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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15화 (115/132)

115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5)

“……계속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고향에 데려다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저희 부모님은 조금 늦어지는 것으로 타박하실 분들이 아닌걸요.”

“하긴, 그대의 모친은 느긋한 성미였지. 내 유모로 같이 지낸 것은 무척 짧은 시기였지만.”

“그래도 그 짧은 연으로 전하를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전 무척 기뻐요! 안 그랬으면 저는 왕자님 얼굴을 한 번도 못 보고 평생 살았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녀는 부러 그 아래 담긴 비극을 강조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가족을 잃은 것이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을지언정, 그 이상으로 트론을 만나게 된 것이 행운이라는 것처럼.

“……나도 누나를 만나서 기뻐.”

트론은 그대로 엘피를 꽉 안았다. 엘피 역시 살며시 그를 마주 안았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몸이 살짝 떨렸다. 그는 걱정이 되어 얼른 물었다.

“추워?”

“……조금, 쌀쌀해졌을지도.”

“응. 이제 가을이니까.”

“곧 론의 생일이 돌아오겠네.”

“그러게.”

엘피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밝게 웃는 얼굴로 트론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도 론 생일 잔뜩 축하해 줄게. 전시라서 행사를 열 수는 없지만.”

“신경 안 써도 되는데.”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이제 론도……. 완전히 어른이 되는 거니까.”

“법적으로는 이미 성인인데?”

“그냥, 내 마음이 그래.”

그녀는 애써 웃음을 만들며 그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더 닿아 있다가는 욕심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누나’나 ‘신하’ 이상으로 선을 넘어가고 싶다는, 그런 추한 욕심을.

***

북부에는 첫서리가 앉았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못마땅한 얼굴로 딜과 마주했다.

“각하, 사병을 만드실 거라는 게 정말입니까?”

“사병이 아니다. 방위군이지. 현재는 힘의 균형 때문에 두 세력이 이쪽을 치지 못하지만, 어차피 그것도 시간문제다. 우리도 최소한 중립을 유지할 만한 힘을 비축해야 하지 않겠느냐.”

트론의 경우에는 명분 때문에 마그달리사령을 침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대로 세틱스의 경우에는 굳이 마그달리사를 먼저 건드려서 얻을 이익이 없었다. 세틱스가 마그달리사령에 침입하게 된다면, 그것을 구실로 트론 역시 르터바이스에 있는 군을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꼬투리를 잡힐 겁니다. 저희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열쇠를 쥐고 있는 건 우리 마그달리사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차기 왕과의 힘 싸움은 불가피해. 내전으로 왕좌에 오른 왕은 더욱 그렇지. 미리 그 대책을 세워 두자는 것이다.”

“각하…….”

“딜. 나는 네가 유약해서 걱정이다. 지난번 치롤헷에서도 그랬지.”

“…….”

“루베인을 걱정하는 마음은 안다. 나도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네 어머니도 쓰러진 상황에서 너까지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야 쓰겠느냐.”

딜은 꾹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더 말을 해 봐야 자신의 부친을 설득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일목요연했다.

“……알겠습니다. 각하께서도 어머님께 자주 얼굴 보여 주세요.”

“그래.”

“각하. 혹시 루베인이 돌아오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그간 방종하게 군 걸 생각하면 무슨 벌을 줘도 부족하겠다만……. 됐다, 건강한 얼굴을 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느냐.”

그 소리를 들은 딜의 얼굴에 조금 안도의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어진 마그달리사 공작의 말은 냉랭했다.

“내전이 끝나고 상황이 정리되면 적당한 가문에 혼담을 넣어야겠다. 남편이 생겨서 아이를 낳고 내조하다 보면 그 철없는 성격도 고쳐지겠지.”

“……루베인이 거부할 겁니다.”

“딜. 너까지 철없는 동생한테 물들었느냐? 정말 너희 둘 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구나. 나가도록 해.”

결국 딜은 축객령을 받고 마그달리사 공작의 집무실에서 조용히 나왔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각하께서는 저렇게 말씀하시지만, 사병에 대해서 알려지면 우리 마그달리사가 내전의 집중포화를 받는 격전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야.’

후계자인 그에게 많은 권한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루베인을 찾아내는 대로, 결단할 필요가 있었다.

***

엘피는 그날 업무를 끝내고 피로에 지쳐 침대에 쓰러졌다.

납치 사건 때 ‘완전 예지’를 쓴 이후, 나빠진 몸의 상태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트론에게 걱정을 끼칠까 봐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전하나 가이 님이 진찰했을 때 몸에 이상은 없다고 했으니까…….’

무언가 신체에 눈에 띄는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그녀는 지친 몸을 일으켜 겨우겨우 샤워를 하고 나왔다. 머리를 말리는 둥 마는 둥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 순간, 엘피는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자신의 팔이 얼핏 반투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윽……!”

깜짝 놀라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팔이나 몸이 제대로 보였다.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걸까?’

몇 번이고 몸을 움직여 보고 거울을 들여다봤지만, 역시 몸 상태는 정상이었다.

엘피는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심란해서 잠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금세 의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잠이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피는 자신이 아득할 정도로 새카만 공간에 있는 것을 자각했다. 빛이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는…….”

불안하여 목소리를 내자 자신의 목소리만은 들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앞도 뒤도 분간이 가지 않는 어둠 속에서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누구 없어요?”

꿈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라이샤로서 꿈을 꿀 때와 다르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특정한 공간으로 이동하지도 않았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끝없는 암흑뿐이었다.

‘무언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마치, 남의 꿈에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듯한 부자연스러운 감각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짓눌리기 시작했을 때, 저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구 있어요?”

청년의 목소리였다. 엘피는 깜짝 놀라 대답했다.

“있어요! 저, 있어요!”

“와, 세상에. 사람이 있었군요.”

청년이 느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그가 있는 쪽을 알 수 있었지만,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꿈을 꿀 때 사람을 만나는 건 처음이에요. 반가워요! 목소리를 들으니 아가씨 같은데,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에, 엘피라고 해요.”

“멋진 이름이네요. 저는 제시드라고 해요.”

엘피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제시드.

5년 전에 그녀의 앞에서 유언을 남기고 사라진 청년의 이름이었다.

“제, 제시드요……?”

“어, 어라? 제 이름에 뭐 문제 있나요?”

어딘지 걱정되는 말투로 그가 물었다.

어둠 속이라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네가 라이샤가 되려고 한, 처음 그 마음을 잊지 마. 모쪼록 빛이 너를 이끌기를 빌게.”

엘피는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상대는 그녀가 아는 제시드가 맞을 것이다. 지금 이곳이 제시드의 꿈속이라는 의미일까?

‘……하지만 제시드 님은 분명히 사라졌는데.’

게다가 엘피라는 이름을 댔는데도, 그는 자신과 처음 만난 듯한 반응을 보였다.

“……혹시, 라이샤인 제시드 님 아니신가요?”

“저를 알아요?”

제시드가 반색하며 질문했다. 엘피는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저, 모르세요? 당신이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는데.”

“사라지기 전에? 으음…….”

그는 무언가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혹시 당신은, 제 전생을 알고 있는 사람인가요?”

“전생…… 이요?”

“네. 저는 전생의 기억을 대부분 잃었어요. 남아 있는 건 제가 라이샤였다는 기억이랑, 제시드라는 이름이었다는 것 정도거든요.”

엘피는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제시드는 어딘지 간절한 기색으로 물었다.

“당신이 아는 저는 어떤 사람인가요? 가르쳐 줄 수 있나요?”

“그게, 저도 혼란스러워서……. 전생이라니, 그럼 당신은 저보다 미래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인가요?”

“일단 제가 현재 있는 곳은 스레데니옴력 1031년 10월이에요.”

“……저랑 같아요.”

“으음……?”

이야기가 서로 맞지 않았다.

어차피 꿈이니 논리가 맞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자각을 가지고 꾸는 꿈은 대부분 의미가 있었기에, 엘피는 위화감을 느꼈다.

제시드는 미안하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기억하고 있는 게 거의 없어서. ……하지만 기쁘네요. 지금까지 제가 라이샤였다고 느끼는 게 그저 혼자만의 망상인 줄 알았거든요.”

“아녜요. 제시드 님은 어엿한…… 라이샤였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꿈에서 원작의 트론을 만난 일을 떠올렸다.

라이샤는 ‘가능성의 미래’를 읽는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과 다른 가능성의 세계에 있는 제시드를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혹시 제시드 님. 당신이 있는 그곳의 왕은 누구인가요?”

“음……. 현재 스레데니옴에는 5년째 왕이 없어요.”

엘피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혹시 그쪽도 내전 중인가요?”

“네, 맞아요. 얼마 전에 헤럴드 전하와 말러 전하가 돌아가셨고, 그게 내전의 시발점이 되었죠.”

그렇다면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제시드는 회귀 전이나 그녀가 알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가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제시드였다.

엘피가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으려니, 어딘지 진지한 목소리로 제시드가 말했다.

“저도 한 가지 물어도 될까요?”

“네, 네에.”

“당신은 제가 사라졌다고 했죠. 그게 언제 일이었나요?”

“……딱 5년 전, 이맘때쯤이었어요.”

“10월 31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제시드가 사라진 것은 마그달리사 공작이 주최한 북부 교류 파티 전야제 때였다. 즉, 트론의 생일 바로 전날이었다.

그녀의 반응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제시드가 고요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라졌다’라는 표현을 쓴다는 건……. 제가 혹시 유령 같은 상태였다는 뜻인가요?”

“네, 네에. 맞아요.”

“아하……. 그랬구나, 그랬어…….”

제시드의 목소리에서 어딘지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홀로 무언가를 납득한 것 같았지만, 엘피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엘피 님. 라이샤였던 제가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신과 만난 건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혹시 제가 사라지기 전에 남긴 말 같은 게 있었나요?”

“네. 제시드 님 본인의 이야기는 실패로 끝났다고 했어요. 그러니 제게 기대하겠다고. 라이샤가 되려고 한 처음 그 마음을 잊지 말라고도 하셨어요.”

생각날 때마다 되새겨서 이제 잊기도 어려운 그 유언을 속삭였다.

“……그리고, 가능하면 루베인을 부탁한다고도 하셨어요.”

“역시…….”

제시드는 한참 말이 없었다. 엘피는 자신이 무언가 그의 신경을 거스른 건가 걱정하며 두 손을 꼭 모아 쥐었다.

“……그렇군요. 지금은 당신이 라이샤인가 보네요.”

“아마…… 도요.”

“그렇다면 엘피 님은 트론 전하를 모시는 라이샤일까요?”

“어, 어떻게 그걸…….”

“소거법으로요.”

소거법이라는 이야기는, 현재 차기 왕위를 다투고 있는 두 사람 중 세틱스를 제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소리였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라이샤가 세틱스의 옆에 없다는 걸 확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만큼 세틱스의 측근이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세틱스의 측근, 또한 제시드라는 이름.

바로 결론이 나왔지만, 꿈에서 깨려는 듯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엘피는 당황하여 크게 외치듯 물었다.

“……당신은, 제시드 율페이든인가요?”

그러나 그의 대답을 듣기 전에, 암흑에 삼켜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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