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8)
어깨에 다시 축축한 감촉이 닿았다. 그가 입을 벌려 자국을 새기듯 그녀의 어깨를 물었다가 핥았다.
신경이 모두 그곳에 쏠린 것 같았다. 솜털이 쭈뼛 서는 듯했다.
“……저, 저녁은 안 드시고 뭐 하시는 거예요.”
“저녁보다는 엘피가 맛있을 것 같아서.”
“저는 먹어도 맛없어요.”
엘피는 트론의 농담에 똑같이 응수했다. 어딘지 달뜬 공기가 어색하여 무언가 침묵을 깨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는 입술을 떼고 반론했다.
“달콤할 것 같은데.”
“안 그래요! 분명히…… 쓰고 짜기만 할 거예요.”
“미각이 없다고 속이는 거야?”
“아니에요!”
“하지만 무척 달콤한 향이 나는걸.”
다시 입맞춤이 떨어지고, 목덜미의 연약한 살갗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엘피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그의 손목을 꽉 잡은 채 바르작거렸다.
“자꾸 장난치시면 화낼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듣고 트론이 움찔 몸을 굳히며 반응했다.
그는 서둘러 엘피를 떼어 내어 소파에 앉혔다. 그러고는 무릎을 굽히고 그녀 앞에 앉은 채 올려다보며 사과했다.
“미안, 좀 도가 지나쳤나 봐.”
“아셨으면 됐어요…….”
“……많이 화났어?”
“아직 화는 안 났어요.”
“정말 미안해. 엘피가 싫어하는 일을 할 생각은 없었어.”
정확히는 싫다기보다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와 닿아 있는 것이 싫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어린아이 같은 장난에도 두근거리는 그녀로서는 어디까지가 ‘좋은 누나이자 부하’로서 허용되는 선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일단, 샤워하면서 머리 식히고 올게. 저녁은 적당히 주문해 놔도 돼.”
자리에서 일어난 트론은 응접실에서 나갔다. 뜨거워진 뺨을 비비며 엘피는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허락된다면 그와 계속 닿아 있고 싶었다. 이런 마음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엘피는 소파 쿠션에 얼굴을 파묻으며 몸을 웅크렸다. 답이 나오지 않는 미로에서 헤매는 기분이었다.
***
다음 날은 새벽 일찍부터 움직였다. 전날 조금 어색하게 이야기가 마무리되긴 했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평소와 비슷했다.
트론은 엘피의 손을 쥐고 거리로 나갔다.
데이센느의 역에서부터 느껴졌지만, 전체적으로 경계가 삼엄한 편이었다.
위병들은 시간에 맞춰 사각지대가 없도록 분주히 순회하며 순찰을 돌았다. 도심 외곽에 있는 훈련소에서도 계속 훈련 중인지 함성이 들려 왔다. 전체적으로 사기가 높아 보였다.
“큰 문제는 없는 거지?”
“응, 오히려 무척 잘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아. 보고받은 내용과도 큰 차이는 없는 듯하고.”
트론은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그 나름대로 경비 체계를 칭찬하는 것이었다. 엘피는 살며시 웃었다.
“슬슬 점심이네. 간단하게라도 식사하는 게 좋겠지?”
도시를 전체적으로 돌고 나니 해가 기울어져 있었다. 점심을 먹기에는 약간 늦은 시각이었다.
트론은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여관과 마찬가지로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았지만, 서민적인 요리를 파는 음식점 한 곳이 열려 있었다.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나서인지 손님은 엘피와 트론 두 사람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어떤 거로 해드릴까?”
푸근한 인상의 주인이 두 사람을 자리에 앉히며 접객했다.
“새우 샐러드와 버터 수프로.”
“으음, 저는 호박 수프랑 호밀빵 주세요. 아, 포도 주스도 두 잔 주시고요.”
“네이, 네이. 둘이 외지인이유?”
“티, 티가 나나요?”
“이곳 사람이면 멀쩡한 청년들이 이 시간에 일을 안 하고 밥을 먹으러 올 리는 없으니까. 전쟁이 터져서 위험한 동네까지 오다니 거참 특이한 취향이네 싶지만.”
엘피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애매하게 웃고 있으려니, 앞에 앉은 트론이 짧게 답했다.
“친척이 이곳에 있어서요. 안부 확인 겸 들렀습니다.”
“그랬구먼. 데니옴 사람이유?”
“네, 맞아요.”
“그쪽이 야단법석이라 우리도 그럴 줄 알고 걱정한 건가?”
“데니옴은 그렇게까지는 아니에요. 데이센느 쪽이 접경지랑 가깝다 보니 흉흉한 분위기 아닌가 걱정했죠.”
손님이 없어 심심했던 것인지 주인은 두 사람을 붙잡고 길게 떠들었다.
“뭐,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보면 알다시피, 다들 그래도 느긋한 편이유. 평소대로 일도 하고 있고……. 겁 많은 사람들은 장사 접고 데니옴으로 피난 가기도 했지만 말이지.”
“그러셨군요.”
“거, 잘은 모르지만 도망갔던 형이 우리 국왕 폐하한테 시비를 건 거 아니오? 알아서 잘 물리쳐 주시겠지. 폐하는 훌륭한 분이시잖어.”
“……감사한 말씀이네요.”
트론이 정식으로 왕위를 계승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낮은 위치의 백성들이 그런 복잡한 체계를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이 나라의 실질적인 왕은 트론인 것이다.
지금 상황이 그다지 유리하지 않다는 것은 엘피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신뢰를 피부로 접하니, 어쩐지 뭉클하기도 하고 트론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좀만 기다리시우. 금방 요리 해 드리리다.”
“네, 부탁드려요.”
주인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식당 안에는 다시 침묵이 돌았다.
엘피는 트론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그에게만 들리도록 소곤소곤 말했다.
“후후, 왕자님 일로 칭찬받으니까 제가 자랑스러워요.”
“……저런 말을 들을 정도로 대단한 일은 하지 않았는데.”
“아니에요. 전하는 대단한 분이세요.”
트론은 쑥스러운 것을 감추는 것처럼 손을 뻗어 엘피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살짝 웃음을 흘렸다.
그때, 주방에서 주인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거, 새우가 오늘 좀 부족한데 대신 조개를 더 넣어도 되겠소? 에구머니나.”
두 사람이 황급히 거리를 두는 것보다 주인이 혀를 차는 것이 먼저였다.
“신혼이유? 한창 좋을 때구먼.”
“아, 아니…….”
엘피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부정하는 것보다 먼저, 트론이 짧게 답했다.
“네. 맞습니다.”
“그래도 공공장소에서 그러면 안 된다우. 알았지?”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샐러드는 조개 더 넣어 주셔도 돼요.”
“알겠소.”
주인은 쾌활하게 웃으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엘피는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뻐끔거렸다.
트론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싫었어?”
“아, 아냐. 아니지만…… 남매라고 하면 되었을 텐데.”
“…….”
그의 표정이 어딘지 토라진 듯 바뀌었다. 엘피는 빨갛게 익어 버린 얼굴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엘이랑 나는 별로 안 닮았으니까. 어릴 때면 몰라도, 이제는 이상해 보일 거야.”
“그, 그런가…….”
“응.”
트론은 공공장소에서 그러지 말라는 주인의 말은 잊은 듯 깍지 끼워 그녀와 손가락을 얽었다.
“그러니까, 부부.”
“읏…….”
“엘, 얼굴이 빨개.”
“론이 놀리니까 그런 거잖아!”
“쉿.”
조용히 시키려는 것처럼 트론이 엘피의 입술을 더듬었다. 엘피의 얼굴은 붉은 기가 빠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아, 부부니까 이름이 아니라 여보라고 부르는 게 맞던가?”
“그만 놀려……. 어제부터 너무 짓궂어.”
“엘이 너무 반응을 잘해 줘서, 그만. 미안해.”
트론은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엘피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에 얼른 손부채질을 했다. 그녀의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트론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녀가 조금이나마 자신을 의식하는 것 같아서 기뻤다. 그녀에게 더 닿아도, 허락되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청혼을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그녀와 단둘이 있는 이 시간이 행복했다. 엄중한 현재 상황이나 복잡한 고민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트론은 아직도 발그스름한 엘피의 뺨을 마지막으로 어루만졌다가 손을 떼었다.
***
그 후 두 사람은 접경지에 가까운 남쪽까지 걸어갔다.
원래대로라면 마차를 빌려 이동할 거리였으나, 엄중한 경비 때문에 데이센느 남쪽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 트론은 주술을 이용하여 위병의 눈을 가린 후 엘피와 함께 들판을 가로질렀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었지만, 엘피는 트론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별말 없이 묵묵하게 그를 따라갔다.
능선을 건너고 나서 눈에 들어온 광경에 엘피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금계국…….”
원래는 주로 여름에 자라는 그 꽃이 약간 철 늦게 피어난 모양이었다.
노란색의 꽃잎이 주변을 일제히 물들이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이 가련하게 물결쳤다.
“금계국 좋아해?”
그녀의 옆에 있던 트론이 물었다. 엘피는 살포시 웃었다.
“좋아하기도 하지만……. 금계국을 보면 옛날 생각이 나거든.”
“옛날 생각?”
“회귀 전에…… 론을 처음 만났을 무렵 말인데.”
다듬지 않아 아무렇게나 잡초가 피어난 삼 왕자궁 후원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바로 지금 그들이 가로지르는 들판 같은 분위기였다.
푸른 수레국화가 청초하게 흔들리는 샛길을 지나, 뻗어 나온 수국 꽃줄기를 헤치고 걸어갔었다. 후원의 탁 트인 평지를 노란 금계국이 장식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여름 사이에서, 느티나무에 기댄 소년은 혼자 겨울인 듯 보였다.
“론이랑 같이 산책하러 나간 후원에 금계국이 잔뜩 피어 있었거든. 정말 예쁜 여름 풍경이었는데, 그에 반해 너무 론이 외롭고 공허해 보여서. 슬프고 가슴 아팠어.”
“……그랬군.”
그녀는 트론을 돌아보았다. 그때 햇살을 피하는 것처럼 음지에 몸을 움츠리고 있던 무채색의 소년이 이렇게나 성장했다.
‘아…….’
트론은 선명한 가을빛 풍경 아래 온화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와 같은 쓸쓸함이나 외로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금계국과 붉게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 극채색의 하늘.
이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그는 가장 빛을 내는 존재였다.
벅찬 마음을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그녀는 울컥하는 마음을 얼버무리듯 큰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니까! 그게 너무 기뻐.”
트론은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건 아마, 엘피가 곁에 있어 줘서 그럴 거야.”
“나, 나는 딱히 무언가 하지 않았는데.”
“많은 걸 해 줬어. 정말이야.”
그는 눈부신 것을 바라보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리칼을 다듬어 주던 손이 흐르듯 내려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엘피. 잠깐 안아 봐도 돼?”
“으, 응!”
허락을 받고 트론이 살며시 그녀를 안았다. 평소와는 달리 어딘지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품 안에서 보듬듯이.
가슴에 얼굴을 묻자 그의 심장 고동 소리가 들렸다. 그가 살아 있는 기적을 실감하며 긴 시간을 이렇게 걸어왔다.
‘……정말 좋아해요. 왕자님.’
엘피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고백을 속으로 삼키며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돌아가기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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