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21)
르터바이스 별저의 위치가 다소 외딴 곳인 관계로, 자선 파티는 치롤헷의 시민 회관을 빌려 진행되었다. 참석하는 모든 귀족들은 자선용으로 무언가 기부품을 가져와야 했다.
스레데니옴 왕국에서 때때로 주최되는 자선 파티는 이렇게 방문객들에게 물품을 기부받거나, 혹은 바자회를 겸하는 형태였다.
이런 곳에서 어떤 물건을 기부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문의 품격을 엿볼 수 있기에 가문의 형편과 맞지 않게 으리으리한 물건을 내놓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번 파티의 표면적인 주최자는 가이즈카 르터바이스 소백작이지만, 그 뒤에 트론 스레데니옴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차기 왕으로 거의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인지도를 가진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귀족들이 가져온 물품은 제법 화려하고 비싼 것이 많았다.
주최자인 가이가 초대받은 귀족들과 환담을 하며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무렵, 파티장 안으로 보랏빛 연회복을 입은 청년이 들어왔다.
다소 심플한 의상이었지만, 찬란한 미모를 자랑하는 얼굴이 눈길을 끌어 다들 의상에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파티의 초청객들은 숨을 죽이고 그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나라의 삼 왕자, 트론 스레데니옴이었다.
“이래저래 바빴을 텐데 이렇게 완벽하게 파티 준비를 해 준 점 고맙게 생각한다, 소백작.”
“천만의 말씀을요. 전하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주변의 눈을 의식하여 두 사람은 의례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 후, 다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홀 입구에서 렌포우 솔피시언 공작과 그의 부인인 라우라가 팔짱을 끼고 나타났다.
“오늘 이렇게 멋진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르터바이스 경.”
“저야말로 직접 자리하여 자리를 빛내 주셔서 영광입니다.”
“전하도 다시 뵙습니다. 저택에 와주셨을 때는 짧은 시간밖에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여 아쉬웠는데, 오늘 회포를 풀면 좋겠군요.”
“그래, 나도 다시 보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그쪽은 그때 못 봤던 그대의 부인인가?”
“네, 맞습니다. 제 처인 라우라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라우라 솔피시언입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외 행사를 끝까지 참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트론은 담담히 생각하며 여느 때처럼 무표정하게 답했다.
“모쪼록 이 파티가 두 사람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군.”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약소하지만, 오늘의 기부품입니다.”
가이가 솔피시언 공작이 건넨 상자를 받았다.
“이것은……?”
“치롤헷 해안에서만 나오는 무지개 진주입니다. 빛을 비추는 방향에 따라 무척 선명하게 여러 가지 빛깔을 내뿜지요. 모쪼록 뜻깊은 곳에 쓰였으면 합니다.”
그의 말은 여상했지만, 무지개 진주는 한 알만 있어도 집 몇 채는 살 수 있는 가격을 자랑하는 비싼 보석이었다. 이 영지의 영주인 만큼 체면치레 이상의 물건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각하. 소중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좋은 곳에 쓰겠습니다.”
“너무 수수한 물건이 아닌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럼, 다른 곳에도 인사 가 보겠습니다.”
“네, 즐거운 시간 되시길.”
솔피시언 공작 부부는 인사하고 두 사람의 곁을 떠났다.
공작부인은 무언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생긋 웃고는 공작을 따라갔다.
그 순간, 가이의 얼굴이 굳었다.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연분홍빛의 구체가 떠오른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아일란이 보내는 신호였다.
“……전하, 엘피 님의 호출입니다. 전하께서 바로 연결하시겠어요?”
“그래.”
트론은 곧바로 사람이 없는 회랑으로 나갔다. 그는 한 시가 급한 듯 빠르게 아나이테를 통해 아일란을 호출했다.
“……엘피? 무슨 일 있나?”
[아, 왕자님……?]
“문제가 생긴 거면 바로 어떻게든 해 주겠다.”
엘피는 잠시 망설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달했다. 특별 도박장이라는 이름하에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왕이 비어 있는 임시 체계라 자치에 맡기고 있다고는 하나, 그따위 짓을.”
그로서는 드물게 목소리에 노여움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저희가 증거를 수집하고 돌아가는 거야 금방이지만……. 지금 경매에 걸린 애들을 빼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걱정되어서요.]
엘피와 루베인이 증거를 수집해서 고발을 하는 시점은, 낙찰된 아이들이 귀족에게 끌려간 후일 것이다.
고발된 이후로는 귀족들도 몸을 사리겠지만, 이미 끌려간 아이들이 어떤 꼴을 보게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참혹했다.
트론은 짧은 시간 고민한 후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르터바이스의 사병은 이유 없이 함부로 사유지에 침범할 수 없다. 그대들이 위험에 빠진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내가 긴급명령권을 발동하여 위병을 움직이는 게 최선이겠군.”
[……전하께서 곤란해지시는 것 아닌가요?]
왕족이라고 해서 권한이 무한한 것은 아니다. 반쪽짜리 권한을 가지고 있는 트론은 더욱 그랬다.
정치는 명분과 정당성의 싸움이다. 함부로 긴급명령권을 발동하면 차후에 헤럴드가 꼬투리를 잡아 정치적으로 공세를 펼칠 가능성이 컸다.
본인의 영지에서 그런 월권을 사용한 것에 대해 솔피시언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리스크의 경중을 재서, 그중 쓸모없는 것을 도려내는 것은 간단했다. 지금 긴급명령권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아이들 몇 명의 희생을 눈 감는 게 훨씬 간편하고 합리적인 길이었다.
“주군께서 성군 놀이에 심취하신 게 아니면 됐어요.”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인지. 엘피에게 거짓된 자신을 꾸미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것인지.
……혹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그것을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항상 선택해 왔다. 태생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떠밀리듯 지옥과 같은 전장을 헤쳐 오면서도 선택만은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그렇기에 라이샤인 엘피와 함께 떠나기로 선택했다. 또한, 현재까지의 길을 선택했다.
“차후의 곤궁을 피하기 위해 결단을 미루지는 않을 것이다.”
[……네, 전하!]
트론은 바로 엘피에게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 몸을 돌렸다.
온전히 실리보다 올바름을 선택한 순간이었다.
***
그 이후의 처리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트론은 망설이지 않고 긴급명령권으로 도박장을 압수 수색했다.
루베인은 본인이 이 일을 수상하게 여겨 조사 후에 트론에게 제보했다고 하며 신문사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인터뷰를 했다.
사람들은 사적인 제보만으로 긴급명령권을 발동한 트론의 행위가 월권인지 아니었는지 토론하는 한편, 그래도 아이들을 사고파는 만행에 대해서는 입을 모아 분개했다.
특별 도박장과 솔피시언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나오지 않았다. 솔피시언 공의 측근이었던 다른 후작이 죄를 뒤집어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솔피시언과 그 도박장이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고 소곤거렸다.
그 일이 일어난 이후, 솔피시언 공작부인이 정식으로 솔피시언 공작에게 이혼을 요청하여 소송 과정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의심을 더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솔피시언 공작도 정신이 없었는지 치롤헷에서 발동된 긴급명령권에 대해서 트론에게 제대로 항의할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가이는 부채를 파닥거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공작부인이 마지막에 말한 동전던지기의 결과가 뭔가 했더니, 이거였군요.”
“……그래. 익명으로 그간 아이들을 제공하던 공급책에 대한 것도 제보받았는데, 아마 공작부인 경유일 가능성이 크겠지.”
트론의 말을 듣고 엘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작부인도 그간 특별 도박장에서 있었던 일이 양심에 찔렸던 걸까요?”
“글쎄. 그저 변덕 아닐까. 막판에 마음을 바꿨다고 해서 그녀가 도박장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현재로서는 물증을 잡기 어렵지만, 차후에 솔피시언 공작은 물론, 죗값을 치러야 할 이들에게는 그만한 대가가 돌아가게 만들 것이다.”
데니옴으로 돌아온 세 사람은 그렇게 그간의 일을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루베인은 특별 감찰관이 되었잖아요.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일이라서 앞으로 얼굴 보기 힘들어지겠어요.”
“그렇죠. 사실 그 전에는 유명무실한 직책이었습니다만, 루베인 님이 그 일을 허투루 하실 리는 없으니까요.”
엘피가 이해하기로 특별 감찰관은 전생 때 가끔 듣던 ‘암행어사’랑 비슷한 역할이었다.
신분을 숨기고 잠입하여 각 영지에 중앙 법률을 위배하는 일이 없는지 감시하고 수색하는 일이라고 했다.
“루베인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일 같아요.”
“네, 정말요. 이번 일의 여파로 이래저래 당분간 또 바쁘겠습니다만……. 솔피시언 공도 본인 일이 수습되는 대로 반격하려 들겠죠.”
“응. 나로서는 차라리 이번에 당한 걸 분하게 여긴 솔피시언 공이 바로 형님들을 밖으로 끌어내 주면 고마울 것 같군.”
“지금 타이밍에 모습을 드러내 봤자 전혀 메리트가 없으니까, 그러지는 않겠지만요. 어찌 되었든, 두 분 전하를 다시 뵐 날이 멀지는 않았겠네요. 이제 겨우 1년이 남았으니까요. 사망 선고 기한이.”
“……그렇지.”
트론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창문 바깥을 보았다. 정원으로 보이는 녹음이 선연했다.
“아, 그리고 전하. 다음 주에 고아원에 방문하신다고 그랬죠? 이번 일로 구조된 아이들이 들어갈 예정인 곳이요.”
가이의 질문에 트론이 끄덕였다.
“응. 다만, 공식 일정 전에 비공식적으로 먼저 방문할 예정이다. 아무래도 원아들이 대대적인 행사 분위기에 놀랄 수 있으니, 미리 달랠 겸.”
“전 아이를 안 좋아해서 동행은 사양하겠습니다만, 부재중에 할 일은 처리해 둘게요.”
“알았다. 시녀장과 함께 다녀오지.”
복잡한 사후처리가 산적해 있지만, 그래도 원만하게 해결된 것에 안도하며 엘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만, 그녀에게는 한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쿠일로스 후작 영애’로서가 아니라, ‘엘피 이나드’로서 딜 마그달리사와 대면하여 사과하는 것이었다.
***
“오랜만입니다. 쿠일로스 영애……. 아니, 이나드 영애셨던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공작님. 그간 속이게 된 점,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 소란이 일어난 후, 마그달리사 공작가도 발칵 뒤집혔다.
당장 루베인이 마그달리사 공작의 영향력에서 독립하여 특별 감찰관으로 중앙귀족 작위를 받았으니, 여파가 클 수밖에 없었다.
전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루베인과 함께 사라진 ‘쿠일로스 후작 영애’라는 인물을 당연히 조사했을 것이고, 그것이 가짜 신분이라는 것도 확인되었을 것이다.
이번 일련의 일들의 배후에 트론이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유추가 가능한 사실이었고, 그에 따라 ‘쿠일로스 후작 영애’가 그의 시녀장인 엘피라는 것 역시 금세 알아낼 수 있었으리라.
딜이 정식으로 만남을 요청했을 때, 엘피는 심한 소리를 듣는 것도 각오하고 있었다.
트론은 굳이 만날 필요는 없다고 말해 주었지만, 딜과 대면하여 사과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일 것 같았다.
“사과하실 건 없습니다, 영애. 이번 일도…… 저희 각하께서는 저를 많이 꾸짖으셨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당한 일이고, 전하와 당신이 한 수 위였던 것뿐이지요. 무척 유감스럽습니다만.”
“……마그달리사 공은, 역시 이후로도 저희 전하와 협력할 마음은 없으신 모양이지요.”
“네. 이번에 루베인이 특별 감찰관이 된 일도 무척 화를 내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긴 힘들겠지요.”
“……소공작께서는, 나중에라도 저희 전하에게 힘을 보태 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글쎄요. 저 역시, 트론 전하께 무척 분한 감정을 느끼고 있어서요.”
“이번 치롤헷에서의 일로요……?”
“아뇨, 그것보다는.”
딜은 초록색의 눈을 온화하게 뜨며,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에게 차인 이유가 그분 때문이구나,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