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3)
“……소공작한테 인사하고 싶었어?”
“어? 아, 아니. 그분한테는 폐를 끼친 일도 있고 해서…….”
“마음 쓰지 마.”
“아무래도 그때 일이 미안해서 종종 생각나거든.”
“생각도 하지 마.”
그답지 않게 어딘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였다. 엘피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론, 소공작님을 싫어해?”
“…….”
트론은 대답 대신 엘피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그 감촉이 간지러워서,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옷자락을 꼭 쥐었다.
“……엘이, 날 두고 가 버리면 어쩌나 하고.”
“아, 설마 그때 청혼받았던 것 때문에 그래?”
엘피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누나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얼른 트론을 달랬다.
“후후, 나한테 과분한 혼담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괜찮아, 난 아무와도 결혼할 생각 없어. 어디에도 안 가.”
“……아무랑도 결혼할 생각 없어?”
“응.”
“…….”
아까와는 조금 느낌이 다른 침묵이 돌아왔다. 의아해하고 있으려니, 트론이 작게 중얼거렸다.
“……알았어. 일단 나도 고민해 볼게.”
“……?”
“있잖아, 엘.”
“응.”
“혹시 내가 부탁하더라도……. 싫은 건 꼭 싫다고 말해 줬으면 해.”
“음…… 론이 부탁하는 건 하나도 안 싫을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알았지?”
그가 어딘지 풀이 죽은 것 같아서, 엘피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끄덕여 주었다.
“응, 꼭 그럴게.”
트론은 그제야 안심한 듯 그녀를 다시 안았다. 엘피도 그를 마주 안으며 가슴에 뺨을 댔다.
아침까지 짧고도 달콤한 시간을 소중하게 음미하고 싶었다.
***
금색 비단으로 장식된 방에서 가느스름한 얼굴의 청년이 심기가 불편한 듯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앞에 공손한 태도로 서 있던 초록색 머리의 중년 여성이 입을 열었다.
“세틱스 전하. 안타깝습니다만, 마그달리사 공작은 마음을 돌릴 것 같지 않습니다. 애초에, 솔피시언 공도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는 마당이니, 협상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고작 그런 소리를 하려고 보고를 하는 건 아닐 텐데, 나의 스승님께서.”
라블미 백작은 만들어 붙인 듯한 미소를 얼굴에 올렸다.
“그래서 제가 제시드를 멀리 보내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자는 불완전한 면이 많았습니다. 안정성이 낮은 요소는 가까이 두고 제어해야 하는 법입니다.”
“아직 제시드가 이쪽을 배신했다고 판단하기는 이르다.”
“배신 외에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 뭐가 있을까요? 죽음일까요?”
세틱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눈에 날카로운 빛이 깃들었다.
“우리 스승님이 비아냥거리는 솜씨가 제법이군. 이봐, 스승님. 나는 아직 그대보다는 제시드를 신뢰한다. 나를 머저리라고 생각하나? 그대가 마지막까지 숙부와 나를 천칭에 두고 재고 있었다는 걸 모를 사람이 어디 있다고.”
“모두 제가 부덕한 탓이지요. 송구할 따름입니다.”
라블미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표정은 무척 반성하고 있는 듯 그럴싸했지만, 세틱스는 그녀의 연기 따위는 믿지 않았다.
“제시드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다. 마그달리사의 건방진 계집과 함께 사라진 것은 확실하고, 조만간 나를 찾아오겠지.”
“그자에 대한 신뢰가 굳건하시군요.”
“인격에 대한 신뢰가 아니다. 장치에 대한 신뢰지.”
“……?”
세틱스의 말에 위화감을 느낀 라블미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상하게 턱을 괴며 화제를 돌렸다.
“그대가 알 것은 없다. 그것보다 언제까지 트론 새끼가 데니옴 왕궁에서 진을 치고 있는 걸 두고 봐야 하는 거지?”
“가장 좋은 것은 마그달리사 영애의 신병을 확보하여 마그달리사령과 함께 고립된 데니옴을 치는 것입니다만…… 그녀가 행방불명 상태이다 보니.”
“그건 됐다. 제시드가 오기 전에 해결할 방법을 내놔.”
“현재로서는 관망하는 게 좋습니다. 고립된 위치의 수성전은 정신을 갉아먹고 군사의 사기를 떨어뜨리게 마련이지요. 데니옴 내부로 계속 불안을 부추기는 소문을 풀고 있으니, 오래 버티기는 어려울 겁니다.”
“흥, 정말 시시하군.”
“전략에 시시함과 흥미로움은 의미가 없습니다. 누가 더 인내하고, 누가 더 약간의 우위를 점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전략 전술 강의는 됐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네, 전하.”
“이 칙칙한 검은 옷은 언제까지 입고 있어야 하지.”
세틱스가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못마땅한 말투로 물었다. 그녀는 입가에서 온화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친절하게 답했다.
“말러 전하의 사망 100일제까지는 참으시지요. 지금도 말러 전하를 죽인 것이 트론 전하라는 소리에 반신반의하는 이가 많습니다. 여론을 악화시키고 싶지는 않으시겠지요.”
“흥, 덜떨어진 형은 하여간 죽어서도 도움이 안 되는군.”
제 손으로 죽인 혈육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세틱스는 머리를 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루해졌다. 국지적 전투라도 상관없으니 나를 즐겁게 해 줄 방안을 찾아와.”
“……조만간 상신하겠습니다.”
“그래.”
라블미 백작은 그가 안채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헤럴드보다 다루기 힘든 자야.’
헤럴드도 충동적이고 잔인했지만, 멍청하고 욕심이 많아 속을 알기 쉬웠다. 그에 반해 세틱스의 진의는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어리석지는 않지만 본인의 즐거움이나 충동을 위해 그릇된 선택도 얼마든지 했다. 오히려 그렇게 자신에게 리스크를 주는 과정을 즐기는 것처럼도 보였다.
‘솔피시언 공작도 모시기 힘든 주군일 거라고 경고했었지. 괜찮아.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배알을 내놓더라도 최후에 이 스레데니옴 왕국을 손아귀에 쥐는 것은 바로 내가 될 것이다.’
그녀는 바삐 집무실로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방심하지 않고 트론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할 생각이었다.
***
원래 제시드는 데니옴 회의에 맞춰 루베인을 세틱스에게 데려가도록 명령을 받았었다.
그는 순수하게 세틱스가 비 후보인 루베인을 맞이하기 위해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니옴 회의에 앞서 헤럴드와 말러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표면적으로는 트론이 벌인 일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전후 상황으로 보아 세틱스 진영이 저지른 짓이 틀림없었다.
이와 관련해서 사전에 전혀 들은 바가 없었던 제시드는 동요했다. 어딜 보아도 내전으로 치닫는 움직임이었기 때문이었다.
루베인 역시 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게 일갈했다.
“정신 차려! 비 후보고 뭐고, 나를 인질로 삼으려는 거잖아! 솔피시언이랑 척을 진 우리 각하를 협박하려고!”
“저는…….”
“네가 생각하고, 네가 판단을 해. 자기 형까지 죽여서 내전도 불사하는 저런 새끼가 사람으로 보여?”
“…….”
“나야 그냥 인질이라 치지만, 너는? 세틱스한테 가면, 보나마나 전쟁의 도구로 쓰일 거라고!”
그녀의 말대로, 내전이 발발한 현 상황에서 세틱스가 제시드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주술과 마법의 극에 달한 인재는 그 자체로 병기이기 때문이다.
“그 인간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 각오가 되어 있어?”
“읏…….”
그의 얼굴은 새하얘져 있었다. 루베인은 제시드를 더 몰아붙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가 세틱스 같은 사람과 뜻을 같이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충분히 파악했다.
결론은 그가 내릴 것이다.
“……루베인 님.”
“응.”
“우선은 루베인 님을 가족분들이 있는 곳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 후에…… 원하는 대로 하세요.”
“너는?”
“……더 고민해 볼까 해요. 어떤 식으로 결말을 낼지. 세틱스 님은 이미 머리끝까지 화나셨을 것 같지만요.”
“응. 상담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아뇨. 더 이상 루베인 님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죠. 제 나름대로 고민해 보겠습니다.”
“…….”
루베인은 제시드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의 뺨을 검지로 꾹 눌렀다.
그가 당황하여 눈을 굴렸다.
“뭐, 뭔가 저 잘못했나요?”
“아냐. 네가 선택한 거면 됐어.”
“……?”
제시드는 뺨을 문지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지해 주지 않는다고 하니까 괜히 섭섭하네.’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도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루베인은 애써 얼버무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추적을 피해 마그달리사 영지를 향하게 되었다.
내전이 발발한 후 처필과 마그달리사 사이의 대중교통은 단절되었다. 경계도 삼엄해져서 이동 수단이 한정된 상황이었다.
마차는 쫓기는 처지에 특정될 가능성이 크고, 포털은 장거리 이동이 불가능한 데다가 마법 흔적까지 지우는 걸 생각하면 마나의 소모가 큰 편이라 지속해서 쓰기는 어려웠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처필의 세오미에서 마그달리사 공작저가 있는 하븐까지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넓은 영지를 두 다리로만 넘어가야 하는, 길고도 까마득한 여정이었다.
루베인은 조급한 마음을 갖지 않으려 노력했다.
당장이라도 세틱스에게 끌고 가면 그만일 텐데, 제시드가 굳이 자신과 함께 고생하면서 움직이는 데에는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내전 소식에 조마조마하며, 두 달이 넘는 긴 도보 여행 끝에 두 사람은 처필령과 마그달리사령의 경계까지 도착했다.
루베인은 그가 거기서 자신을 보내 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아뇨, 루베인 님. 저는 당신을 마그달리사 공작의 앞에까지 모셔다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어째서……?”
“지금 이곳에서 헤어지면, 루베인 님은 그대로 트론 전하에게 갈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지금까지의 행동이, 세틱스 님에 대한 배신이 되어버릴 겁니다.”
“아직도 세틱스 자식한테 미련이 있어서 그래? 그렇게 의리를 지키고 싶어?”
“…….”
제시드는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하븐까지 또 한참 걸리겠지만, 가시죠.”
그의 행동과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직도 고민의 결론을 내지 못한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루베인은 그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속박당하는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위화감이 드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트론은 병사들의 아침 훈련을 확인하고 바쁘게 병무를 처리했다.
간단하게 점심을 때운 후 미뤄 둔 내정 회의를 끝내고 집무실로 돌아오니, 가이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그를 맞이했다.
“고생 많으세요, 전하.”
“응, 그대도.”
“요즘 전하가 너무 순순해서 적응 안 돼요!”
트론이 미간을 찌푸리고 노려보자 가이는 그제야 만족한 듯 생글 웃었다.
“세틱스 전하와 라블미 백작 쪽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도록 주시 중입니다. 웰칸 연합 쪽도 계속 움직이고 있죠?”
“응. 웰칸도 내부가 이래저래 복잡했지만, 할리케가 거의 수습했다는 모양이다. 이후로는 아마 큰 문제 없겠지.”
“아무래도 세틱스 전하 쪽이 압도적인 전력은 아니다 보니, 장기전으로 이쪽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게 뻔히 보이는 상황입니다. 마그달리사 공작을 누가 먼저 편으로 끌어들이느냐 하는 게 핵심이 되겠네요.”
“……마그달리사령에는 사병이 없으니, 물리적으로 제압한다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겠죠. 지금 트론 전하가 말러 왕세자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그나마 크게 먹히지 않는 건 지금까지 전하께서 성실하게 쌓아온 이미지 덕분이니까요. 마그달리사령을 억지로 제압하면, 이쪽에 정의가 있다고 생각했던 병사들이나 백성들이 돌아설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다.”
트론은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뒤로 쓸었다. 정치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은 흔들림 없이 명분을 지켜 나가는 것이었다.
명분과 대의를 어그러뜨려서 얻을 수 있는 당장의 이득들은 끊임없이 정치가를 유혹했다.
“……역시 마그달리사 영애를 빨리 찾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한데. 그쪽의 진척은 어떻지?”
“마술 흔적이 깨끗해서 추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루베인 님이 눈에 띄는 외견이라 탐문을 토대로 동선을 확인하고 있지만요.”
트론이 의아한 듯 물었다.
“동선을 알면 바로 추적할 수 있을 텐데.”
“중간중간 포털을 이용해서 우회하거나, 진로를 트는 것 같습니다.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그 제시드라는 사람, 솜씨가 만만치 않네요.”
“그렇군. 그들이 움직이는 지역이 처필령 쪽이니 이쪽에서 눈에 띄게 대규모로 인력을 투입할 수도 없고…….”
“소수 정예로 뛰어난 마법사를 보내는 게 가장 좋긴 하죠. 으음, 제가 가고 싶어도 내전 대치 상황이니 데니옴을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쉽네요.”
“자기 입으로 뛰어난 마법사라고 하는 건가.”
“에헤헷.”
트론은 잠시 그를 흘겨봤다가 무언가 떠오른 얼굴을 했다.
“뛰어난 마법사라면 나도 한 명 알고 있는데.”
“음, 누구죠?”
“그대의 부친.”
“……아.”
가이는 머리칼을 배배 꼬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