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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20화 (120/132)

120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10)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열차 역까지 와 주시면 제가 그 아가씨를 데려가겠습니다.]

“알겠다. 어느 쪽이지?”

[마그달리사의 최북방, 르터바이스와 접해 있는 지역입니다.]

“……그렇게 멀리까지 올라갔다고?”

[아무래도 북쪽까지 빙 돌아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허점을 찌른 모양입니다.]

제시드와 루베인은 원래 동쪽에 위치한 처필령에 있었고, 정상적인 이동 루트라면 남쪽이나 동쪽을 통해 하븐에 접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추적을 피하여 용의주도하게 북쪽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접근하는 루트를 택한 모양이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두 사람이 마그달리사 저택이 있는 하븐으로 가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만에 하나 제시드가 마그달리사 공작과 만나 루베인의 목숨값을 두고 협상하려는 것이라면, 그들이 하븐에 도착하기 전에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르터바이스와 접해 있는 지역이라.”

[네. 아, 전하께서도 잘 아시겠네요. 마법 유전 근처입니다.]

5년 전, 처필과 마그달리사의 책임 공방 끝에 트론이 어부지리로 얻어 낸 곳이었다. 고아원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마법 유전은 고스란히 이쪽의 자산이 되었다.

“역시 그곳인가…….”

[걸리는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그 근처에 마그달리사 영애가 자주 방문하던 고아원이 있거든. 우연일 수도 있지만, 혹시나 했다.”

[으음…… 뭐, 아무튼. 제 용건은 이상입니다. 자세한 위치는 따로 전달해 드릴 테니 바로 전하의 시녀장을 보내 주십시오.]

“알겠다. 번거롭겠지만, 이어서 뒷일도 부탁하겠다.”

[전하의 부탁이니까요. 그럼 이만.]

바실리와의 연락이 끊기고, 트론은 엘피를 불렀다. 이제 그녀와 잠시간 떨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별일 없을 거야.’

고위 마법사인 바실리가 엘피와 동행하는 상황이고, 사먼도 보낼 예정이었다.

르터바이스의 접경지라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쪽의 군사를 움직일 수 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아무리 제시드가 날고 기는 마법사라고 한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이쪽은 제시드를 기습 포위할 준비도 되어 있으니, 여차하면 선공도 가능했다.

라이샤인 엘피가 꿈에서 읽고 판단한 사실을 지금까지 믿어 왔고, 어긋나는 일은 없었다. 가능하면 대화로 설득하는 것이 좋다는 엘피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계속 불안해지는 마음을 누르며, 그는 일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

“왕자님, 준비 다 됐습니다.”

급하게 쫓긴 일정이었지만, 엘피는 짐을 바로 꾸려 트론에게 출발 전 인사를 하러 왔다.

트론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엘피의 어깨를 꽉 잡았다.

“……엘피.”

“네, 전하.”

“그런 일이 없는 게 가장 좋겠지만……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자신의 안전을 제일로 해 줘.”

“왕자님도 참 걱정이 많으세요. 저, 예전에도 단독으로 임무 수행한 적 많았잖아요. 이번에도 잘 해낼게요!”

엘피가 일부러 기운찬 목소리를 내며 웃었다.

옥새를 가져왔던 일, 갇혀 있던 루베인에게 가기 위해 호텔의 하녀로 위장했던 일, 치롤헷에서 후작 영애 노릇을 했던 일까지.

돌이켜 보면 그녀는 항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어 잘 해내기 위해 애썼다.

그 사실이 고맙고도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엘피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 싫었다. 떨어져 있는 것 또한, 싫었다.

‘……빨리, 내전을 끝내고.’

그녀와 평온한 시간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그는 엘피를 꼭 안았다.

“언제나 엘피를 믿어. 잘 다녀와.”

“네!”

트론은 망설이다가 잠시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품 안에서 그녀의 몸이 움찔 굳는 것이 느껴졌다.

“……싫었어?”

“아, 아녜요! 설마요!”

새빨개진 얼굴로 도리질하던 엘피가 눈을 내리뜨며 작게 말했다.

“괜찮다면, 저도 전하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알 수 있었다.

트론은 몸을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이윽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뺨에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는 엘피를 놓아주다가 그녀의 귀에 작게 흔들리는 루비 귀걸이를 발견했다.

“그 귀걸이는…….”

“아. 작년 생일 때 전하께서 선물해 주신 장신구예요. 계속 아껴 두고만 있었는데…….”

파티가 아니라 지금부터 일을 위해 멀리 나가는 사람이 차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엘피는 멋쩍게 웃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전하가 주신 물건을 몸에 지니면, 어쩐지 행운의 부적이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요.”

“……그랬군. 나도 엘피가 선물을 고이 모셔 두는 것보다는 해 주는 게 기뻐.”

“아, 넵! 앞으로는 더 많이 할게요.”

“응.”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엘피는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처럼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금발이 흔들리는 뒷모습이 문 저편으로 금세 사라졌다.

아득하고도 적막한 외로움 속에 트론은 애써 문에서 눈을 돌렸다.

***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엘피 이나드입니다.”

마그달리사 최북단에 있는 열차역에서 내린 엘피는 금세 자신을 마중 나온 중년 남성을 찾았다. 가이처럼 훤칠한 키에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미남이라 바로 눈에 띄었다.

바실리는 가볍게 목을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오랜만이에요. 바실리 르터바이스입니다.”

“이전에는 이야기 나눌 기회가 적었습니다만,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아, 말씀 놓으세요, 부군.”

“원래 말투가 이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갈까요?”

“넵!”

이전에 만났을 때 느꼈던 대로 무척 사교성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엘피는 그에게 딱히 거북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가이와 어딘지 닮은 것이 친근하게 느껴져서 그런 모양이었다.

열차 여행 때문에 고생한 엘피를 배려하여 하루를 쉰 후 그 다음 새벽에 바로 출발하게 되었다.

사먼은 그림자처럼 두 사람의 주변을 경호했다.

포털을 통해 산기슭에 도착한 후, 바실리는 본인의 추적 경로에 문제가 없는지 다시 한번 세심하게 확인했다.

“문제는 없는 것 같군요. 계산대로라면 사냥감은 30분 후 이곳으로 올 겁니다.”

“넵! 부군, 저기……. 사전에 말씀 들으셨을 것 같지만, 이야기를 먼저 나누고 싶으니까요. 모쪼록 공격적인 방법으로 포위하는 건 자제해 주셨으면 해요.”

“고위 마법사를 상대로 그런 어설픈 짓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노력은 해 보지요.”

절대로 빈말은 하지 않는 바실리다웠다.

엘피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무 그루터기에 앉았다. 사냥용 남성 복식이라 움직이기 편한 점이 좋았다. 자연스럽게 평소에도 남자 옷을 입는 루베인을 떠올랐다.

‘……루베인의 안위도 계속 확인되고 있으니까. 뭔가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엘피가 알고 있는 한 제시드는 선량한 사람이었고, 꿈을 통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도 전해지는 분위기가 무척 맑았다.

어떤 경위로 세틱스를 섬기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시드라는 개인이 나쁘지는 않다는 기묘한 확신이 있었다.

그를 만나게 되면 어떤 이야기를 먼저 건네야 할지 고민하며 물을 마시고 있으려니, 바실리가 엘피에게 툭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

“영애는 왕자님의 약혼녀라지요?”

“읍, 콜록콜록!”

엄청난 말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엘피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으음……?”

“어,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가이즈카한테 들었는데요.”

엘피는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원래 사람 놀려먹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지만, 자신의 부친한테까지 그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왕자님한테 가장 소중한 여성이니까 무슨 일 없도록 잘 모시라고 하더군요. 왕자님 본인도 저한테 신신당부하셨고요.”

“그건…… 꼭 약혼녀라는 의미는 아니지요.”

“그런가요? 왕자님은 이미 혼인 적령기고, 소중한 여성이라면 당연히 배우자나 약혼녀인 줄 알았습니다만.”

“…….”

엘피는 소맷자락으로 입가의 물기를 닦아 냈다. 그 말을 타인의 입으로 듣는 것은 조금 속이 쓰렸다.

“그냥, 오랜 인연이니까요. 전하의 누나…… 비슷한 존재입니다. 저도 전하도 이제 성인이니, 그런 소꿉놀이 같은 관계를 입 밖에 내는 것은 부끄럽습니다만.”

“흐응.”

바실리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그녀에게 향했다.

“하지만 영애는 전하를 사랑하나 보군요.”

“읏…….”

너무 갑작스럽게 들어온 공격에 제대로 방어할 틈도 없었다. 부정할 새도 없이, 그녀는 표정으로 그 말을 긍정하고 말았다.

평소에 무표정한 편인 바실리가 드물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렇군요.”

“……어, 떻게 그걸.”

“사람은 얼굴로 많은 것을 말하는 법이거든요. 특히 영애처럼 순수한 분은 더 그렇지요. 사랑은 저도 이해하는 몇 안 되는 감정 중 하나니까요.”

엘피는 양손을 꾹 쥐며 간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부탁했다.

“비밀로 해 주세요. 왕자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어째서 폐인가요?”

“제 쓸데없는 감정을 아시게 되면……. 전하께서는 다정하니까, 고민하실 거예요. 그렇잖아도 내전 때문에 바쁘신 분인데, 괜한 고민거리를 더해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흠. 고민거리를 떠넘기는 게 뭐가 나쁘죠?”

“……네?”

뜻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하여 엘피가 입을 벌렸다. 바실리는 자신의 옅은 색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지금도 전하께서는 영애를 애지중지하시잖아요. 당부받는 저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뭐, 영애의 말을 믿자면, 전하께서 지금은 당신을 누나로만 보는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달라질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전하께서 당신을 비로 삼고 싶다고 생각을 바꾸실지도요.”

“그, 그런 엄청난 걸 바라지는…….”

“바라지 않는다고요? 정말로?”

“읏…….”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모습을 낱낱이 내보이는 것만 같았다.

사실은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 트론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그와 비교하면 자신이 한참 부족한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자신을 가족으로 여기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성을 애틋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삶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기가 막힐 정도로 새카만 욕심이었다.

“……바라고, 있어요.”

“으응……. 솔직하니 좋네요. 그러니 혹시 전하한테 딴 여자가 생기면 머리를 쥐어뜯어서 쫓아낸다는 각오로 임하세요.”

“어, 어떻게 그러나요……!”

“영애는 운이 좋은 거예요. 전하랑 오랜 시간 함께 있었고, 심지어 영애를 소중히 생각하잖아요. 이렇게나 좋은 조건에서 움츠러들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

“반면에 저는 밀리엔과 처음에 사이가 나빴지만. 정략결혼으로 묶인 관계라 운이 좋았죠. 그러니까 영애도 본인의 사랑을 포기하지 말아요.”

“부군…….”

“사랑만 하기에도 시간은 짧아요. ……밀리엔이 쓰러지고 나서 더욱 실감했던 일이죠. 그러니 부디 영애도 후회를 남기지는 말아요.”

엘피는 옷자락을 꾹 쥐며 고민했다. 트론에 대한 자신의 감정은 이기심이고, 욕심이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을 부정하지 말고 인정하기로 했다.

‘……돌아가서, 전하를 만나면.’

그때야말로, 고백할 것이다.

거절당할지도 모르고, 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후회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돌아가기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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