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11)
같은 시각, 루베인은 제시드와 함께 산 중턱을 걸어가고 있었다. 북쪽으로 우회하느라 하븐까지 아직 거리가 남았지만, 그래도 이 여행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제시드의 태도였다. 얼마 전 그가 늦게 일어났던 날 이후로 분위기가 어딘지 달라져 있었다.
질문을 하면 대답도 친절하게 하고 사근사근한 부분은 여전했지만, 어딘지 공허해 보이는 듯한, 붕 뜬 분위기가 계속 그를 감싸고 있었다.
“……제시드.”
“네, 루베인 님.”
“정말로 고민 없어?”
“네. 고민했는데, 결론이 나서요. 이제는 괜찮아요.”
“…….”
이 관계를 무언가 정의 내리기는 어려웠다. 원래는 감시자와 포로 같은 관계였지만 제시드가 세틱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같이 움직인 이후로는 여행 동료 비슷한 느낌이었다.
친구라고도 부를 수 없는 애매모호한 사이. 그것이 자신과 제시드의 관계였다. 더 깊이 파고들 수도 없었고, 파고들 이유도 없었다.
그가 자신을 하븐까지 데려다주고 나면 어디로 갈 것인지, 세틱스에게는 어떻게 변명할 건지, 혹은 아예 도망을 갈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그걸 물을 권리 또한 없었다.
하븐에 도착하면, 곧 이 관계는 청산될 테니까.
“……각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실까. 사병을 모으기 시작하시다니.”
그녀는 복잡한 생각을 떨쳐 내듯 다른 화제를 꺼냈다. 마그달리사령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알게 된 정보였다.
처필처럼, 마그달리사 영지에서도 비밀리에 사병을 조직하는 움직임이 보였다.
“아마도, 현재의 중립 상태를 더 굳건하게 지킬 생각이신 거겠죠.”
“정예들만 모인 트론 전하 쪽이나, 세 공작이 연합한 남방군에 비하면 이제부터 모으기 시작한 사병이 힘을 쓸 리가 없잖아. 무모한 일이야.”
“네. 아마 어느 한쪽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마그달리사령도 안전한 중립 지대로 남아 있기는 어려울 거예요.”
“……오라버니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각하를 막지 못한 걸까.”
“아마도…… 자존심 문제가 가장 크셨을 것 같네요. 지금은 중립이라고 하더라도, 군사적으로 막을 힘이 없는 이상, 어느 한쪽에게든 숙이고 들어가야 할 테니까요.”
루베인은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까지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부친이 여러 가지 일을 그르쳐 온 것을 알고 있었다. 내전이라는 심각한 상황에서도 여전한 것을 확인하니 속이 쓰렸다.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루베인 님이 빨리 하븐에 가 보시는 게 좋겠어요.”
“…….”
제시드는 지금까지의 정보를 세틱스에게 알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말은 트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가 생각될 정도였다.
다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의 진의를 알 수 없었다.
“있잖아, 제시드.”
“네.”
“제시드는 나를 각하한테 보내고 나면, 어떻게 할 거야?”
“…….”
그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 입술은 조금 하얗게 보였다.
“이래저래 사정이 있어서. 말씀드릴 수 없어요.”
“……있잖아, 제시드. 나는.”
“네.”
“지난 몇 달간 너랑 같이 여행하면서…… 우리가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했어.”
“…….”
“이렇게 같이 다니게 된 계기가 계기다 보니…… 솔직히 편하게 친구라고 부르기는 어려울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네가, 앞으로 친구가 될 가능성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루베인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니까 제시드. 네가 무엇을 결단 내린 건지 가르쳐 줄 수 없을까?”
“루베인 님…….”
그의 눈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물기가 어렸다. 하지만 실제로 눈물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제시드는 그 대신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말씀드릴 수 있는 일이면 얼마든지 말씀드렸을 거예요.”
“……그랬구나.”
“네. 음, 괜히 저 때문에 마음 쓰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루베인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어둑어둑했던 동쪽 하늘이 어느샌가 밝아지고 있었다.
햇살을 반사하는 루베인의 금발을 눈부신 듯 바라보던 제시드가 눈을 찡그렸다가 말을 이었다.
“재미없는 이야기 하나 들으실래요?”
“응?”
“제가 백치 상태에서 정신을 차린 후에요. 주술사 소양은 유전이니 당연히 갖고 있겠지만, 보통 주술사가 마법사 소양도 갖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잖아요. 어떻게 알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음…… 모르겠어. 나는 마법에는 문외한이라서.”
“그럼, 일반인도 알 수 있는 주술과 마법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주술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변형시키는 거고,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
“맞아요. 그리고 발동할 때의 방식에서 차이점도 있죠?”
“아, 주술은 뭔가 술식을 그려서 시간이 걸리고 마법은 즉각적으로 발동하지?”
“네. 비교하자면 주술이 더 학문에 가까워요. 고대 문자를 배워서 발동시켜야 하거든요. 문자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주술에 소양이 있어도 무용지물인 거죠.”
루베인은 어째서 그가 주술과 마법에 대한 기초 교양 강의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묵묵히 그의 설명을 경청했다.
“반대로 마법은, 물론 효율적으로 발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연구가 필요하긴 하지만……. 주술이 독서라면, 마법은 스포츠에 가까워요. 독서는 일단 문자를 배워야 하지만, 달리기는 걸음마를 뗄 줄 안다면 지식이 없어도 가능하잖아요? 속도가 느리거나 넘어지더라도 말이죠.”
“아하. 마법은 소양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발동할 수 있으니까, 남한테 배우지 않아도 소양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던 거구나.”
“네. 그런데 제가 처음으로 마법을 발동했을 때 하필이면 세틱스 전하를 위험하게 만들 뻔했어요.”
루베인은 눈을 크게 떴다. 무려 왕족을 위험하게 만들었는데 그가 지금 멀쩡히 목숨을 보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심지어 무척 성격이 나빠 보이던 세틱스를 상대로.
“……왕족을 상대로 용케 무사했네.”
“그렇죠. 그때는 지금보다 더 멍청했던 때라서, 저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몰랐어요. 그저 마법으로 불을 피워 내서 왕자님을 위험하게 만든 일이 너무 가슴 서늘하고 죄송했죠.”
“…….”
“그런데 세틱스 전하가 크게 웃으면서 그러셨어요. ‘그냥 병신인 줄 알았는데, 뜻밖의 재주가 있었군……’ 하고. 조금 욕은 먹었지만 그 일로 벌을 받지는 않았어요. 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보답하라고.”
“그것 때문에…… 세틱스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복합적인 거겠죠. 주인님이 좋은 사람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목숨을 위협한 머저리 하나를 자기 곁에 둘 정도로 대범한 면도 있었어요. 험한 말도 많이 들었지만……. 제 솜씨를 칭찬해 주시기도 했고요.”
그녀는 제시드의 복잡한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았다. 자신의 부친에게 느끼는 감정도 그와 비슷했으니까.
아껴 주는 것을 알지만, 한편으로 마그달리사 공작이 루베인에게 바라며 강요하는 것들은 폭력에 가까웠다.
가족으로서 사랑하는 마음과, 그 이상으로 원망하는 감정이 섞여 한쪽으로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만약 마그달리사 공작과 트론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상황에서 한 명을 골라야 한다면 어떤 답을 내릴 수 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참담한 일이었다.
“……미안해. 너한테도 무척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 멋대로 재단해서.”
“아니에요. 그리고 이미 결론은 나왔으니까요.”
“알겠냐, 제시드? 네가 뭔 머저리 같은 짓을 벌이든 상관없어. 배신하지만 않으면 돼.”
“배신…….”
“그러니까 너는 이제부터…….”
제시드는 세틱스와의 대화를 잠시 떠올렸다가 살짝 미소 지었다. 이제 해는 지평선을 떠나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그가 다시 걸음을 빨리했다. 기슭의 떡갈나무 군락을 지나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 발을 내디디려던 제시드가 흠칫하며 몸을 뒤로 뺐다.
“루베인 님, 꼭 붙어 계세요!”
그와 동시에 제시드는 손을 흔들어 반투명한 늑대를 소환했다.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더니, 나무에서 누군가가 바닥으로 착지했다.
연갈색 머리의 중년 남성이었다.
“역시 얕볼 상대가 아니었네요. 으응……. 가능하면 온화하게 가고 싶었는데.”
“……루베인!”
그의 뒤에서 금발의 소녀가 울먹이는 얼굴로 루베인의 이름을 외쳤다.
“엘피 언니……?”
네 사람이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다.
***
엘피는 제시드와 루베인이 도착하기 전에, 근처 나무 그늘에 숨어 있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무척 길게 느껴졌다. 빨리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제시드가 바실리의 함정을 눈치채는 바람에 그를 포위하는 것은 실패하게 되었다.
실패했다고 판단하자마자 바실리가 바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사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이 움직여 봤자 그저 방해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제시드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확신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청년의 모습보다는 앳되었지만, 그는 엘피가 알고 있는 ‘라이샤’인 제시드와 같은 얼굴이었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제시드의 옆에 루베인이 보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어떻게든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어서, 그녀의 이름부터 불렀다.
“……루베인!”
“엘피 언니……?”
하지만 루베인이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제시드가 루베인의 입을 막으며 그녀를 뒤로 끌었다.
마치 인질로 삼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루베인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으니, 바실리가 선공하는 것을 포기한 듯 혀를 차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엘피는 필사적으로 목청을 올렸다.
“제시드 님. 혹시 저를 기억하나요? 저희, 이야기를 나눴잖아요!”
어쩌면 일방적으로 자신만 꿈의 내용을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는 제시드에게 간청했다.
“잠깐……. 잠깐만, 이야기를 나눠요. 먼저 공격하지 않을게요. 네?”
“함정을 파 둔 쪽에서 하는 말이 참 신뢰가 가겠네요.”
그는 딱딱하게 대꾸하며 손을 위로 올렸다. 제시드의 늑대가 순식간에 바실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전투 마법에서 손 뗀 지 오래인 늙은이한테 짐이 너무 무거운데요.”
말과는 달리 그 어조는 평온했다. 바실리가 땅에 손을 짚자 넝쿨 같은 식물의 줄기가 무서운 기세로 뻗어 나갔다. 줄기는 늑대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러나 제시드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손가락을 휘저었다. 줄기에 붙잡힌 늑대가 사라졌다가, 다시 그의 옆으로 소환되었다.
“이런, 이래서야 소모전인가.”
“단번에 가실까요?”
제시드가 이번에는 공중에 붉은색의 글씨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바실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주술 발동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제시드가 만들어 낸 늑대가 그것을 방해했다.
그 주술이 발동되려는 찰나, 제시드가 재빨리 몸을 틀어 루베인을 안고 거리를 벌렸다.
제시드가 서 있던 자리에는 어느샌가 커다란 낫을 찍어 내린 사먼이 모습을 드러냈다. 간발의 차이로 제시드가 그 공격을 피한 모양이었다.
“하하. 심지어 2:1이라니, 너무하네요.”
루베인이 몸부림을 치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제시드는 그녀의 입을 막고 있는 손을 풀지 않았다.
“이해는 합니다, 그럴 만한 상황이긴 하니까. 좋은 판단이에요. 루베인 님을 데려가고 싶다면, 저를 죽이면 됩니다.”
흉흉한 내용과 달리, 그의 말투는 너무나 산뜻했다.
돌아가기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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