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20)
엘피는 트론의 말을 진지하게 부정했다.
“안 그래! 나한테는 론이 최고야. 여동생 같은 거 필요 없어.”
[……응.]
망설이는 것처럼, 조금 쑥스러운 듯 대답이 돌아왔다.
‘눈앞에 있었으면 저도 모르게 껴안았을 정도로 귀여웠을 텐데.’
하지만 가까이 있다고 해도 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럴 때마다 느껴지는 거리감이 안타까웠다.
[그거 말고는 별일 없었고? 소백작에게 보고는 들었지만……. 트러블 같은 건 없었나 하고.]
“솔피시언 공은 처음에 인사 나눌 때 잠깐 얼굴을 마주친 정도라서. 나하고는 직접 면식도 없으니까, 아마 전혀 눈치 못 챘을 거야.”
[그럼 다행이고. 마그달리사 소공작이랑 돌아다니면서 문제는 없었어?]
엘피는 숨을 삼켰다. 트러블이라고 표현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특수한 상황은 발생했었다.
하지만 트론에게 해도 되는 말인지, 순간적으로 망설여졌다.
[무슨 일 있었던 건가?]
엘피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트론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아졌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심각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엘피는 손을 저으며 얼른 대답했다.
“그, 그게! 왕자님한테 보고드릴 만한 일은 없었어요!”
[……그럼, 왕자가 아닌 동생한테 보고할 일은?]
“…….”
엘피는 저번에 그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장 먼저 말하자는 소리를 주고받은 걸 떠올렸다. 딱히 딜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안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트론은 마그달리사 공작에게 혼담을 제안받고 거절했을 때 바로 엘피에게 말해 주었다.
자신도 비슷한 일이 생긴 이상, 그에게 똑같이 말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결심하고 침을 삼켰다.
“그, 그게.”
[응.]
“……갑작스럽지만, 마그달리사 소공작이 혼인을 전제로 한 교제를 청했어.”
[…….]
잠깐의 침묵이 무척 무거웠다.
[……받아들였어?]
“서, 설마! 그럴 리가! 바로 거절했어.”
트론이 작게 숨을 뱉었다. 어딘지 안심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무언가를 살피는 듯한 기색으로 질문해 왔다.
[왜…… 거절했어? 딜 마그달리사 정도의 남편감은 찾기 힘들 텐데.]
“그, 그야 엄청난 집안의 귀공자이긴 하지만. 론이랑 적대하는 집안의 후계자잖아.”
[……나를 두고 그쪽에 가면 되잖아.]
엘피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세요! 저한테는 전하가 최우선이에요.”
[그럼, 만약에. 마그달리사 소공작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집안의 자제였다면…… 그대는 받아들였을까?]
“아뇨. 전혀 생각 없어요. 애초에, 그 사람한테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걸요.”
[그래…….]
트론은 그 후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쯤, 트론은 조용히 사과했다.
[이상한 거 물어서 미안해, 누나.]
“아, 아냐. 저번에 론도 루베인과 혼담 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줬잖아. 나도 론한테 먼저 말하는 게 맞지.”
[응. 혹시 나중에라도 결혼 생각 있으면…….]
“나중에도 안 생겨! 나보다는 론이야말로, 결혼하고 싶은 사람 생기면 꼭 말해 주기야?”
[난, 결혼 생각 없어.]
“또 그런다. 왕이 되면 훌륭한 왕비님을 맞이해서 후사를 낳아야지. 뭐……. 아직은 좀 먼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
“아무튼, 이상한 소리 하느라 붙잡아서 미안. 많이 피곤하겠다. 푹 쉬어.”
[……응. 누나도 잘 자.]
연락이 끊기고, 아일란은 날갯짓 소리만 남긴 채 공중으로 사라졌다.
잠시 아일란이 사라진 공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엘피는 이불을 끌어 덮었다.
‘……아직은 먼 이야기라고는 했지만.’
트론은 벌써 혼담을 제안받고, 자신 역시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를 신청받았다.
이제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미래에, 그것들이 현실로 도래할지 모른다.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트론이 고귀한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후사를 낳는 일을.
어릴 때도 가끔 어렴풋이 상상했던 것이지만, 예전에는 추상적인 이미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트론이 성인이 된 지금, 그 이미지는 좀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트론은 따스한 미소를 보이고, 상대를 감싸 안으며, 얼굴을 쓰다듬고, 다정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는 순간, 무언가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안 좋아졌다.
‘……뭐, 뭐지. 시누이 질투 같은 건가. 주책인가 봐.’
스스로를 꾸짖으며 엘피는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잠을 이루려고 해도 한동안 그런 상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 쉽게 잠들지 못했다.
***
특별 도박장이 열리는 날이 돌아왔다.
루베인은 영상을 기록하는 마법 도구를 가지고 특별 도박장에서 문제가 되는 정황들을 수집한 후, 파티장으로 직행할 예정이었다.
파티장에는 유력 귀족들이 대거 참석한다. 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불미스러운 정황을 밝히면, 솔피시언이 채 발뺌을 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다음 날 신문에 대서특필될 것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문제가 되는 것은, 원래대로라면 루베인도 자선 파티에 참석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루베인이 갑자기 사라지면 딜이 그녀를 찾아 돌아다닐 것은 자명했다.
“그래서 편지를 남기고 갈까 하고.”
루베인이 짤막한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각하의 방침을 더 이상 따르고 싶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조만간 얼굴은 보일 테니 걱정은 하지 말라고 남길까 해.”
“……불에 기름을 붓는 거 아닐까.”
“내가 아예 흔적을 안 남기고 사라지면 납치당했나 싶어서 공개적으로 발칵 뒤집히겠지만, 그래도 소식을 알고 있으면 오라버니가 나를 그냥 물밑에서만 찾을 거 아니야. 그 정도면 됐어. 마그달리사 가문을 각하 대신 책임지고 있는 이상 오라버니도 일을 크게 벌일 수는 없을 거고.”
“그렇구나. 소공작님에 대해서는 나보다 루베인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알았어. 그럼 이따 준비 마치고 오후 5시쯤 사용인들을 물린 다음에 가이 님의 포털로 이동하자.”
“응. 그리고 아마 언니랑 같이 사라지면, 가출한 언니랑 함께 뜻이 맞아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름대로 그럴싸하잖아.”
“……뭔가, 소공작님께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어쩌겠어. 다 우리 각하가 부덕한 탓인걸. 자, 그럼 얼른 아침 먹고 준비하자. 나, 완전 두근거려! 항상 언니가 하던 잠입 작전을 내가 실행하게 되었네!”
“가이 님 같은 소리 한다…….”
“소백작님하고 비교하지는 말아 줘.”
어째서인지 루베인에게도 평판이 좋지 않은 가이였다.
***
회색의 연미복을 차려입은 남성과 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도박장 입구로 다가갔다. 입구에 있던 도어맨이 점잖게 말했다.
“오늘은 도박장 휴무일입니다.”
회색 연미복의 남성이 그 소리를 듣고 앞으로 나섰다.
청년은 녹색으로 장식한 가면 너머로 상큼하게 웃으며 투명한 기러기 브로치를 보였다. 도어맨은 바로 자세를 바꿔 정중하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그의 옆에 있던 은색 드레스의 여성이 천천히 답했다.
“잃어버린 여름을 찾으러 왔습니다.”
“확인했습니다.”
도어맨은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두 사람을 회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회장 내부는 이전과 달리 푸른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전시된 예술품들이 눈에 띄었다. 척 보기에도 무척 고급스러운 물건으로 보였다.
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 엘피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루베인, 긴장되지 않아?”
위화감 없는 남장을 소화하고 있는 루베인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지금 해방의 기분을 느끼고 있어서! 정말, 얼마 만에 감시 없이 바깥에 나온 건지!”
“루베인도 참…….”
“괜찮아, 맡은 바 임무는 충실히 수행할 거야. 전하께서 믿고 맡겨 주신걸.”
“……응. 나도.”
엘피는 루베인의 팔짱을 끼고 있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특별 도박장에서 적법하지 않은 방식으로 무언가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 증거를 명확하게 포착해야 했다.
평소의 도박장과 달리 딜러들과 승부하는 게임존은 닫혀 있었다. 그들이 안내받은 곳은 이전에 오리 레이스가 벌어지던 객석이었다.
두 사람 외에도 이미 도착해 있는 손님들이 여기저기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엘피는 검은색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긴장을 풀려 노력했다.
레이스 후에 이어지는 특별 경매장까지, 어떤 불법적인 행위가 있는지 똑똑히 지켜봐야 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특별 도박장의 오픈이 늦어져서 송구합니다. 기다려 주신 여러분의 기대에 충족할 수 있도록 오늘 내놓을 물건들에 더 힘을 써 봤습니다.”
여기저기서 만족한 듯 웃는 소리, 박수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피와 루베인은 주변에 섞이도록 적당히 분위기에 맞춰 박수를 쳤다.
“자, 그럼. 언제나처럼 레이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오리 레이스가 시작되려나 생각하고 있으려니, 팸플릿이 배부되었다.
엘피는 팸플릿을 잠시 훑어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틀 전 딜과 함께 도박장에 들렀을 때 오리 레이스를 구경했었지만, 그때 봤던 양식과 달랐다. 석 달간의 승패 데이터가 없었다.
내용을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출전하는 오리들의 이름과 리스트를 보려던 엘피는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엘피가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던지, 루베인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언니? 왜 그래?”
“그게…….”
엘피가 대답하기 전에 사회자가 과장되게 외쳤다.
“자,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오늘의 선수들입니다!”
루베인은 무심결에 레이스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레일 앞에, 겁을 먹은 듯한 아이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구분을 위해서인 듯 각양각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연령대는 다양했고, 남성 여성이 섞여 있었다.
“……이건 설마.”
루베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엘피 역시, 최악의 가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레이스 이후, 경매장.
설마 그 경매장에서 거래되는 것은…….
두 사람의 경악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사회자가 명랑하게 떠들었다.
“아시다시피 오늘의 선수들은 모두 경매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가장 칩이 많이 걸린 선수를 낙찰하셨을 때의 보너스, 잊지 마세요!”
모두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루베인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의 주먹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엘피는 이 비정상적인 공간에서 구역질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냉정해지려 노력했다.
특히 어린아이들을 아끼는 루베인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엘피 역시 분노 때문에 몸이 떨렸다.
하지만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엘피는 심호흡을 하고 루베인에게만 들리도록 빠르게 말했다.
“루베인. 네 마음이 얼마나 참담할지 알아. 그렇지만 우선 정보부터 수집하자. 가이 님이 주신 마법 기록 장치 꺼내.”
“……언니.”
“난 잠깐 연락하고 올게. 아무래도 사태가 심각해 보여서 가이 님과 의논하는 게 좋겠어. 그리고 내키진 않겠지만……. 칩도 걸도록 해. 안 그러면 수상해 보일 거야.”
루베인도 그제야 머리가 식었는지 입술을 깨물고 끄덕였다. 엘피는 그녀를 향해 마주 끄덕이고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예 제도 및 사람을 사고파는 행위는 100년 전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공공연하게 여전히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걸 직접 보는 것은 충격이 심했다.
‘……왕자님, 이 나라를 맡아야 하는 당신의 짐이 너무 무거운 것 같아요.’
울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엘피는 사람이 없는 테라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