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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91화 (91/132)

91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19)

엘피는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낼 뻔한 것을 참았다. 낙찰받은 주인공의 모습을 멀리서 보자마자 그게 누구인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와, 왕자님?’

일반적으로는 절대로 알아채지 못할 외견이었다. 어딜 보나 우아한 귀부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엘피는 확신했다. 저 사람은 다름 아닌 트론일 것이라고.

마치 그 확신을 뒷받침해 주는 것처럼, 흑발의 숙녀는 엘피 쪽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거리가 먼 데다가 가면을 쓰고 있어 확신할 수 없지만,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사회자가 낙찰자를 부르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여장을 한 트론은 별말 없이 낙찰받은 손수건을 인도받고는 바로 회장에서 사라졌다.

사회자가 재미있어하며 여러 가지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답하지 않았다.

엘피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있는 것을 다른 의미로 오해했던지, 옆에서 딜이 걱정하는 듯 물었다.

“낙찰에 실패하셨는데, 괜찮으십니까?”

“아…….”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저 손수건이 트론의 손에 들어갔으면 문제없을 것이다. 왜 여장까지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자신대로 할 일을 해야 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모르게 욱해서 입찰하게 되었네요. 경매가 처음이라 분위기에 당했나 봐요.”

“하하, 보기보다 승부욕이 있으셨군요.”

“……네, 저도 좀 스스로에게 놀랐어요.”

“아무튼, 경매도 끝났으니 돌아가시죠. 루베인도 기다리겠군요.”

“네, 소공작님.”

여러 가지 의문을 접어 두고, 엘피는 경매장을 뒤로했다.

***

“우후후, 아하하하하하!”

솔피시언 공작부인은 일련의 상황을 확인하고 나서 크게 웃었다. 웃음보가 터져서 주체가 안 되는 듯 한참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가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부인이 가면 너머의 눈가를 비비며 입을 열었다.

“정말, 이런 여흥을 준비해 주셨을 줄이야!”

“이왕 뒤통수를 맞을 거라면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 맞는 게 재미있으니까요?”

“그건 저랑 취향이 비슷하시네요. 아하하.”

다시 한번 유쾌하게 웃은 그녀는 손을 들어 보좌관을 불렀다.

보좌관이 정중하게 상자 하나를 그녀에게 전하고 귀빈석을 나갔다. 공작부인은 가이에게 상자를 건넸다.

“……이건?”

“내기의 상품이에요.”

가이는 천천히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예의 기러기 모양의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브로치는 다른 것과 달리 투명한 보석을 사용했다.

“특별 도박장은 이틀 후예요. 그 브로치를 달고 들어가서 도어맨에게 ‘잃어버린 여름을 찾으러 왔다’고 하면 된답니다.”

“암구호가 시적이군요.”

“후후. 아시나요? 최북단의 르터바이스도 그렇지만, 솔피시언도 원래 파워 게임에서 밀리는 가문이었답니다.”

“…….”

“남작부터 시작하여 공작까지 기어 올라간 가문이기도 하고요. 지난 대에 왕비를 배출하기까지 하고, 꽤 고무적이었는데 말이죠. 그러다 셀딕 왕 시해 사건으로 끈이 떨어졌으니.”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부채를 흔들었다.

“분명히 솔피시언 공은 솔피시언의 잃어버린 여름을 찾고 싶은 것이겠죠. 무슨 수를 쓰더라도.”

“……글쎄요. 백작가의 망나니 장남인 저로서는 어려운 이야기로군요.”

공작부인은 생긋 웃었다.

“오랜만에 즐거운 도박이었어요. 모쪼록, 마지막까지 재밌는 걸 보여 주기를 바라요.”

“숙녀께서 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의 끝은 맺게 되겠지요.”

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순수한 의미의 도박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결국 당신이 짊어진 리스크는 없었으니까요. 이기든, 지든.”

“저에게는 동전 던지기 같은 것이었어요. 앞이 나올지, 뒤가 나올지로 미래를 정하는.”

“……?”

“이 내기에서 진다면, 한 가지 결심을 실행하기로 했거든요. 나름대로 저에게는 큰 리스크였답니다.”

“결심……?”

“조만간 알게 되실 거예요. 그럼, 안녕히 가시길.”

가이는 그녀의 말을 석연찮게 생각하면서도 예를 갖춰 인사한 후 귀빈석을 뒤로했다.

그가 돌아간 후에도, 공작부인은 턱을 괸 채 이제는 사람이 없는 경매장 단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라우라.”

얼마 후 보랏빛 머리의 신사가 그녀에게 바쁘게 다가왔다. 그는 상대의 반응도 기다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퍼부었다.

“당신이 돈을 얼마를 탕진하든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낯짝이 있으면 대외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범위에서 노는 게 좋지 않습니까? 오늘 그 손수건은 뭡니까?”

“어머. 유희를 모르는 분이시네요.”

“이런 식으로 굴 거면 차라리 정부를 만드는 게 어떻습니까. 뭐가 그리 허전해서 남들 다 보는 데에서 천박하게 노는 건진 모르겠지만…….”

“잔소리는 집에 가서 하시죠, 공작 각하. 주변에 사람이 없긴 하지만 그런 발언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네요.”

“……됐습니다. 당신과 이야기 해 봤자 머리만 아프죠. 이후에 자꾸 이런 식으로 굴면 출입 금지령을 내릴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공작부인은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우라!”

“괜찮아요. 나오신 김에 정부의 별장에 들르실 거죠? 제가 오랜만에 본저로 돌아가야겠네요.”

“…….”

“그럼, 가서 힘쓰세요.”

손을 팔랑거리며 그녀는 먼저 자리를 떴다.

그 얼굴은 어딘지 후련해 보였다.

***

“……역시 왕자님이 맞으셨군요.”

엘피는 방으로 돌아와 가이에게 사정 설명을 들었다.

[네. 급하게 조달해서 입으시느라고 꽤 고생하셨다는 것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보안 때문에 남한테 맡길 수도 없는지라.]

“그런 것치고는 정말 완벽하던데요! 키가 큰 것 외에는 위화감이 없었어요.”

[저희가 모시는 주군이 워낙 완벽주의자시니 말이죠.]

가이가 농담을 섞어 말하자 엘피가 웃음을 흘렸다.

“좀 아깝네요.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저도 유감입니다. 다시 뵈었을 때는 이미 여장을 푸셨더라고요.]

트론 본인이 들었다면 얼굴을 잔뜩 찌푸렸을 대화였다.

“하지만 어차피 왕자님께서 오실 거면 제가 굳이 입찰을 할 필요가 있었나요?”

[솔직히 좀 아슬아슬했습니다. 임기응변이었거든요. 전하께서 경매가 끝나기 전까지 입장하실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요. 그야말로 도박이었죠. 앞으로 이렇게 리스크 큰 방법은 쓰지 말라고 왕자님이 한소리 하셨어요.]

가이는 가볍게 말했지만, 사전에 의논도 안 하고 큰일을 저질렀다고 트론에게 꽤 잔소리를 들었다.

물론 과정이 즐겁고 결과가 좋았던 것만으로 만족한 가이는 그 잔소리를 귓등으로 넘겼지만.

[다만, 문제는…… 특별 도박장이 열리는 날이 저희 자선 파티와 겹친다는 겁니다.]

“아……. 그건 좀 난처하네요.”

[아마 솔피시언 공도 나름대로 머리를 쓴 거겠죠. 저희 파티가 주목을 받는 동안, 일을 해치우자는 의도도 있었을 겁니다.]

“그럼, 주최자인 가이 님이랑 왕자님은 파티에 빠지고 특별 경매장에 가시기 어렵지 않나요?”

[네. 계획대로 루베인 님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원래는 저나 왕자님이 동행할까 했습니다만……. 귀빈 신분으로 특별 경매장에 들어가는 것이니, 루베인 님이 험한 일을 당할 염려는 없을 거예요.]

“……저어, 그럼 저도 루베인이랑 같이 갈까요? 아일란이 있으니까 긴급 연락망 역할도 할 수 있고요.”

[음……. 확실히 연락망을 생각하면 루베인 님 혼자 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긴 합니다만……. 그건, 왕자님하고 이야기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따가 정리 끝나는 대로 연락하시도록 전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이후 특별 도박장이 열리는 당일까지의 일에 대해서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후, 엘피는 가이와 연락을 끊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야. 이번에는 내가 한 일이 별것 없지만.’

라이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어떻게든 일은 진행되고 있었다.

‘존재가 사라진다’는 현상이 저번에는 짧게 끝났지만, 제시드를 생각하면 낙관할 일도 아니었다. 정말 필요할 때 외에는 힘을 아껴 두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래도 왕자님께 정말 필요한 날이 온다면…….’

그때는 몸을 사리지 않으리라고 다시금 다짐했다.

여러 가지 복잡한 것들이 정리되고 나니, 그다음 고민이 밀려들었다. 딜에 대한 일이었다.

‘소공작님은 진지하게 청해 주셨는데. 물론 나는 거절밖에 할 수 없지만……. 나중에 정체를 밝히고 정식으로 사과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

연애 문제에 둔한 엘피로서는 뭐가 정답일지 알 수 없었다. 처음 직접적으로 받아 본 이성적인 호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미지의 영역이었다.

한참 그렇게 침대에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공중에서 푸드덕 소리를 내며 아일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피.]

“아, 왕자님.”

그녀는 대답과 함께 벌떡 몸을 일으켰다. 딱히 트론이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자세를 바르게 갖추게 되었다.

[……특별 도박장에 갈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네. 아무래도 루베인 혼자만 가게 하는 게 걱정되기도 하고……. 중간 연락망 역할이라도 할까 하고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곳이다.]

“그렇게 따지면, 루베인도 마찬가지인걸요.”

[…….]

“제가 특별히 힘이 있는 건 아니니까, 못 미더우신 건 알아요. 그래도…… 제가 있어야 정말 급박하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가이 님을 불러서 포털로 도망이라도 칠 수 있을 테니까요! 루베인 혼자 보내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루베인에게도 아나이테나 아일란 같은 휴대용 연락 도구를 딸려 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가이에게 듣기로는 개인에 맞춰서 새로 만들어 내는 것에 제법 시간이 걸린다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루베인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어렵다는 의미였다.

[……알겠다. 정말로 조금이라도 낌새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소백작에게 연락하도록 해.]

“네, 꼭 그럴게요.”

트론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당일 도박장 근처에는 르터바이스에 소속된 정예 인원들로 경계를 시킬 생각이었고, 무슨 일이 발생하면 트론 역시 가이의 포털을 통해 바로 이동하면 그만이니까.

[응. 그리고…….]

트론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푹 쉬도록 해.]

“엇,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사양하지 마시고 뭐든 말씀해 주세요!”

잠시 침묵이 돌아왔다. 엘피가 다시 한번 재촉하자, 트론이 작게 말했다.

[……오늘 일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하고.]

엘피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가 그가 그 말을 하는 이유가 여장 때문임을 깨달았다.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것을 참으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기는요. 제 예산이 부족해서 일을 그르칠 뻔했는데, 전하께서 와 주셔서 겨우 상황을 모면한걸요. 오히려 큰 도움이 못 되어 드려서 죄송해요.”

[그대가 시간을 끌어 준 덕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은, 아까 여장하신 것 보고서 바로 왕자님 아닌가 생각했어요.”

[내 위장이 허술했나?]

트론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엘피는 손을 저으며 정정했다.

“아, 아녜요. 아마 다른 사람들은 왕자님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저야 오랫동안 왕자님과 함께 지내왔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생긴 직감이겠죠.”

[…….]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나도, 회장에 들어오자마자 누나가 먼저 보였어.]

‘아,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 아니었구나!’

그 말이 어쩐지 기뻐서 엘피는 눈을 가늘게 만들며 웃었다.

“나는 좀 아쉬웠어. 론이 오랜만에 여장했는데, 먼발치에서밖에 못 봐서!”

[그건 나한테는 다행인데.]

“너무해! 좀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누나는 남동생보다 여동생이 좋아?]

어째서인지 아일란 너머 들리는 트론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앗, 삐쳤나 보다.’

직접 보지 않아도 그의 뚱해진 얼굴이 눈에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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