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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94화 (94/132)

94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22)

“그게 무슨…….”

“전하와 영애가 서로 애틋한 사이라고 알고 있어서요.”

엘피는 얼굴을 붉혔다.

“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감히 어떻게 전하와…….”

“하지만 당신은 전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분이신걸요. 그분도 이제 성인이시고요. 오히려, 지금까지 그런 관계로 진전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만.”

“……아닙니다! 다, 다른 것보다 왕자님께 실례니 그 오해는 풀어 주세요.”

그녀가 허둥지둥 변명하자, 딜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럼, 저에게 앞으로 가망이 있을까요?”

“……그건,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전하를 보필할 예정밖에 없어서요.”

“뭐, 어떤 방향이든 트론 전하 때문에 차인 건 맞군요.”

엘피는 얼굴을 붉힌 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처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차이고 난 못난 마음에 영애를 괴롭히고 말았네요.”

“……아뇨.”

“이후의 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영애와 다시 느긋하게 차를 나눌 시간이 돌아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본명을 알고 다시 뵙게 되어 기뻤습니다. 그건 진심이에요.”

“……저도, 사과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해요.”

딜은 우아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여름밤의 짧은 꿈을 선사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제는 어디에도 없는 쿠일로스 후작 영애.”

“저야말로, 치롤헷에서 과분하게 대접해 주셨던 일, 잊지 못할 거예요. 감사했습니다.”

티룸에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며, 엘피는 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그저 어린아이처럼 혼인, 연애, 애정 따위를 먼 일로만 여겼다. 자신을 당사자로 두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와, 전하가.’

두 사람을 나란히 두고 생각하려다가 엘피는 흠칫 놀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어. 바보 같은 망상이야.’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상상하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피어오르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감정을 애써 눌렀다.

***

엘피와 트론은 비공식적으로 데니옴 교외에 있는 작은 마을의 고아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신분을 밝히지 않고 봉사활동을 하는 형식이었다.

의상도 크게 위화감이 없도록 단출하게 차려 입었다.

고아원에 도착하자마자 트론은 묵묵하게 짐을 나르거나 청소를 하거나 했다.

하지만 한 나라의 국왕 권한 대행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한 엘피가, 애들 책이라도 읽어 주라며 그를 떠밀었다.

트론은 처음에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요령을 잡지 못해 난처해하는 기색이었지만, 그가 책을 읽기 시작하자 아이들이 옆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여자아이들에게는 인기 만점이었지만, 남자아이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아마도 트론이 여자아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것이 못마땅한 듯했다.

동화책 하나를 다 읽고 나자 여자아이 하나가 반짝이는 눈으로 트론에게 물었다.

“있잖아, 오빠. 어디에서 왔어?”

“데니옴에서.”

“몇 살이야? 몸은 건강하고?”

“열여섯이고, 건강은 보통인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호구조사를 당하고 있었다. 엘피는 후후 웃으며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흠……. 얼굴도 이만하면 됐고. 연수입은 어떻게 돼?”

“글쎄……. 아마 남들보다는 많이 벌지 않을까.”

“좋아, 합격! 남편 후보로 삼아 줄게!”

그의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소녀가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트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고아원의 선생님들은 사색이 되어 엘피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전하께서는 아이들이 사심 없이 한 말을 문제 삼지 않으실 거예요.”

“……그,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요즘 애들이 워낙 조숙하다 보니…….”

“아이들이 정말 귀여워요.”

다들 높은 분들이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숨을 돌리는 기색이었다.

그 와중에도 트론을 향한 공세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오빠, 나랑 결혼해!”

“미성년자랑 결혼하는 건 국법으로 범죄 행위야.”

“메를린이 너무 어려서 그런 거면 몇 년 뒤에 나랑 해!”

“미안하지만, 나이가 많아도 결혼할 생각 없어.”

“뭐야, 치사해!”

아이들이 꺄꺄 소리를 내며 트론의 팔에 매달리거나 등에 업혔다.

트론은 성실한 성격답게 그런 장난을 내치지 않고 하나하나 받아주고 있었다.

‘……론은 나중에 무척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아.’

행복의 형태가 꼭 한 가지는 아니다. 그렇지만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트론이기에, 일상적인 행복을 느끼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좋은 부모가 되어 주는.

물론, 왕이 된 그가 결혼해도 일반적인 가정의 형태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비를 들여, 후사를 낳아 트론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것. 머지않은 미래의 일이었다. 응당 축복할 일이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가슴에 돌을 얹어 놓은 듯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정말 이상해.’

엘피는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냈다.

트론이 허무하게 죽는 일이 없이, 성군이 되어 행복해지는 것.

생명의 은인이자, 가족이자, 유일한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쳐서라도 달성해야 할 미래였다.

회귀하여 결심한 이래 줄곧 그 마음뿐이었다.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바라지 않아야 했다.

***

그렇게 봉사활동 시간이 흘러 거의 끄트머리에 이르렀다.

트론과 여자아이들에게 소외감을 느꼈는지, 몇몇 남자아이들이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중 대장격으로 보이는 소년이 시비조로 트론에게 말을 걸었다.

“어차피 너는 오늘 한 번 착한 척하고 다시는 여기 안 올 거잖아. 빨리 돌아가 버려.”

“…….”

트론은 조용히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소년은 입을 삐죽거리며 악다구니를 뱉어 냈다.

“다음 주에 높으신 분이 으스대러 여기 온다며. 우릴 보면서 불쌍하다고 동정이나 하겠지. 너도 그런 거잖아? 정말 구역질 나!”

선생들의 안색이 새파란 것을 넘어서서 새하얘지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거의 졸도할 기세였다.

엘피는 그녀를 부축하며 트론을 보았다.

예상대로 트론은 그 말에 딱히 동요한 기색도, 화가 난 기색도 없었다. 그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다가 천천히 답했다.

“네 말대로 한 번 선심 쓰는 것처럼 느껴지긴 하겠네. 시간을 내기 어려워서 이곳에 자주 올 수는 없을 것 같거든. 다음 주에 오는 ‘높으신 분’도 마찬가지일 거고.”

그 말을 듣고 여자아이들이 실망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흐, 흥! 거봐! 역시 이런 놈하고 시간 오래 보낼 거 없어. 다들 가자!”

“그렇지만, 높으신 분이 그냥 한 번 선심을 쓰려고 오는 건 아니야.”

“뭐?”

트론은 자신의 팔에 매달린 자그마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설명했다.

“일단은 그 사람이 나라의 중요한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의 움직임은 하나하나 의미를 가지게 돼. 높으신 분이 고아원에 방문했다는 사실이 여기저기 퍼지면, 다들 신경 써서 고아원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 줄 거야.”

“…….”

“그럼,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그 뒤에도 무언가 고아원에 지원이 이어지겠지.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어, 어려운 소리 해 봤자 안 믿어!”

“응. 입장 바꿔서 나라도 안 믿을 거 같으니까, 그건 됐고……. 그냥, 부탁이 있어.”

“……?”

“조만간 여기에 어린애들이 더 들어온다는 소리 들었지? 치롤헷 출신 애들.”

“으, 응.”

“이래저래 사정이 있었던 애들이라……. 처음부터 친하게 지내기는 힘들 거야. 착한 애들만 있지도 않을 거고, 너희랑 성격이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러니까 억지로 친해지라고 부탁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

옆에 있던 소녀가 트론의 무릎에 기어 올라가며 물었다.

그는 소녀가 다치지 않도록 안아 들면서 답했다.

“원래대로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 같은 미운 성격이라도, 한 번쯤은 말을 걸어 달라고. ……사람은, 그 한 번의 기회로 변하기도 하니까.”

“……?”

“쓸데없는 말이 길었네. 다른 동화책 읽어 줄게.”

소년들은 트론의 말에 완전히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따돌려지기는 싫었는지 거리를 두고 그 주변에 앉았다.

트론이 동화책을 읽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얌전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엘피는 왠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트론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어떤 기회로, 사람은 변한다. 무엇보다 그녀가 실감하는 한마디였다.

***

고아원에서의 일과가 끝나고 트론은 사람이 없는 후원에서 아나이테를 불렀다.

“소백작. 부재중에 특별한 일은 없었나.”

[전하, 반나절 못 보셨다고 제가 그리우신 거예요? 차암, 쑥스럽게.]

“…….”

[차라리 핀잔을 주세요…….]

“쓸데없는 데에 기력을 소모하지 않으려고.”

[히잉, 갈수록 차가워지셔. 아무튼, 왕궁에는 별일 없긴 한데요. 으음, 돌아오시고 나서 보고 드려도 되긴 하지만……. 저번에 루베인 님 때문에 조사했던 율페이든 후작가 일인데요.]

“응.”

루베인이 질색했던 선자리 상대, 또한 솔피시언 공이 고용한 것으로 의심되는 마법사의 집안에 대한 조사 결과였다.

[역시 더 캐 봐도 특별한 가문은 아니었습니다. 셋째라는 제시드라는 소년은, 정보 자체가 거의 없더군요. 장기간 병을 앓고 있었다는 정황 정도만 확인됩니다.]

“병을 앓았다라……. 수상하긴 하군.”

[네. 솔피시언 공작저의 마법 보안 수준으로 봐서는, 십중팔구 맞을 것 같지만요. 어찌 되었든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계속 캐 보겠습니다. 그리고 장자라는 세드릭 율페이든이라는 자는 그냥 아카데미를 졸업한 정도인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마그달리사 공작이 자신의 딸과 붙여 주려 노력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거기까지는 예상대로군. ……하지만 겨우 그런 이야기를 말을 꺼낸 건 아니겠지?”

[네. 그래서 사소한 것까지 조사를 했는데요. 좀 이상하더라고요.]

“이상하다고 하면?”

[세드릭 율페이든이라는 자는 밀색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수수한 인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루베인 님한테 물었거든요. 그랬더니, 자신이 만난 건 짙은 갈색에 가까운 주홍빛 머리에, 붉은색 눈의 청년이라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 외견 특징을 듣자마자 트론이 몸을 굳혔다.

“……세틱스 형님이군.”

잠시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이 돌았다. 가이가 정리하듯 마무리했다.

[용감하게 물 위에서 루베인 님과 선을 본 걸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긴 하겠지만요. 아무튼, 중요한 일인 것 같아서 먼저 전달드렸습니다.]

“응. 자세한 건 왕궁으로 돌아가는 대로 의논하기로 하지.”

[네엡.]

트론은 아나이테가 날아올라 사라진 서쪽 하늘 저편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불타는 듯한 저녁놀이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 곧, 전면전인가.’

세틱스가 일찍 나와 준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지만, 그들도 생각이 있다면 트론이 헤럴드를 쓰러뜨려서 힘을 소진한 타이밍을 노릴 것이다.

헤럴드와 결판을 내는 대로, 자신의 형들을 정식으로 대면하게 되리라.

“론, 슬슬 돌아가야지?”

뒤쪽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트론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붉은빛이 물들어 반짝이는 엘피의 금발이 아름다웠다.

트론은 살짝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응, 누나.”

“후후, 오늘 고생 많았어.”

“고생이랄 것도 없었어. 오히려 궂은일은 누나가 다 했잖아.”

“에이, 어린애들이랑 놀면 체력 많이 드는 거 다 알아.”

엘피가 그에게 핀잔을 주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오늘은 왕자궁 돌아가면 일하지 말고 바로 쉬어. 잘못하면 건강 해치니까. 알았지?”

“소백작이랑 검토할 거 있는데.”

“내일하면 안 돼?”

“안 될 건 없지만…….”

“그럼 가자마자 푹 자자! 으음, 뭣하면 생일 선물로 준 거 이 부탁에 쓸게!”

트론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알았어. 왕궁에 돌아가면 쉴 테니까 그런 데다 쓰지 마. 대체 그 생일 선물은 언제 제대로 쓸 거야…….”

“론이 계속 내가 하는 말 다 들어주니까, 생일 선물의 의미가 없는 거 같아. 횟수가 안 줄어들잖아.”

“……그야.”

무언가 대답하려다가 트론은 깨달았다.

만약, 정말로 생일 선물이 될 만한 엄청난 것을 엘피가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트론은 그 부탁을 들어준 후, 다시 말할 것이다. 이런 것은 그냥 들어줄 테니, 원하는 걸 뭐든지 말해 달라고.

엘피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소망한다는 것 자체가 기뻤으니까.

“누나는 항상 자기를 우선시하지 않으니까. 뭐라도 부탁해 주는 편이 기뻐.”

“그건 내가 할 소리인데! 론이야말로 본인을 먼저 챙겨야 해. 알았지?”

트론은 신신당부하는 그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알았으니까, 앞으로도 바라는 건 뭐든지 말해 줘.”

만남이나 인연에 기한이 있다고 해도.

그 끝이 올 때까지 그녀가 바라는 것은 뭐가 되었든 이루어 줄 테니.

앞으로 펼쳐질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한순간이나마 머리에 지운 채, 트론은 곁에 있는 엘피의 따스함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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