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9)
‘말하면…… 안 될까. 론을 너무나 좋아한다고. 이제는 그 마음을 숨기기 힘들다고.’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가슴 속에 담아 둔 채 견딜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입을 달싹이며 옷깃을 꽉 쥐었다.
“저기, 론.”
“응, 엘.”
“나…….”
바로 그 순간, 멀리서 굉음이 울렸다.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였다.
엘피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고, 트론은 그녀를 보호하는 것처럼 어깨를 감싸고 주변을 경계했다.
“……남쪽에서 들린 것 같은데.”
트론의 말에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와 동시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머릿속이 냉정해졌다.
자기감정에 빠져 허우적댈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전시였고,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생각이 없는 자신을 꾸짖으며 천천히 몸을 떼었다. 트론은 재빠르게 주술식을 그려 내어 사먼을 불렀다.
“사먼, 지금 접경지 근처에서 큰 소리가 났는데. 무언가 확인된 것 있나?”
[주군. 그 폭발음은 접경지의 병력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군사 충돌도 없었습니다.]
“……그럼 대체 무슨 연유로 난 소리지?”
[믿기 어렵습니다만……. 아무래도 솔피시언 영지의 최북단에 있는 마을, 케이흔을 폭파한 것 같습니다. 남방군 측에서, 스스로.]
엘피와 트론은 그 말을 듣자마자 동시에 침묵했다.
“……이유는?”
[현재로서는 불명입니다. 확인되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부드러웠던 공기에 불온한 기운이 섞이기 시작했다. 엘피는 다시 그의 옷깃을 꽉 쥐었다.
사먼과의 연락을 끝내자마자 트론은 딱딱한 얼굴로 엘피를 내려다보았다.
“……엘피. 아무래도 바로 돌아가야겠어.”
“네, 전하.”
엘피는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트론의 허락만 있다면 라이샤의 힘을 쓰고 싶었다. 무슨 위험이 도사리는지 알 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을 더듬어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트론이 데이센느 쪽으로 서둘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엘피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비틀거렸다.
“읏…….”
그녀가 작게 신음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트론은 깜짝 놀라 엘피에게 다가왔다.
“엘피, 왜 그래!”
“죄, 죄송해요. 아무래도 체력이 부족하다 보니 오래 걸은 게 안 좋았나 봐요.”
사실은 지난번 완전 예지의 힘을 쓴 이후로 계속 힘든 상태라서 그런 거였지만, 엘피는 그 사실을 적당히 얼버무렸다.
트론은 얼른 그녀에게 등을 내 주었다.
“업혀.”
“그, 그렇지만…….”
“얼른.”
여기서 걸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봤자 의미가 없었다. 엘피는 폐를 끼쳐서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그의 등에 업혔다.
평온한 가을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불온한 분위기가 고요한 들판을 채웠다.
***
붉은색과 보라색이 섞인 화려한 옷을 입은 중년 여성이 종종걸음으로 데하스 공작가의 회랑을 가로질렀다. 그녀가 도착한 안채의 문 안에서 까르르 여성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 왔다.
라블미 백작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점잖게 일렀다.
“……세틱스 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뭐야.”
안에서 기분 나쁜 듯한 청년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전 10시입니다. 어제 이 시간에 보고 드리러 방문할 것이라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아아, 응.”
안에서 여성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틱스는 차가운 말로 그녀를 떠밀어 보내는 듯했다.
이윽고, 천 쪼가리를 거의 걸치지 않은 여성이 숄을 대충 두르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라블미에게 묵례하고는 사라졌다. 라블미는 한숨을 내쉬고 세틱스의 처소로 들어갔다.
세틱스는 자다 깬 차림 그대로 침대에 기대 있었다. 그는 라블미를 보고 눈을 찡그렸다.
“보고할 시간을 유동할 정도의 눈치는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우리 스승께서는.”
“바쁘신 와중 죄송합니다. 방금 저자는 전하의 정부인가요?”
“이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중 하나다. 정부로 데려갈 생각도 없어. 뭐야, 우리 스승님은 제자의 여자관계까지 파악하고 싶어 하는 건가?”
“후사와 직결되는 중요한 일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 정비 말고 다른 계집에게 씨를 뿌리는 분별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는 느슨하게 대답하며 침대 등받이에 기댔다.
“잔소리를 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보고란 건 뭐지?”
“……이전에 지시하신 대로, 접경지 근방의 마을, 케이흔의 소멸과 관련하여 뒤처리를 진행했습니다. 그 마을의 연고지가 외지에 있는 경우 그들도 죽이라는 명이셨죠?”
“응. 복수라느니 뭐니 하면서 들고 일어나면 귀찮아지거든. 싹은 미리 밟아 두는 게 최선이지.”
세틱스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땅콩을 씹어 입에 넣었다.
“내전이 발발하고 나서 가장 흥분되는 시간이었어. 멋진 제안이었다고 생각해, 스승님. 솔피시언이나 마그달리사같이 소심한 것들은 생각지도 못할 방법이었으니까.”
한 영지의 영주인 이상, 보통은 자기 영지에 거주하는 죄 없는 백성을 학살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솔피시언이나 마그달리사가 그런 면에서는 정상인이었던 것뿐이다.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으며, 라블미는 온도 없는 미소를 얼굴에 올렸다.
“아무래도 솔피시언령에 속하는 마을이다 보니, 솔피시언 공작은 아직도 이번 일에 불만이 남아 있는 것 같지만요.”
“제 보신이 중요하여 움츠러든 너구리에 관한 이야기는 됐다. 그간도 그놈 밑에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아무튼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해 줘서 고마워, 스승님.”
그가 현재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솔피시언 덕분이었는데도, 어디까지나 도구로 여기는 양 세틱스의 평가는 냉정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케이흔을 소멸시킨 이유는 대외적으로 마을 단위로 심각한 전염병이 돌아 전염을 막기 위해 불태웠다는 정도로 적당히 처리해 두었습니다. 인구수가 100명도 안 되는 폐쇄적인 마을이고, 관련자는 모두 처리했으니 뒤를 캐긴 어려울 겁니다.”
“뭐, 그 부분은 우리 스승님의 솜씨를 믿고 있으니까. 전쟁에서 100명 정도는 희생 축에도 속하지 않지. 그들도 자신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이 몸에게 보탬이 되었다는 것을 알면 분명 감격할 거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 방에서 오고 갔으나 그것을 말릴 이는 아무도 없었다.
라블미 백작은 이전에 내렸던 ‘국지적인 전투라도 자신을 즐겁게 할 방안을 찾아오라’는 세틱스의 명에 의해, 케이흔을 소멸시키는 안을 상신했다.
「귀한 병력을 소진하여 전투를 발생시키는 것은 현 시점에서 손해만 볼 뿐, 전혀 아군의 이득이 되지 않음. 그러나 케이흔을 소멸시키는 것은 예상되는 병력 소진보다 적은 숫자의 민간인 사망이 예상됨. 또한, 방어만 굳히고 있는 트론을 도발하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음.」
세틱스가 유쾌하게 웃으며 그 안을 승인한 결과가 현재의 비극이었다.
“이후로 다음 타깃이 될 만한 마을을 물색하도록 해. 트론 자식이 움직이지 않으면 하나씩 없애 버려야 하니까.”
마치 자신이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이는 이유가 트론의 책임이라는 듯한 말투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지?”
“제시드에 대해서 걱정할 것 없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그자는 지금까지도 소식불통입니다. 이미 돌아섰다고 판단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지요?”
“흐응.”
세틱스는 흥미 없다는 듯한 콧소리를 냈다.
“만에 하나 제시드가 나를 배신했다고 하면, 바로 나에게 알려지게 되어 있다. 아직 연락이 없으니 괜찮은 거겠지.”
“그게 전하께서 신뢰하신다는 ‘장치’인가요?”
“그래. 그리고 그 녀석이 정말로 나를 배신하고 트론에게 간다면…….”
그는 쟁반 위의 땅콩 껍데기를 바스러뜨리며 환하게 웃었다.
“제시드의 존재 자체가 파멸의 불씨가 될 테니, 그건 그거대로 괜찮아.”
“……그것도 ‘장치’입니까?”
“그래.”
세틱스는 더 길게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손을 털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럼 스승, 부디 이 뒤로도 즐겁게 해 달라고.”
“……힘쓰겠습니다.”
그는 낄낄 웃으며 욕실 쪽으로 사라졌다. 라블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종잡을 수 없고 잔혹한 주군. 자신이 정말 제대로 된 선택을 한 것이 맞는지 때때로 불안해질 때가 있었다.
물론 라블미도 책략을 위해 백성의 희생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목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방법일 뿐, 조금도 즐거운 행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세틱스는 뚜렷한 목적이 없더라도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취급했다.
개미들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보금자리에 물을 부어 버리는 것처럼.
아마도 트론은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죄 없는 백성들이 계속 죽어 나갈 것이다’라는, 자신을 도발하는 메시지도 명확하게 이해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의미에서는 트론이야말로 ‘왕’이라는 자리에 걸맞은 게 아닌지.
라블미는 자신의 생각에 순간적으로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치는 것처럼 바쁘게 세틱스의 거처를 뒤로했다.
그녀가 손아귀에 쥘 이상적인 스레데니옴을 위해서는, 앞으로 할 일이 많았다.
***
세틱스 스레데니옴이 순수하게 자신을 도발하기 위해 마을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 버렸다.
라블미가 예상한 대로 트론은 그 사실을 보고받고 크게 분노했다.
그는 데니옴으로 돌아오자마자 석연치 않은 사유로 마을 주민 전원이 사망한 케이흔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성명을 냈다.
세틱스 측은 전염병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사후 처리였다는 공식적인 발표를 바꾸지 않으며, 트론의 성명에는 직접 반응하지 않았다.
트론은 바로 군무 대책 회의를 열어 이후 일을 논의했다.
“……우선, 비밀리에 적 진영에 잠복해 있는 특수부대원들은 소규모의 마을 현황을 파악하는 데에 힘쓰도록 지시하겠다.”
“하지만 전하, 특수부대원들의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남방군의 정보를 캐내는 일에 힘을 쏟기 어려워질 겁니다.”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형님의 성미라면 분명히 조만간 또 비슷한 일을 일으킬 것이다. 케이흔과 같은 비극을 반복할 수는 없다. 사전에 그런 일을 차단할 수 있어야 해.”
군무 대신이 조금 난감하다는 얼굴을 했다가 고개를 숙였다.
“……역시 마그달리사를 통한 르터바이스 군의 지원은 어려울지요.”
“아직은 그렇다. 하지만 조만간 결론이 날 것이다.”
“알겠습니다. 지시하신 명 받들겠습니다. 군사도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긴장을 풀지 않겠습니다.”
“부탁한다.”
그 후 트론이 바쁘게 정무 회의까지 마치고 집무실에 돌아온 것은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였다. 정신적인 피로를 느끼며 두통을 몰아내기 위해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으려니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가 보고할 일이 또 있는 것인가 생각하며 트론은 건조하게 답했다.
“들어와.”
하지만 대답을 해도 답변이 없었다. 트론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갈색과 회색이 섞인 깃털을 지닌 반투명한 비둘기가 날개를 퍼덕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비둘기는 곧바로 책상 위에 앉았다.
뜻밖의 손님에 트론이 어리둥절해하자, 비둘기가 입을 벌려 한 남성의 목소리를 전했다.
[음, 오랜만에 뵙습니다. 트론 전하. 그사이에 많이 크셨군요.]
“……르터바이스 부군!”
밀리엔 르터바이스 변경백의 부군인 바실리였다.
“갑작스럽기는 참으로 부자가 똑같군. 그나저나 많이 컸다니, 그쪽에서 내 얼굴이 보이는 건가?”
[네. 가이즈카의 마법 물체를 제가 조금 손대서……. 뭐, 그건 그렇고.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응, 그러도록 해.”
예나 지금이나 바실리의 사교성 없는 성격은 여전했다. 트론은 개의치 않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지정하신 사냥감은 함정을 파 두면서 계속 추적했습니다. 그쪽도 수준 높은 마법사라, 조금 고생하긴 했지만요.]
“……딱히 해치려는 건 아니니 정확히는 사냥감이 아니지만. 아무튼, 그래서?”
[제 함정을 교묘히 피해 가긴 했지만, 우회하는 동선을 포착했습니다. 여러 가지 흔적으로 예상 이동 경로를 산출해서, 포위할 수 있는 지점을 확인했고요.]
“역시 그대는 유능하군.”
[감사합니다. 가이즈카가 저보다 훨씬 유능하긴 하지만요. 아무튼, 이전에 전달받은 바로는 사냥감을 포획할 때 전하의 시녀장도 대동해야 한다던가요. 그럼 지금 바로 그 아가씨가 데니옴에서 출발해야 시간이 맞을 듯합니다.]
“……빨리도 말해 주는군.”
[죄송합니다.]
바실리는 별로 죄송하지 않은 말투로 사과했다.
돌아가기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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