도망가요!”
제시드의 처절한 비명과 같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를 중심으로 눈 부신 빛과 함께 폭발음이 발생했다.
진원지를 중심으로 엄청난 분진이 몰아쳐서 숲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퍼졌다. 엘피는 뿌예진 시야 속에서, 바실리가 주변에 보호막을 쳐서 자신들이 폭발에서 무사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안심하는 것도 잠시, 붉은빛과 초록빛을 띤 구체가 연달아 보호막을 깨뜨리려는 듯 날아왔다. 그 숫자는 수십에 달했다.
“……큭.”
바실리가 짧게 숨을 토했다. 엘피는 예전에 가이가 트론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막을 쳤다가 다쳤던 일을 떠올렸다.
물리적인 공격을 막을 때와는 또 다르겠지만, 바실리가 무력한 자신이나 루베인을 보호하며 얼마만큼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안개처럼 주변을 감싸던 흙먼지가 가라앉고, 시야 저편에서 제시드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무표정하게 손을 휘저으며 이쪽으로 공격을 반복하고 있었다.
점차 보호막이 울리는 소리가 커졌다. 바실리의 얼굴에도 고통이 깃들고 있었다.
보다 못한 루베인이 크게 소리 질렀다.
“제시드! 제발, 말로 해! 뭐가 문제인 거야……!”
“…….”
그녀의 목소리에 제시드가 멈칫했다. 그녀에게 반응해서라기보다는, 무언가 기계가 멈춰 버린 듯한 동작이었다.
몇 초간의 정적 후, 그는 제시드가 공중에 원을 그었다. 그 원이 반투명한 붉은색으로 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만한 청년의 목소리가 원 안에서 흘러나왔다.
[연락 한 번 빠르구나, 제시드.]
엘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아주 먼 옛날, 또한 불과 2년 전쯤 르터바이스 영지에 있던 교단에서.
‘……세틱스 스레데니옴?’
목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불쾌했다.
제시드는 억양 없는 목소리를 냈다.
“주인님. 장치 제1단계 발동되었습니다.”
세틱스는 억양이 없는 제시드의 말을 듣자마자 폭소했다.
[하하하. 아하하하! 결국은 배신했구나. 나약한 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엘피는 제시드의 말에 위화감을 느꼈다. 사람이 말을 한다기보다는, 마치 AI가 읊는 말 같았다.
그녀가 혼란스러움을 채 떨치지 못한 사이, 루베인이 크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세틱스 스레데니옴! 빌어먹을 자식! 너, 제시드한테 뭘 한 거야!”
[크하하. 아, 뭐야. 마그달리사의 멍청한 계집도 아직 함께 있었나?]
세틱스는 유쾌한 듯 웃으며 멋대로 지껄였다. 루베인이 그 소리를 듣고 다시 욕을 뱉으며 씨근덕거렸지만, 제시드는 그런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세틱스의 질문에 충실하게 답했다.
“루베인 마그달리사는 현재 적 진영에 있습니다. 그녀를 보호하라는 명령이 우선이기 때문에, 적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지시를 부탁드립니다.”
[무능한 새끼. 그것도 하나 못 하고.]
“지시는 명확하게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 조용히 주변을 관측하던 사먼이 이쪽에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르터바이스 부군.”
“네.”
“제가 공격하여 주의를 끌겠습니다. 두 여성분을 데리고 포털로 이동해 주십시오.”
“사먼! 설마…….”
엘피는 몸을 떨었다. 그가 무엇을 각오하고 그런 말을 꺼내는지 알 수 있었다.
사먼이 엘피를 향해 짧게 웃었다.
“……마지막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엘피 님, 당신을 보면 꼭 동생 같아서 호위를 맡을 때마다 기뻤습니다. 모쪼록 주군과 함께 행복하시길.”
“잠, 깐…….”
엘피가 그를 말리는 것보다 먼저, 그녀의 시야를 사먼의 뒷모습이 가로막았다.
사먼은 민첩하게 제시드를 향해 달렸다. 그와 동시에 제시드를 향한 명령이 떨어졌다.
[됐어, 그 계집에게는 이제 흥미 없다. 같이 없애 버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제시드는 세틱스의 말을 듣자마자 일체의 주저 없이 팔을 휘저었다.
격렬한 화염의 소용돌이가 마치 생물처럼 굽이치며 제시드의 주변에 형성되었다.
바실리는 빠르게 푸른색의 포털을 생성했다.
“……갑시다. 저 젊은이가 귀하게 준 기회입니다.”
“윽…….”
“언니…….”
엘피는 비틀거리면서도 루베인의 팔을 붙잡고 포털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이동을 방해하려는 듯 제시드가 움직이려 했지만, 사먼은 낫을 휘둘러 그가 다가오는 것을 방해했다.
불덩어리가 사먼의 몸을 휘감고 불타오르기 시작했으나,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세 사람의 모습이 그 공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제시드는 무감정한 얼굴로 타들어 가고 있는 사먼을 발로 찼다.
“……윽.”
사먼의 비통한 신음은 제대로 흘러나올 여유조차 없었다. 제시드가 피워낸 거대하고 새파란 불이 그를 완전히 감쌌기에.
제시드는 감정 없는 얼굴로 그 불길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 푸른색의 불이 사라졌을 때는, 이미 그곳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참 말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듯 세틱스가 제시드를 불렀다.
[뭐냐, 제시드.]
“적, 한 명 처리했습니다. 다만 다른 이들이 모두 도주했습니다.”
[무능한 새끼.]
“지시는 명확하게 부탁드립니다.”
[뭐, 좋아. 지금 거기 위치가 어디지?]
“르터바이스령과 마그달리사령의 경계, 마법 유전 근처입니다.”
세틱스는 그 대답에 반색했다.
[재밌네, 잘 됐다. 네 마법이면 유전의 근원인 마법의 샘을 날려 버릴 수 있지?]
“가능합니다만, 그 경우 충격파로 인해 유전지를 중심으로 사방 500르티어(약 25km)의 대지가 소각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로 인한 여파는 사방 2000르티어(약 100km)에 이를 것입니다.”
제시드의 설명을 듣고 세틱스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아, 정말 머저리 새끼가 능력 하나는 좋다니까. 진작 이랬으면 좋았는데.]
“지시는 명확하게 부탁드립니다.”
[좋다, 지시하지. 쥐새끼들을 처리하는 대로 바로 마법의 샘을 날려.]
“알겠습니다.”
[그다음에는 트론 새끼의 모가지를 따러 남하해. 상황은 하루 단위로 보고하도록 해라.]
“지시, 이해했습니다.”
[아, 네놈이 죽으면 아까우니 목숨 부지하는 걸 최우선으로.]
“추가 지시, 확인했습니다.”
[아하하하! 그럼 바로 실행해!]
유쾌한 웃음을 마지막으로 연락은 끊겼다. 제시드는 지체 없이 반투명한 매를 불러냈다. 그 위에 올라타며 공중에 주술식을 만들어 냈다.
“표적, 근처에 존재하는 것을 확인. 바로 이동.”
그는 간결하게 잔혹한 결론을 입에 담은 후 바실리가 연 포털의 목적지 방향으로 매의 진로를 틀어 날아가기 시작했다.
***
“……큭.”
포털을 통해 마지막으로 이동한 바실리가 땅에 착지하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으며 피를 토했다.
“르터바이스 부군!”
“괘, 괜찮으세요?”
엘피와 루베인이 새파래진 얼굴로 바실리를 부축했다. 그는 몇 번 기침하며 피를 뱉어 낸 후 담담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늙은이를 믿고 맡기셨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니에요, 조금만 쉬고 얼른 다시 움직이면…….”
“그 젊은이의 실력이라면 이쪽을 금세 추적할 겁니다. 붙잡히는 건 시간문제겠지요. 가까운 마을로 포털을 열 테니, 그곳으로 가면 바로 열차나 마차를 이용해서 최대한 멀리 이동하도록 하세요.”
“그거라면, 부군도 같이…….”
“제가 남아서 추적 궤도에 혼선을 줘야 하니까요. 신경 쓰지 마세요.”
“부군…… 그렇지만……!”
“처음부터 왕자님에게 무엇이든 바치기로 했던 약속입니다. 그게 목숨이라 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밀리엔이 건강하니 괜찮습니다.”
바실리는 엘피에게 기댔던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면서도 공중에 포털을 그려 냈다.
“……밀리엔에게 마지막으로 연락을 할까 하는데, 아무래도 가이즈카한테까지 연락할 여유는 안 될 것 같군요. 대신 전언을 부탁드립니다.”
“부, 군…….”
“밀리엔 다음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건 정말이랍니다.”
“읏…….”
“그럼, 안녕히.”
엘피가 끝내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루베인은 각오한 얼굴을 하고 엘피의 어깨를 붙든 다음, 굳세게 답했다.
“……꼭, 전하겠습니다.”
“고마워요.”
표정이 없던 바실리가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루베인은 엘피를 부축하여 바실리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만들어 낸 포털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으음.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갈색과 회색이 섞인 반투명한 비둘기가 공중으로 푸드덕 날아올랐다. 사랑하는 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그의 표정은 그저 평온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