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4)
“흠. 뭐, 네. 나쁘지 않은 실력이죠.”
“그대는 대체 부친과 언제 화해할 건가?”
“됐습니다. 아버님도 각하를 독차지하고 있으니 아들 따위 안 아쉬울 거고요. 그것보다, 아버님이 각하 곁에서 떨어져서 왕자님의 명령을 수행할까요?”
“할 거야. 내 부탁이면 뭐든 하나는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아아, 각하를 치료했을 때 약속하셨나 보군요. 알겠습니다. 아버님께 연락 넣어 두죠.”
“또 싸우지는 말고.”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아.”
가이는 건성으로 대답한 후 서류를 챙겨 집무실을 나섰다.
트론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가을에 접어들고 해가 짧아져, 어느샌가 석양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바쁘니 저녁 식사는 생략하고 싶은데……. 엘피가 화내겠지.’
그는 고민하다가 저녁도 점심처럼 간이식으로 부탁하기로 했다.
시종을 부르려고 했을 때, 그보다 먼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저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방금까지 그가 떠올리던 당사자의 목소리였다.
“……엘피? 들어와.”
놀란 것도 잠시, 트론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엘피는 왜건을 끌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왜건에 올라가 있는 것은 음식 접시들이었다.
트론은 그제야 엘피가 집무실로 굳이 찾아온 이유를 눈치채고 옅게 웃었다.
“저녁 식사?”
“네. 아침 안 드시고 점심도 부실하게 드셨다고 들었어요. 저녁에도 또 그러실까 봐…….”
완전히 간파당하고 있었다. 트론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알았어. 먹으면 되지?”
“네. 테이블에 놓을게요.”
집무실에 식탁이 없어 낮은 테이블을 쓰게 될 것을 고려한 것인지 엘피가 가져온 요리들은 포크나 나이프 없이 간편하게 집어먹기 쉬운 종류였다.
그녀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져서 트론은 어쩐지 마음이 포근해졌다.
그가 일전에 소문이나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한 이후, 두 사람의 거리는 이전보다 가까워졌다.
왕궁 내의 인력이 줄어든 것도 있어서 예전처럼 엘피가 그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 덕분에, 신경이 곤두서고 긴박한 상황인데도 트론의 마음은 평온한 편이었다.
세틱스를 향한 경계나 업무를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걱정이 사라져서 안정감이 생긴 것에 가까웠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녀가 절대 떠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옆에 있어 주리라는 확신이 생겼기에.
“엘피는 안 먹어?”
“저는 간단하게 먹고 왔어요. 신경 쓰지 마시고 식사하세요.”
트론이 뚱한 얼굴로 옆에 서 있는 엘피를 올려다보았다.
“……같이 먹는 게 좋은데.”
“앗……. 죄송해요. 식사를 1인분만 챙겨 왔어요.”
“다음부터는 같이 먹자.”
“네, 네에.”
“그리고 옆에 서 있지 마. 편히 앉아 있어.”
“전하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엘피는 시녀이기 이전에 내 엘피야.”
엘피는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을 숨기며 작게 “네…….” 하고 답했다.
트론이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이 기뻤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말도 괜히 확대 해석하며 두근거리는 일이 너무 잦았다. 분명히 별 뜻이 아닐 텐데도.
그녀는 노을 덕에 붉어진 얼굴이 들키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트론의 건너편에 앉았다.
트론은 한입 크기로 자른 미트파이를 묵묵히 씹어 삼켰다.
그 모습을 보자 엘피는 마음이 쓰렸다. 미각을 잃은 그에게 식사는 즐겁지 않은 일과일 것이다.
트론의 건강을 위해서 식사 챙기는 것을 양보할 생각은 없었지만,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 같아서 미안할 때가 많았다.
“……실은, 사먼한테 들었었어요.”
“음? 어떤 걸?”
“어릴 때 독을 드신 후유증으로…… 맛을 못 느끼신다고.”
“사먼이 쓸데없는 소리를…….”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엘피는 얼른 사먼을 변호했다.
“아, 아뇨!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사먼에게 억지를 부려서 이야기를 들은 거니까요. 나무라지 말아 주세요.”
“……알았어, 엘피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녀가 사먼을 감싸자 트론의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그 이유를 오해한 엘피가 사과했다.
“죄송해요. 전하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 숨겨서…….”
“그렇게 말하자면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됐어, 그 이야기는. 이제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 거잖아.”
“그래도 죄송해요.”
“어떤 게?”
“……예전에, 말씀드렸었잖아요. 전하께서 맛있게 드실 만한 음식을 만들어드리겠다고. 불가능한 일을 약속했던 거구나, 나중에 깨달았어요.”
“그러게. 말만 해 놓고 결국 음식 안 만들어 줬네.”
“요, 요리 드시는 거 안 좋아하시는데 억지로 만들어 봤자 폐일 것 같아서요.”
트론은 냅킨으로 입을 닦아 낸 후 자리에서 일어나 엘피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왜 멋대로 판단해서 그랬어. 섭섭하게. 엘피가 만들어 준 거 먹고 싶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응.”
“저, 요리 진짜 못해요.”
그녀는 회귀 전 6년의 세월 동안 트론이 설파하던 사실을 간신히 인정했다.
트론은 눈을 깜빡이다가 크게 파안했다.
“그 정도야?”
“……네. 회귀 전에 같이 도망 다닐 때는 전하가 요리를 도맡아 하셨어요.”
“그랬구나. 나는 요리 잘했어?”
“네, 무척.”
엘피가 눈을 반짝이며 과거에 트론이 해 주었던 여러 맛있는 요리를 자랑스레 설명했다.
“미각이 없는데도 용케 요리를 했었네.”
“그때 왕자님이 말씀하시기로는, 레시피대로 따라 하면 그만 아니냐고.”
“맞는 말이긴 하군.”
“……따라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여기 있지만요.”
그는 시무룩해 보이는 엘피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는 왕자님이 저한테 요리 하지 말라고 그러셨을 정도예요. 지금 왕자님이 제 요리 먹고 싶다고 하시는 것도…… 몰라서 그러시는 거예요.”
트론은 다른 한 손으로 엘피의 손을 잡아끌어 깍지 끼워 잡았다. 엄지로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글쎄, 그냥 짐작이지만. 아마 내가 그때 엘피한테 요리 하지 말라고 한 건 단순히 엘피가 요리를 못해서는 아닐 거야.”
“……?”
“같이 도망 다니고 어려웠던 시절이라면서. 요리도 노동이니까. 엘피한테 되도록 힘든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그건…….”
엘피는 회귀 전 일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왕자와 함께 도망 다니는 상황이 불편해서 자신이 모든 일을 도맡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트론이 요리를 시작한 이후로는 어렵고 힘든 집안일은 그가 솔선해서 해치웠다.
나중에는 그것에 익숙해져서 크게 생각을 안 했었지만, 가끔 집을 비우는 것만 빼면 그는 최고의 동거인이었다.
그런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뭔가 무척 부끄럽고, 미안하고 그러네요.”
“나는 부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
“그게 무슨…….”
트론은 옆에 앉은 엘피를 가볍게 안아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엘피가 당황하여 움찔거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아 자신 쪽으로 밀착시켰다.
“나도 엘피처럼 전부 기억하면 좋을 텐데. 그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오랜 시간 엘피랑 같이 있었던 거겠지? 그때의 내가 부러워.”
“전하…….”
트론은 엘피의 어깨에 뺨을 대고 그녀를 꼭 안았다.
엘피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마주 안았다. 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두근거렸다.
“……더 이야기해 줄래?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하, 하루로 안 끝날 텐데요.”
“그럼 나눠서 계속해 줘. 1년이 되든, 2년이 되든……. 얼마든지 길어져도 되니까.”
지금 상황이 여유롭지 않다는 것은 엘피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이렇게 미래를 말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도 자신처럼 두 사람이 함께하는 미래를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
잠시 엘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트론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저 꽃은 뭐야?”
왜건 위에 하얀색의 꽃다발이 있었다. 엘피의 표정이 약간 흐려졌다.
“……말러 전하의 100일제가 얼마 안 남았잖아요. 저와 직접 연이 있었던 분은 아니지만, 전하한테는 다를 것 같아서 꽃이라도 꽂아 놓을까 하고요.”
“그랬군. 고마워.”
말러의 장례는 세틱스 측에서 급하게 진행시켜 버렸다. 당연히 항의했지만, 세틱스는 말러의 시체를 멋대로 화장해 버렸다. 아마 사인이 밝혀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죽은 헤럴드의 경우에는 사인 조사부터 장례 절차까지 최대한 공개적으로 일을 진행했다.
그의 사인도 확인했으나, 음독자살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라블미의 손을 탄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삶의 의욕을 잃었는지는 이제 영영 알 수 없었다.
트론 역시 세틱스처럼 100일제에 맞춰 계속 검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헤럴드의 죽음을 기리는 것이었으나, 엘피는 그가 말러를 추모하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꽃을 꽂아 두는 것보다는 다른 방식이 나을 것 같아. 엘피, 잠깐 나랑 산책할래?”
“네, 전하.”
트론은 꽃다발을 품에 안고 테라스를 통해 후원으로 나갔다. 엘피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이제 저녁놀이 거의 사라져 하늘은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 별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걷다 왕궁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졌을 때, 트론은 공중에 연초록빛의 주술식을 그려 냈다.
주술식이 완성된 후 그가 공중을 향해 꽃을 들자, 꽃들은 일시에 수분을 잃고 낙엽처럼 말라 갔다.
‘아, 이건…….’
엘피는 눈에 익은 그 광경을 보고 숨을 삼켰다. 예전에 갓 회귀하여 선왕인 셀딕 왕의 부고가 전해진 후 그가 사용했던 주술이었다.
트론이 공중에 꽃줄기를 흔들자 하얀 꽃들은 가루가 되어 남쪽으로 날아갔다.
엘피는 잠시 눈을 감고 말러 스레데니옴의 명복을 빌었다.
트론은 마지막 가루를 털어 내고 손을 내렸다. 그 표정은 여느 때처럼 무뚝뚝했지만,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트론의 손을 꽉 쥐었다.
“무척 상심이 크시죠, 전하.”
“글쎄. 나는 말러 형님과 그렇게 깊은 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저랑 왕자님이 처음 왕궁에서 도망쳤을 때요. 그때도 이렇게 추모하셨잖아요.”
“그때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엘은 오해했던 것 같지만, 난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 그냥 그러는 게 그럴싸해 보이니까, 추모하는 흉내를 낸 것뿐이야.”
“어떤 이유로 했든 그래도……. 그때 헤럴드의 반란으로 죽었던 많은 사람을 기리는 행위에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형태뿐이라도, 제 가슴에는 와닿았으니까요.”
트론은 조용히 그녀의 뺨을 쓸었다. 엘피는 흠칫했다가 얼굴을 붉히며 그의 커다란 손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그녀의 선량함이 때로 눈부시고 거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빛을 독차지할 수 있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라이샤는 고대어로 빛을 선사하는 자를 뜻한다. 트론은 그 말이 딱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녀야말로 그에게 있어서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