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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16화 (116/132)

116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6)

“아…….”

엘피는 몸부림을 치다가 일어난 후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캄캄한 새벽, 자신의 방 침대였다.

그녀는 꿈의 내용을 까먹기 전에 적어 두기 위해 수첩을 뒤졌다. 원작의 내용이나 회귀 전의 기억나는 정보들을 모아 둔 수첩이었다.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나서, 수첩은 많이 낡아 있었다.

거기에는 제시드의 잔류 사념이 남긴 마지막 말에 대해서 써 둔 것도 있었다. 엘피는 다시 한번 그 내용을 신중하게 읽어 내렸다.

「지금 나는 잔류 사념 같은 거니까. 루베인을 못 보고 영원히 사라지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나의 이야기는 실패로 끝났어. 그러니까 너에게 기대할게. 엘피 양.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행하도록 해. 물론 힘들 때도 있을 거고, 네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가려진 진실이 있겠지만. 네가 라이샤가 되려고 한, 처음 그 마음을 잊지 마. 모쪼록 빛이 너를 이끌기를 빌게.」

그는 마치 유령과 같은 상태로 엘피의 앞에 나타났었다.

엘피 본인도 라이샤의 힘을 쓰면서 그런 상태가 된 적이 있었기에, 제시드가 잔류 사념이라고 표현했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몸에서 빠져 나와서, 혼만 떠돌아다니는 상태? 그때도 제시드의 몸은 존재하지만, 혼이 빠져 나와 있었던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시드의 혼은 엘피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실은 사라진 게 아니라, 루베인에 대한 기억 같은 것을 잊은 채 원래 몸으로 돌아간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도 어렴풋이 라이샤였다는 기억과 제시드라는 이름만이 남아 그것이 전생이라고 착각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사라졌다’라는 표현을 쓴다는 건……. 제가 혹시 유령 같은 상태였다는 뜻인가요?”

“네, 네에. 맞아요.”

“아하……. 그랬구나. 그랬어…….”

꿈속의 제시드 역시 유령 같은 상태인 자신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딘지 혼자서 납득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 역시 무언가 짐작 가는 것이 있어서 그랬던 것 아닐까.

또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나의 이야기는 실패로 끝났다.’라는 말이었다.

지금까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최근의 경험들을 되씹으며 엘피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제시드 역시, 나처럼 회귀했던 것 아닐까?’

엘피는 이전의 꿈으로 ‘원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과거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범위는 트론과 평민으로 살다가 그가 죽었던 과거, 그리고 현재뿐이었다.

‘론이 폭군이 되고 루베인이 왕이 되었던 그때, 사실은 제시드가 회귀를 했던 거라면…….’

제시드가 주체가 되어서 일어난 회귀였기에, 엘피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의문은 남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전생에서 ‘책’의 형태로 그 이야기를 읽은 것에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것인지.

또한, 그녀가 ‘원작’에서 읽은 바로는 제시드는 평민이었다. 솔피시언과 관계가 있는 귀족가의 자식이라는 설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째서 지금 제시드가 자신이 알고 있는 인적 사항과 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것저것, 의문은 남지만.’

확실한 건 지금의 제시드 율페이든이 아마도 그녀가 아는 제시드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크고, 기억을 잃은 채 세틱스의 부하 노릇을 하며 루베인을 속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만날 수는 없을까? 대화의 여지가 있을지도 몰라.’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니 어느샌가 창밖으로 아침 해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엘피는 조금 고민하다가 이 이야기를 트론에게 전하기로 했다. 루베인을 구하여 마그달리사의 협력을 얻는 것이 현재의 핵심 과제이니, 그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루베인은 여관방에서 일어나 침실을 나섰다. 평소대로라면 자신보다 훨씬 빨리 일어나는 제시드가 거실에서 맞이했을 텐데, 오늘은 거실이 텅 비어 있었다.

“제시드?”

옆방 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지금 도망쳐도…… 되지 않나?’

물론 제시드는 뛰어난 마법사이니 자신을 금세 추격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잡히기 전에 데니옴 왕궁이나, 혹은 마그달리사 본저 쪽으로 연락을 한다면?

“……크헤룬.”

시험 삼아 앵무새를 불러 보았지만, 이쪽은 여전히 방어 중인지 크헤룬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원리를 잘 모르지만, 가이가 크헤룬을 매개로 해서 위치를 추적하지 못하도록 제시드가 무언가 조치를 했다는 소리를 얼핏 들었다.

“…….”

가만히 생각하던 루베인은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자신을 세틱스에게 데려가는 중이었다면 또 모르지만, 그는 정직하게 하븐을 향하고 있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귀찮을 정도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데다가 도보라서 느린 속도였지만, 그도 세틱스의 명령에 불복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니 불만은 없었다.

루베인을 트론에게 바로 보내지 않고 마그달리사 공작을 만나게 하는 것이 그의 타협점일 터였다.

제시드가 그 신뢰를 지키고 있는 이상, 자신도 그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다.

‘그리고 뭐랄까……. 버리고 가면, 정말로 미아 같은 얼굴로 울 것 같단 말이지.’

이래저래 긴 시간 같이 지내다 보니 정이 들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가 개운하게 씻고 나온 후에도 제시드는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다 싶어서, 루베인은 다시 방문을 두드렸다.

“제시드. 계속 자는 거야?”

꽤 큰 소리로 불렀는데도 답이 없었다. 그녀는 잠깐 들어가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문고리를 비틀었다. 다행히 문을 잠그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

제시드는 침대에 누운 채 고요히 자고 있었다. 루베인은 침대로 다가가 더 큰 소리를 냈다.

“제시드, 안 일어나?”

“…….”

“안 일어나면 두고 간다?”

여전히 답이 없었다. 이쯤 되니 어디 아픈 건가 걱정이 되어, 그녀는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일어나라니까. 내가 도망가면 어쩌려고 이래?”

“으…….”

제시드가 조금 늦게 반응했다. 그는 눈을 깜빡이다가 의아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루베인 님?”

“그래, 나야.”

멍하니 눈을 비비던 제시드는, 한 박자 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어, 어째서 제 방에?”

“해가 중천에 떴는데 계속 안 일어나길래 걱정되어서.”

“아…….”

제시드는 이불을 끌어 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딱히 벗고 잔 것도 아닌데 신선한 반응이네.’

루베인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어디 아픈 거 맞아? 약 사다 줄까?”

“아, 아뇨. 꿈을 꿨는데……. 평소랑 좀 다른 꿈을 꿔서, 그 영향일지 모르겠네요.”

“꿈?”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으며 되묻자, 제시드가 주억거렸다.

“저는 평소에 꿈을 거의 안 꾸거든요. 가끔 꿔도…… 어둠 속에서 그냥 혼자 있는 꿈을 꿨어요.”

“그건 악몽이잖아.”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음, 혼자 있는 건 그렇게 싫어하지 않아요.”

아직 잠기운이 완전히 날아가지 않은 것인지 제시드의 목소리는 어딘지 몽환적이었다.

그는 멍하니 꿈속의 일을 떠올렸다.

“당신은 제가 사라졌다고 했죠. 그게 언제 일이었나요?”

“……딱 5년 전, 이맘때쯤이었어요.”

“10월 31일?”

10월 31일.

바로 그가 백치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고 사람으로 구실을 하기 시작한 날이었다.

‘……라이샤로서 영혼만 있던 내가 사라지고, 지금의 몸으로 돌아오게 된 것 아닐까.’

제시드는 지금의 라이샤라는 ‘엘피’라는 여성을 떠올렸다가, 문득 루베인 쪽을 돌아보았다.

“루베인 님. 혹시 트론 전하 곁에 엘피라는 사람이 있나요?”

“응? 맞아, 왕자님의 시녀장이야.”

“아아…….”

제시드는 한숨과 함께 신음을 냈다. 역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루베인은 그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엘피 언니는 왜? 너, 언니랑 아는 사이였어?”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요. 별일 아니에요. 이래저래 마음의 정리가 되어서.”

“……?”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자신이 아직 잠옷 차림이라는 걸 깨닫고 다시 우물쭈물했다. 그러고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루베인 님을 빨리 하븐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으응…….”

“아침 드셔야죠? 바로 씻고 옷 갈아입을게요. 빠르게 출발하죠.”

“알았어. 나가 있을게.”

무언가 고민이 사라진 듯 그의 표정은 개운해 보였지만, 루베인은 다소 위화감을 느꼈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예전에 여기저기 봉사활동을 다닐 때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시한부 환자가 자기 병 받아들이고 주변 정리할 때 후련해 보이던 표정 같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지나친 생각이었다.

어째서 엘피의 이름을 꺼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고민이 풀린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루베인은 그의 방을 나섰다.

***

“……제시드 율페이든이, 과거의 라이샤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트론은 엘피의 이야기를 듣고 턱을 괴었다. 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트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혹시 또 라이샤의 힘을 쓴 건가?”

“엇…… 아, 아니에요! 무언가 강하게 마음으로 빌면 힘을 쓰게 되는데, 딱히 그러지는 않았어요. 아마도 제가 우연히 그 사람의 꿈에 들어간 것 같아요.”

“정확히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 힘인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해. 저번처럼 엘피가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그 시간이 무척 짧게 느껴졌던 엘피와 달리, 그녀가 깨어나지 않는 것을 몇 시간이고 겪었던 트론에게는 그때 일이 마음의 상처로 남은 모양이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특별한 일 없었던 거지?”

엘피는 순간적으로 꿈을 꾸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제시드의 일로 머리가 꽉 차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자신의 몸이 반투명해 보이는 현상을 겪었었다.

‘……하지만 눈이 피로해서 착각한 것일지도 모르고.’

트론이 저렇게나 걱정을 하는데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괜한 걱정을 더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얼른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네, 괜찮아요.”

“알았어. 그럼 그 문제는 괜찮다고 치고……. 제시드 율페이든에 대한 일이 남았군.”

엘피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조합하자면, 제시드는 기억을 잃은 채 라이샤라는 애매한 자각만 남은 상태로 세틱스를 도운 모양이었다.

“저랑 대화를 나눴을 때도 기억을 잃은 상태인 것 같았어요. 하지만…… 지금도 루베인이랑 함께 행동하고 있고, 세틱스 전하 곁으로 가지 않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고민이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대화를 해 보고 싶다는 거로군.”

“제시드 님이 루베인과의 인연을 잊고 세틱스 전하를 돕는 것은 안타깝다고 생각해요. 제 말을 어디까지 믿어 주고, 어디까지 저희를 도와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고민하고 있는 거라면, 설득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트론은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현재 두 사람의 위치는 르터바이스 부군이 추적하고 있고, 아마 조만간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겠지.”

“……네.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을 만날 때 저도 같이 가서 제시드 님을 설득하고 싶습니다.”

“설득할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을 거다. 그가 무슨 속셈인지 아직 정확하게 알 수 없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 가능성이 0이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생기는 거잖아요. 거기에 걸고 싶어요.”

엘피가 곧은 눈으로 트론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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